[중앙 포럼] 무역협상권을 대통령에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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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만 되면 아태경제협력체(APEC)회의를 필두로 자유무역의 말잔치를 벌인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다.

올해의 말 잔치는 유별났다. APEC 정상들이 보고르 선언을 재천명했다. 자유무역의 찌개를 보골보골 끓이자고 해서 보고르 선언이 아니고, 1994년 인도네시아 보고르에서 자유무역 선언을 했다고 해서 보고르 선언이다.

그 계획대로 추진하기로 했다. 선진국은 2010년, 개도국은 2020년까지 모든 무역장벽을 철폐하자는 계획이다. 믿기 어려운 계획이다.

*** 시장개방 사실상 불가능

대부분의 나라가 우리나라를 선진국으로 친다. 2010년까지 우리나라가 농산물을 포함, 모든 시장을 개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있으면 한번 만나봤으면 좋겠다.

APEC 정상들은 또 도하회의에서(악명 높은 우루과이라운드 같은)뉴라운드를 출범시키자는 합의도 했다. 보호무역의 강을 건넌다 해서 '도하'가 아니고, 세계무역기구(WTO)각료회의가 열리는 카타르의 수도가 도하다.

엊그제는 또 중국이 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과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에 합의했다. 중국이 15년 걸려 WTO에 가입하고,그 값으로 수입자유화 의무를 다하는 것도 헉헉댈텐데, 과연 10년 안에 아세안과 자유무역협정 수준의 시장개방을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이에 질세라,김대중(金大中)대통령도 한.중.일을 하나로 묶는 동아시아 FTA를 제안해 세 나라 정상들이 합의했다.

이들 제안은 세계경제가 맞이한 동시불황을 탈출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아무리 좋게 봐도 지나침이 없다. 그런데 미덥지 않게 들린다. 아니, 지난 일을 돌아보면 과연 우리가 다른 나라더러 "시장개방 협상을 하자"고 할 수 있을까 싶다. 교섭할 게 없어서다. 더 이상의 시장개방이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뉴라운드의 출범을 눈앞에 둔 지금에 와서도, 우리 통상교섭본부는 무엇을 어떻게 협상해야 할지 대통령이나 국민으로부터 아무런 주문을 받은 적이 없다. 그저 농산물시장 추가개방 같은, 우리가 원하지 않는 현안이 협상의제로 채택될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는 눈치다.

그 반대의 경우가 미국이다.

미국 무역대표부는 모든 통상교섭에 당당하게 나선다.그 뒤를 국회가 받쳐주기 때문이다. 국회가 대통령에게 무역협상권과 그 내용에 대해 '국민의 지침'을 준다. 국익이 걸린 사항에 관해서는 여.야가 첨예한 이견을 조정해 하나의 민의로 이끌어내는 지혜를 발휘한다. 뉴라운드 같은 주요현안은 더욱 그렇다.

지금대로라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불 보듯 하다. 협상 막바지에 가서야 쌀 시장을 추가개방 할 수밖에 없음을 국민들이 알게 된다. 머리를 깎은 농민대표가 WTO본부 앞에서 데모를 할 것이다. 협상에 참여한 사람들을 언론은 바보,국회는 매국노로 낙인 찍을 것이다. 결국 경제부총리를 포함,경제팀 전체를 물갈이할 것이다.

안됐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비판에 이력이 난 사람이 아니면 감당해 내기 힘든 게 통상교섭본부의 일이다.

그 결과 미.일과의 투자협상,칠레와의 FTA협상 등 우리가 추진하자고 해 시작된 무역협상조차 교착 또는 유야무야되기 일쑤다. '서로' 시장개방 하자며 협상에 나간 사람만 우습게 됐다. 어렵사리 모아놓은 통상전문가들이 속속 교섭본부를 떠나는 게 무리가 아니다.

*** 통상 교섭 당당히 나서야

지금 체제로는 행정부가 나라 전체의 이익차원에서 부문별 이해를 조정할 권한도, 또 의향도 없다고 하면 너무 나간 얘기일까.

국회가 나서야 한다. 국민의 이름으로,대통령에게 무역협상권을 주자. 우리 통상교섭본부도 민의를 등에 업고 남 앞에 당당하게 나설 수 있게 하자.

아무리 상대정당과 대선 경쟁자 욕 보이기에 발등에 불이라 하더라도 국익을 위해 잠시 짬을 낼 수 있지 않을까.

김정수 논설위원 겸 경제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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