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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박근혜, 솔론이 될 수 있을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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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장달중
서울대 교수·정치외교학

링컨의 표현대로 민주주의는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치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정말 ‘인민을 위한’ 정치로 실현되고 있는가는 의문이다. 지금과 같은 ‘99% 대 1%’의 세계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미국 컬럼비아 대학의 조셉 스티글리츠 교수가 일갈했다. 지금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민주주의는 ‘1%의, 1%에 의한, 1%를 위한’ 정치일 뿐이라고.

 채무 위기에 시달리고 있는 그리스나 스페인 등 유로존만의 얘기가 아니다. 박근혜 당선인은 물론 일본의 아베, 미국의 오바마가 직면하고 있는 ‘부채(負債)민주주의’의 실존적 현실이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실업문제나 민생문제에 제대로 된 해결책을 내놓은 나라는 거의 없다. 결과는 빚더미에 쌓인 국민의 불안과 불만이 더욱 증폭되는 악순환의 연속이다. ‘3포(抛)(결혼 포기·출산 포기·집 포기)’ 세대가 직면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인 것이다.

 해법은 없는 것일까. 민주주의 교과서가 단서를 제시하고 있다. 채무의 악순환을 끊고 고대 민주주의의 토대를 마련한 아테네의 정치가 솔론의 개혁이다. 기원전 6세기 초 도시국가 아테네. 생활을 꾸려 가기 위해 몸을 저당 잡혀 부자들로부터 돈을 빌리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빚을 갚지 못해 노예로 전락하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이른바 아테네판 99% 대 1% 사회의 등장이었다.

 이때 등장한 정치지도자가 솔론이다. 그는 많은 사람의 빚을 탕감해주고, 몸을 빚의 저당으로 잡히는 것을 금지했다. 노예 상태에서 신음하던 사람들을 시민으로 복원시켜주고 정치 참여의 기회를 가난한 시민들에게도 확대했다. 아테네 사람들은 불만이 있었지만 솔론의 조치를 따랐다. 고대 민주주의의 틀은 이렇게 빚으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킨 솔론의 개혁으로 만들어졌다. 정치학자들은 말한다. 중용을 미덕으로 정치의 근간(根幹)을 바꾼 ‘전환적 개혁’의 산물이었다고.

 새 시대를 내건 박근혜 당선인도 전환적 개혁의 과제에 직면해 있다. 그래서 인사에서 정책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주문이 쏟아지고 있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이 지난 정부를 반면교사로 한 관리적 차원의 주문이다.

 지금은 전환기적 개혁이 요구되고 있는 시기다. 한 시대가 끝나고 있지만 새로운 시대는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그런데 이런 역사적 전환기를 관리적 차원의 대응으로 새롭게 열어 갈 수 있을까. 아니다. 과거 정권들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결코 새 시대로의 돌파가 일어날 수 없다.

 지금 우리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은 ‘정확한 시대인식’에 기초한 새로운 시대, 새로운 질서의 비전이다. 그리고 이것을 실현시킬 수 있는 솔론식의 ‘전환의 정치(transformative politics)’다. 탕평인사 같은 것은 그 다음이다.

 혹자는 여성 대통령 당선 하나만으로도 새 시대가 열렸다고 말할지 모른다. ‘남성보다 두 배 더 잘하고도 절반도 인정받지 못하는 게’ 우리 사회의 여성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근혜 현상은 아직까지 예외적인 현상일 뿐이다. 문제는 어떻게 이것을 ‘보통’의 현상으로 전환시킬 것인가가 새 시대의 과제다.

 경제·사회복지 공약도 마찬가지다. 박 당선인이 내세운 201개의 경제·사회복지 공약으로 새 시대를 연다고 말한다. 일시적으로 표를 얻는 데 도움이 되었을지 몰라도 전환적 개혁의 본질과는 거리가 멀다. 지금은 ‘과실의 분배’가 아니라 ‘부담의 분배’ 시대인 것이다. 이것이 의심스러우면 바다 건너 일본을 보라.

 간 나오토 전 일본 총리가 말했다. “정권을 잡으면 금고에 돈이 있을 줄 알았고, ‘간접증세’ 하면 재원이 증가할 줄 알았지만” 생각이 짧았다는 것이었다.

 물론 201개 공약은 정치적 과잉 공약일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부담의 분배를 어떻게 과실의 분배로 전환시킬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사회보장이 ‘최선의 투자’라는 모델을 설득력 있게 제시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하지만 증세하든 빚을 내든 복지를 하지 않을 경우 정치적 문제가 적지 않을 것이다. 정권에 대한 기대는 날아가고 정치 불신의 악순환이 초래될 위험이 있다. 등을 돌린 민심이 정권을 징벌하기 위해 다시 거리로 뛰쳐나가거나, 아니면 개별 이슈들을 몸소 해결하려는 직접민주주의의 움직임으로 의회정치가 무력화될 수 있다.

 어디에선가 이 악순환을 끊지 않으면 안 된다. 의회에서의 다수의 힘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래서 모두가 주시하고 있다. 박 당선인이 보여줄 전환적 개혁의 모습이 어떠한 것일지를.

장 달 중 서울대 교수·정치외교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