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0대 '택시재벌', 개인에게 택시 빌려준 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1면

지난 4일 밤 서울 강남역 인근 도로에서 승객의 행선지를 듣고 택시가 그냥 지나가고 있다. 이날 이곳엔 시청 직원이 단속을 했지만 승차 거부가 많았다. [김성룡 기자]

A씨는 법인택시 회사를 14개나 운영하며 1400여 대의 차를 굴리는 '택시 재벌'이다. 서울시는 최근 A씨 회사를 포함해 5개 택시회사가 불법 도급택시 140여 대를 운영하는 사실을 적발했다. 특별사법경찰을 동원해 수개월 동안 압수수색 등 강도 높은 조사를 벌인 결과다. 도급택시는 회사가 정식 직원이 아닌 개인에게 일정액을 받고 택시를 빌려줘 영업하도록 하는 것으로 여객자동차운수사업법상 불법이다. 적발된 회사들은 ‘이중장부’도 모자라 ‘삼중장부’까지 만든 사실도 확인됐다. 진짜 회계장부와 각종 지원을 받기 위해 기사 수를 부풀려 놓은 지자체 제출용 장부, 매출을 줄여놓은 세무서용 장부 등 용도별로 장부를 따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당국은 세제·유류보조금 등 혜택을 더 누리거나 탈세를 위해 이런 불법을 저지른 것으로 보고 있다.

 지난해 12월 31일 국회는 택시를 대중교통에 포함하는 대중교통 육성 및 이용촉진법 개정안(일명 ‘택시법’)을 통과시켰다. 1조9000억원에 달하는 막대한 예산 지원 문제와 함께 택시가 대중교통이냐는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문제는 도급택시와 같은 불법 행태가 사라지지 않으면 ‘택시법’을 통한 지원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로 전락할 수 있다는 점이다. 정부 지원으로 인한 혜택이 기사나 승객에게 돌아가기보다 이런 불법을 저지르는 택시 업주들 배만 불리는 꼴이 될 수 있어서다. 택시업계 지원에 앞서 불법 관행 단절이 먼저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서울시 관계자는 “택시법에 따라 막대한 지원이 이뤄지면 불법 도급 택시가 이를 빼먹는 수단으로 활용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국토해양부와 각 지자체 택시담당자들에 따르면 현재 서울에는 적어도 5000여 대(법인택시 2만2000여 대 중 23%에 해당)의 도급택시가 운행 중인 것으로 파악된다. 지방까지 합하면 전국에 수만 대의 불법 도급택시가 운행 중인 것으로 추정된다.

 기사 임금 처리 문제 등 택시회사의 불투명 경영 역시 ‘택시법’ 시행에 앞서 개선이 필요한 사안이다. 본지가 입수한 건강보험료 관련 자료에 따르면 국민건강보험공단은 지난해 10월 전국 1432개 택시업체에 2009~2010년 건강보험료로 총 53억여원을 더 내라고 통보했다. 택시기사 보수를 낮게 신고해 그만큼 보험료를 덜 냈다는 것이다. 대부분 택시회사는 기사에게 매일 입금할 돈(사납금)을 정해놓고 있다. 서울은 평균 10만5000원꼴이다. 사납금을 채우고 남는 돈(초과운송수입)은 기사 몫이다. 공식 임금으로 잡히지 않는 돈이라 이에 대해선 회사도 기사도 세금, 4대 보험료를 내지 않는다.

 공단은 업계 반발로 현장 실사 대신 지역별 평균보수(서울 기준 2010년 101만3807원) 미달분에 대해서만 차액만큼 보험료를 더 내도록 했다. 전두현 건보공단 사업장관리부 파트장은 “기사 한 달 보수로 200만원 이상 신고한 곳이 있는가 하면 25만원이라고 써낸 곳도 있어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고 말했다.

 업계 내부에서도 ‘택시법’ 비판의 목소리가 나온다. 서울 도봉구 창동에 있는 일진운수 박철영(73) 전무는 “택시는 고급 교통수단”이라며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고 당당하게 요금을 올려달라고 해야지 왜 국민 혈세로 지원해 달라고 하느냐”고 반문했다. 한국노동연구원 배규식 노사사회정책연구본부장은 “투명 경영을 위해 회계기준을 통일해야 한다”며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택시법은 땜질 처방에 불과한 ‘모르핀법’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특별취재팀=최준호·김한별·고성표·김혜미·김소현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