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기업비리 처리 신경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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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5면

"담당 기업의 중대한 위법사실을 알게 되면 바로 이사회에 보고해 시정토록 하고, 이것이 안 먹히면 우리에게 알려라."

미 증권당국이 기업 변호사들에게 이런 임무를 맡기려 하자 변호사들이 크게 반발하고 있다. "그건 우리가 할 일이 아닐 뿐더러 고객과의 관계를 크게 훼손하는 것"이라고 맞서고 있는 것이다.

SEC(증권거래위원회)가 변호사까지 동원하겠다고 나선 이유는 엔론.타이코.월드컴 등의 대규모 회계 부정사건 이후 더 이상 이같은 사건이 재발해선 안된다는 판단에 따른 것. 기업 스캔들을 막기 위해 지난해 7월 기업부정개혁법(사반스 옥슬리법)을 통과시킨 의회도 SEC에 보다 엄격한 변호사 직무지침을 만들 것을 주문해 놓은 상태다.

고객(기업)에 대한 법률 자문과 소송 대리를 하는 변호사는 당연히 기업의 내부사정을 훤히 알게 마련. SEC는 변호사들이 이 과정에서 중대한 위법사실을 발견하면 즉시 최고경영자(CEO)나 이사회에 보고해 문제를 바로잡고, 이것이 안 통할 땐 변호사 계약을 해지하고 이 사실을 SEC에 보고토록 한다는 방침이다.

담당 변호사를 기업의 내부 비리를 고발하는 '내부 고발자(whistle-blower)'로 활용하겠다는 것이다. 변호사들이 이런 역할을 할 경우 비리를 초기에 잡을 수 있어 엔론처럼 기업의 파산사태로까지 발전하는 일은 막을 수 있다는 판단이다.

이에 대해 변호사들은 기업의 장부를 감사하는 공인회계사들과 변호사는 임무가 다르다고 주장한다. 회계사들은 분식회계를 발견했을 경우 회계보고서에 그 사실을 적시해야 하지만 자신들은 고객에 대한 법률서비스 제공이 주된 임무라는 것이다.

알프레드 칼톤 미 변호사협회 회장은 "중대한 위반사항을 경영진에게 보고하는 것까지는 받아들일 수 있으나 SEC에 보고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들은 고객의 위법사실을 정부에 고발할 경우 고객과 변호사 간의 기본적인 관계가 허물어진다고 주장한다. 또 SEC가 이런 규정을 만들 경우 '직무상 취득한 비밀은 어떤 경우라도 엄격히 지켜야 한다'는 직업윤리가 흔들릴 것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이에 대해 SEC는 보고할 내용은 직무상 취득한 기밀이 아니라 변호사 직무를 더 이상 수행할 수 없다는 사실뿐이라고 설명한다.

뉴욕=심상복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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