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한복판에서 살내음을 낚다

중앙일보

입력

"파죽지세의 반문화의 변화 속에 있는 새 천년 초입에서, 솔직히 말하자면 문학 그리고 나, 심청이 같다. 인당수 깊은 물에 뛰어들어야 할 운명을 지닌…."

인간의 중심을 지키기 위한 순수 문학을 위해 죽어도 좋을 비장한 각오로 소설집 『향기로운 우물 이야기』(창작과비평사.7천5백원) 를 펴낸 지 꼭 1년. 박범신(55.사진) 씨는 이 작품으로 최근 김동리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197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박씨는 『죽음보다 깊은 잠』을 시작으로 『겨울강 하늬바람』등 20여권의 장편소설을 숨가쁘게 펴내 장안의 지가를 높이며 80년대 최고 인기작가로 떠올랐다.

그런 그가 90년대 들어 한동안 절필하다 순수.본격 소설가로 돌아와 『흰소가 끄는 수레』에 이어 두번째 펴낸 소설집이 『향기로운 우물 이야기』다.

"상을 하나 받아 문단과 독자로부터 격려를 받고 싶었다. 그러나 상들은 항상 나를 비켜가 상복도 없구나 생각하며 그런 욕심을 버리려 했는데 뜻밖에 내게도 상이 돌아오니 앞으로의 문학활동에 큰 힘이 될 것 같다."

어떻게 하면 소설이, 문학이 돈이 될 수 있을까 하며 너도나도 상업문학으로 나가던 90년대 박씨는 어느 작가보다도 자신 있었던 문학의 상업성, 그 기득권을 포기하고 순수소설로 돌아왔다. 그러나 웬만한 작가면 서너개 씩 가지고 있는 문학상은 박씨를 비켜가곤 했다.

70, 80년대 인기 작가를 본격 문단의 그 '당당한 위신'이 철저히 외면하기 때문이다. 아니, 이제는 그런 문학상의 체통도 역전돼 돈 될 만한 작품에 돌아가며 오히려 문학을 상업성에 오염시키고 있다는 비난도 일고 있다. 때문에 박씨의 이번 수상은 한 인기작가의 목숨 건 본격문학으로의 '생환(生還) '으로 볼 수 있다.

8편의 단편소설을 싣고 있는 『향기로운 우물 이야기』는 다양한 소재의 이야기와 그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전하는 다양한 서사적 기법이 돋보인다며 평단과 독자들로부터 주목받았었다.

표제작 '향기로운 우물 이야기'는 간통죄 혐의로 피소된 여주인공의 법정 진술과 독백으로 진행된다.

사실적 정보의 옳고 그름만을 따지는 법정의 언어와 삶의 미세한 부분을 담고 있는 주인공의 독백의 대립. 그 대립적 서사기법을 통해 작가는 일상적 껍데기를 벗기고 삶 자체의 진실을 독자들에게 보여준다.

같이 실린 단편 '세상의 바깥'은 환상적 기법으로 두 여자의 삶을 묶어 사랑과 인간의 실체는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못 배우고 못 생긴 20세 사환 박미숙은 직장의 중년 상사를 짝사랑하다 투신자살한다. 그녀의 혼은 그 시각 교통사고로 죽은 팔등신 미녀 정혜림의 몸으로 들어가 되살아난다. 정혜림은 직장 상사 애인을 여럿 두고 즐기는 여자다.

혼은 박미숙이요, 몸은 정혜림인 그녀는 그런 쾌락적 사랑을 못견디고 박미숙의 순수했던 유년의 추억이 서린 강으로 투신하고 만다. 이렇듯 박씨의 소설들은 지금 우리 시대의 여러 이야기들을 들려주면서 결국은 향기로운 인간의 속내와 순수로 투신하고 있다. 이런 대가 없는 순수에로의 투신, 순수 작가로의 목숨건 변신이 이번의 상으로 돌아온 것이다.

"대학 은사 사모님의 빈소에서 수상소식을 받았다. 거의 매일 들이닥치는 배 고프고 술 고픈 우리 제자들에게 사모님은 얼굴 한번 찡그리지 않고 더운 밥과 향기로운 술을 내주셨다. 인간이,인간성이 자꾸 고파지는 시절 내 소설도 그런 밥과 술이 되었으면 한다."

깊어가는 가을, 읽으면 향기로운 인간성의 밥과 술이 될 이야기가 『향기로운 우물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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