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밥만 먹고 사냐'

중앙일보

입력

#1. 지난 봄 가뭄이 심했다. 거북등처럼 갈라진 논바닥 모습이 TV와 신문에 자주 등장했다. 6월 초까지도 모내기를 하지 못한 논들이 많았고, 모를 낸 논도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해 농사는 10년 만의 대풍이라고 한다. 정부 조사에 따르면 벼 수확량이 지난해보다 4% 늘어난 3천8백22만섬(한 섬은 약 1백44㎏)에 이른다는 것이다.

독자토론
창고속에 갇힐 쌀 천만섬

흉작을 우려하던 언론과 농림부가 이번엔 풍년이어서 걱정이란다. 예측도 엉터리거니와 몇달 새 해석이 1백80도 달라졌으니 헷갈리지 않을 수 없다. 쌀이 걱정거리가 된 것은 너무 많이 남아돌기 때문이다. 연말이면 퀴퀴한 창고 속에 갇힐 쌀이 1천만섬을 웃돌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해 한해 관리비용만 1천억원을 넘었다. 세계식량농업기구(FAO)가 적정 재고량으로 권장하고 있는 비율은 연간 생산량의 17% 수준인데 현재 우리나라의 이 비율은 30%에 이른다.

#2. 이젠 웬만한 사람도 세계화란 용어쯤은 알게 됐다. 우리 기업이 다른 나라에 가서 마음대로 장사를 하고, 다른 나라 상품이 국내에서 자유롭게 팔리는 그런 환경으로 이해하면 될 듯싶다. 이런 시대에는 나라간 상품 가격차가 존재하기 어렵게 된다. 어떤 상품이 한 나라에서 비싸게 팔리면 금세 수입품이 밀려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아직도 우리나라엔 아주 귀한 대접을 받고 있는 품목이 있다. 바로 쌀이다. 우리나라의 쌀값은 국제 시세의 3~5배에 달한다. 정부가 우리 쌀을 보호하기 위해 시장을 걸어 잠근 덕분이다. 세계무역기구(WTO)회원국 통상장관들이 다음달 카타르에서 만나면 이같은 농업보호문제가 또다시 도마에 오를 것이다.

미국은 물론 앞으로는 중국의 쌀시장 개방압력도 만만치 않을 전망이다. 지금 중국 동북 3성(遼寧.吉林.黑龍江)들녘에는 한국인의 입맛을 겨냥한 벼(자포니카)수확이 한창이다.

몇년 전부터 소량의 외국 쌀이 들어오고 있으나 무시할 수준이다. 문제는 2004년부터다. 본격적인 쌀시장 개방문제를 10년간 참아준 WTO의 인내심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진짜 심각한 것은 지난 10년 동안 이렇다 할 준비를 해놓은 게 별로 없다는 사실이다. 농민단체들의 반발에 밀려 올해도 그냥 지나가고 있다.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와 대선이 있는 내년도 정부의 운신폭은 더욱 좁아질 것이다.

#3. 우스갯소리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농림부 관리들에게 '밥만 먹고 사냐'고 물으면 '그렇다'고 답할 것 같다. 적어도 그들이 펴온 정책을 보면 그렇다. 우리가 그토록 갈구했던 쌀의 자급자족을 이룬 것은 1970년대 말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식량자급률은 아직도 30%에 불과하다. 먹거리의 70%는 수입농산물로 채워지고 있다는 말이다.

남아도는 쌀의 생산은 줄이고, 모자라는 작물의 재배를 늘리는 것이 정책의 줄기가 돼야 한다. 그러나 정부는 지난 20여년 동안 이 간단한 상식 하나를 실천에 옮기지 못했다.

정부의 고수매가 정책에 따라 농민들은 그동안 수매용 쌀을 생산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매용 쌀이 따로 있을까마는 창고에 갇혀 나올 엄두도 못내는 것을 보면 그렇게 불러도 무방하다. 공급이 넘쳐 쌀값이 떨어질 기미를 보이면 농민단체들이 들고 일어났고, 정부는 과거의 대책을 반복했다. 수매한 쌀의 방출을 막는 일이다.

틈새 농작물 재배 실천을

급격히 줄어들고 있는 쌀 소비를 늘리자는 운동이 일고 있으나 추세를 거스르기는 힘들어 보인다.

역시 방법은 재배를 줄이는 길이다. 농사를 짓지 않는 농민들에게 보상차원에서 직접 돈을 주는 게 오히려 낫다. 이와 함께 전국의 수많은 농정관계자들은 수입농산물의 틈새를 파고들 다양한 작물 재배의 전도사로 나섬으로써 월급 값을 해야 할 것이다.

심상복 국제경제팀장 simsb@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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