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의 오르가슴’느끼게 한 풍경화의 비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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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호 14면

1.와터 근처의 더 큰 나무들을 작업 중인 호크니

2009년 10월 런던 테이트 브리튼 미술관. 50여 개의 캔버스를 이어 붙인 12m가 넘는 데이비드 호크니의 거대한 풍경화 ‘와터 부근의 큰 나무들(Bigger Trees Near Warter)’ 시리즈를 삼면에서 관람객이 둘러쌌다. 얼마나 기쁘고 행복했던지 “호크니 속에 내가 있다”며 그 자리에서 한국으로 문자를 보내고 호들갑을 떨었다. 좋았으나 당시에는 이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었다. 내가 본 것은 단순히 ‘큰 풍경화’가 아니었던 것이다. ‘눈의 오르가슴’을 느끼게 한 이 멋진 풍경화의 비밀을 알게 된 것은 최근 발간된 호크니와의 대담집 『다시, 그림이다』(디자인 하우스, 2012)를 읽고 나서다.

이진숙의 ART BOOK 깊이 읽기 <42> 『호크니, 다시 그림이다』

이 책은 2006년부터 블룸버그 뉴스의 수석 미술 평론가 마틴 게이퍼드가 호크니와 나눈 대화를 쓴 책이다. 연대기가 아니라 주제별로 단락을 정리하고 두 미술 전문가가 나눈 실제 대화에서는 포함되지 않았을 친절한 주석이 포함돼 있는, 대담집과 평론집의 중간 단계에 있는 글이다. 책은 화가 호크니에 대한 이해를 도울 뿐만 아니라 21세기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호모 픽토르(HOMO PICTOR, 그림 그리는 인간)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해준다. 20세기 중반부터 다양한 종류의 미디어 아트가 등장해 미술계의 우세종을 형성하고 있다. 디지털 혁명으로 이 경향이 더욱 가속화되고 있는 지금도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은 존재한다. 왜 여전히 회화는 우리 곁에 있는가? 이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 이 책은 흥미로운 답을 준다.

2 와터 근처의 더 큰 나무들을 보고 있는 호크니와 친구들.2007년 여름 로얄 아카데미 전시

오랫동안, 그리고 열심히 바라보기
2012년 런던 로열 아카데미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연 호크니(75)는 생존하는 세계 최고의 화가 중 한 명이다. 오랜 미국 생활을 접고 지금 영국 북부의 시골 마을 브리들링턴에서 프랑스인 애인과 함께 살고 있다. 30대 중반 이후 LA의 밝은 햇빛 아래서 살다가 30여 년 만의 귀향, 그리고 정착이다. 이곳에서 그는 다시 ‘자연의 무한한 다양성’에 매혹됐고, 이것은 최근 작품들의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더 열심히 자연을 관찰한다. ‘오랫동안 바라보기, 그리고 열심히 바라보기’는 호크니의 삶과 예술의 핵심적인 행위다. 우리도 많은 자연·사물·인물을 보고 느끼고, 그 감동을 기록하고자 한다. 애잔하게 지는 저녁 노을, 여린 들꽃송이를 향해 열심히 셔터를 누르는 것은 매우 본능적인 행동이다. 나의 체험이 투사된 나만의 이미지를 원하기 때문이다. 미술은 이렇게 인간의 눈이 본 그대로를 담아내고자 하는 욕망에서 시작되는 법이다. 그렇게 “본 것을 선과 점, 색 얼룩, 붓 자국 등의 흔적으로 옮기는 것”의 매력이 바로 화가들, 호모 픽토르들이 계속 존재하게 하는 이유고, 또 우리가 그림을 사랑하는 이유다.

3 와터 근처의 더 큰 나무들을 작업 중인 호크니

한때는 사진이 세상의 모습을 가장 완벽하게 담아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호크니는 인간은 카메라처럼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심리적’으로 본다고 말한다. 또 사진을 찍을 때보다 그림을 그릴 때, 사물과 자연을 더 많이 바라보고 이해하게 된다고 한다. 그는 ‘회화는 나이 든 사람의 예술’이라는 속담을 즐겨 인용한다. 순간의 시각을 담아내는 사진과 달리 회화는 삶의 경험, 세상을 바라보는 경험까지 담아낼 수 있다는 뜻이다. “참신한 생각과 계속되는 관찰을 통해 이전의 것들을 조정”해 나가는 과정에서는 새로움에 대한 열린 감각만큼이나 원숙한 나이와 경험도 중요하다. 그래서 화가에겐 정년이 없다.

세계를 복제하지 말고 해석하라
로열 아카데미에서 서양화를 배웠던 서양화가 호크니는 다양한 작품을 시도하면서 동양화의 원리인 “눈이 마음의 일부”라는 것을 자연스레 이해하게 되었다. 서구의 선원근법은 인간의 눈의 법칙이 아니라 렌즈 사용에 근거한 광학의 법칙일 뿐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호크니는 1970년대 후반부터 사진 콜라주 작업을 하면서 “서구의 원근법이 제거”된 이미지를 만들었다. 이런 과정에서 그는 중국 미술에 눈을 뜨게 된다. 서양의 풍경화에서 보는 사람은 늘 그림의 틀 밖에서 그림을 응시하는 구조에 머물러 있다. 호크니는 동양 회화를 통해 인간이 보고 느낀 실제 세계를 체험과 함께 전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동양 회화에 등장하는 와유(臥遊)의 개념이 그를 매료시킨 것이다. 풍경을 바깥에서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그곳에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하고 싶었기에 그의 그림은 아주 커졌다.

그래서 2009년 테이트 브리튼 미술관에서 나를 열광시킨 건 호크니의 기적이었다. 물론 이 작품은 우리가 아는 동양 회화가 아니다. 다만 서양미술사를 500여 년 넘게 지배해 온 프레임을 또 다른 방향에서 해체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로운 것이다. 예술에는 늘 정답이 없다. 서양 사람인 호크니가 동양 회화에서 얻은 것을 자기식으로 잘 풀어냈다면 그것 역시 또 하나의 미술사적인 성공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해석하는 것”이라는 호크니의 말은 우리에게 화가들이 계속 필요한 이유일 터다. 12월, 앙상한 겨울 나무들뿐이지만 지난해와는 또 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호크니가 그린 겨울 나무들 덕분이기도 하다. 나뭇잎으로 몸체를 가린 뚱뚱한 여름 나무들의 풍성함이 아니라 섬세한 줄기들을 그대로 드러낸 겨울 나무들의 잔잔한 아름다움. 박수근을 통해, 또 호크니를 통해 발견한 세상의 아름다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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