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 증세 ‘빅딜’ 안 되면 세율 인상 연기 ‘스몰딜’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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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3호 20면

미치 매코널 미국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가 28일(현지시간) 워싱턴DC 국회의사당에서 여야 재정절벽 협상에 대한 기자들 질문세례를 받고 있다. [워싱턴 로이터=연합뉴스]

이번에도 미치 매코널(Mitch McConnell·69)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가 해결사로 나섰다. 미국 상원은 민주당이 장악하고 있다. 당연히 해리 리드 민주당 원내대표가 주인공이다. 공화당 내에서도 그는 서열이 밀린다. 공화당이 다수인 하원 의장은 존 베이너다. 그러나 여야 협상이 벼랑 끝에 몰릴 때마다 활로를 뚫은 건 매코널이었다.

국제경제-벼랑 끝 美 ‘재정절벽’ 협상

수차례에 걸친 버락 오바마(Barack Obama) 대통령과 베이너 하원의장의 영수회담이 수포로 돌아가자 오바마는 28일(현지시간) 여야의 상·하원 지도부를 백악관으로 불렀다. 지난달 16일 이후 6주 만이다. 1시간 남짓 회동 직후 오바마는 협상 타결 가능성이 “어느 정도 낙관적(modestly optimistic)”이라며 협상의 전권을 여야 상원 원내대표에게 맡겼다.

오바마, 협상 “어느 정도 낙관적”
협상 주역이 오바마와 베이너에서 매코널과 리드로 바뀐 셈이다. 지난해 7월 말 사상 초유의 미 정부 디폴트(채무불이행) 위기를 코앞에 두고 벌어진 정부부채 한도 증액 협상 때의 ‘데자뷰’다. 당시에도 오바마와 베이너의 담판이 물거품으로 끝나자 매코널이 나서 협상의 불씨를 살려냈다.

켄터키주 5선으로 20년 상원 터줏대감인 그는 조셉 바이든 부통령과 친구 사이다. 민주당 리드 상원 원내대표와는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때 구제금융 법안 마련을 조율하면서 호흡을 맞춘 바 있다. 이런 노련함을 바탕으로 강경보수파 ‘티파티(Tea Party)’ 위세에 공화당이 휘둘릴 때 그가 중심을 잡았다.

지난해 7월 말과 달리 이번엔 초반 분위기가 매끄러웠다. 지난달 16일 오바마와 베이너가 백악관에서 만났을 때만 해도 그랬다. 베이너의 63번째 생일선물로 오바마가 와인을 건네며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어진 협상에서 베이너는 경직됐다. 그의 발목을 잡았던 티파티가 지난달 총선거에서 몰락했는데도 그는 머뭇거렸다.

‘부자 증세는 1달러도 안 된다’는 공화당 내 보수파 눈치만 보며 시간만 흘려보냈다. 그러다 협상시한에 쫓기자 지난 20일 연소득 100만 달러 이상 부유층에 한해 소득세율을 현재의 35%에서 39.6%로 올리자는 독자 안을 불쑥 내놓고 이를 하원 표결에 부치겠다고 선언했다. 연소득 25만 달러 이상 부유층의 세율을 올리자는 오바마 제안에 대한 반격이었다.

그러나 뜬금없는 그의 제안에 공화당 내에서도 반발이 심하자 하원 표결을 스스로 포기하고 말았다. 여야 양쪽에 체면을 구긴 셈이다. 베이너가 뒤통수를 치자 부자증세 범위를 연소득 40만 달러까지 올릴 수 있다고 한발 물러섰던 오바마도 ‘25만 달러’ 입장으로 되돌아갔다.

오바마가 성탄절 연휴 동안 협상을 중단하고 숨 고르기에 들어간 건 이 때문이다. 협상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이번에도 매코널이 나섰다. 그는 28일 백악관 회동 후 기자들과 만나 “30일까지 재정절벽(fiscal cliff)을 피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겠다”며 “타결에 대해 희망적이고 낙관적”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오바마와 맞선 베이너와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재정절벽’ 시한이 촉박한 만큼 일단 양측은 ‘스몰딜(small deal)’에 집중할 것으로 보인다. 의회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으면 미 국민 전체 소득세율이 내년 1월 1일부터 큰 폭으로 오른다. 재정절벽 효과를 당장 국민이 피부로 느끼게 된다는 얘기다. 이를 막기 위해 일단 극소수 부유층을 제외한 나머지에 대해선 소득세율 인상을 연기하는 법안을 연내에 처리하자는 게 스몰딜이다.

정치적 계산을 배제한다면 양측의 실무적 격차는 별로 크지 않다. 오바마는 이미 소득세율 인상 대상을 연소득 40만 달러 이상으로 양보하겠다는 뜻을 밝힌 바 있다. 오바마의 애초 제안대로 연소득 25만 달러 이상에 대해 소득세율을 올리면 앞으로 10년 동안 9500억 달러의 세금을 더 거둘 수 있다.

이 기준을 40만 달러로 올리면 같은 기간 세수는 7400억 달러로 준다. 그렇지만 10년 동안 2100억 달러 차이는 같은 기간 미국 전체 세수의 0.5%에 불과하다. 25만 달러냐 40만 달러냐는 정치적 기싸움의 문제이지 재정적자 축소에 큰 변수는 못 된다. 20년 노련미를 갖춘 매코널과 리드가 합의를 이끌어낼 여지가 그만큼 크다는 얘기다.

오바마는 배수의 진도 이미 쳐 뒀다. 의회가 열리는 31일까지 상원의 두 원내대표가 합의안을 마련하지 못하면 연소득 25만 달러 이상 부유층만 증세하는 법안의 상원 표결을 밀어붙이겠다는 것이다. 상원은 민주당이 장악한 만큼 오바마 법안은 상원을 통과해 바로 하원으로 갈 수밖에 없다. 공화당이 다수의 힘으로 하원에서 이를 부결시키면 전 국민 세율 인상의 비난은 공화당에 쏟아질 수밖에 없다. 공화당 내에서도 이런 처지에 몰릴 상황은 피해야 한다는 여론이 만만치 않다.

그러나 전 국민 세율 인상이란 ‘절벽’을 피하더라도 더 깊은 절벽이 기다리고 있다. 앞으로 10년 동안 4조 달러 이상 재정적자 감축 방안을 이끌어내야 하는 ‘빅딜(big deal)’이다. 공화당은 노인과 저소득층 건강보험인 메디케어와 메디케이드 예산을 확 깎자는 입장이다. 오바마 지지층을 흔들겠다는 계산이다.

작은 절벽 넘어도 내년 큰 절벽 기다려
공화당은 오바마의 아킬레스건도 쥐고 있다. 지난해 7월 말 미 정부를 디폴트 위기로 내몬 정부부채 한도다. 현재 미 정부부채 한도는 16조4000만 달러로 이달 말 상한선에 도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미 재무부가 비상조치를 동원한다 해도 두 달 이상 버티기 어렵다. 그렇다면 내년 2월 이전에 다시 한번 미 정부부채 한도 증액 협상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오바마도 이를 의식해 이번 협상에 정부부채 한도까지 증액하는 방안도 포함시키려 한다. 그러나 공화당은 스몰딜에만 집중하자는 입장이다. 정부부채 한도 증액은 내년 초 빅딜 때 쓸 비장의 카드로 남겨두겠다는 계산이다. 매코널과 리드가 이번에 스몰딜은 물론 빅딜까지 타결 짓는 게 오바마는 물론 미 경제를 위해 최선의 시나리오다. 그러나 협상시한이 워낙 촉박해 그럴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인다. 결국 이번 스몰딜로 작은 절벽을 넘는다 해도 내년 초 더 큰 절벽 앞에서 미국 정가는 다시 한번 격랑에 휘말릴 공산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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