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키 빌랄작 SF만화 '야수의 잠' 출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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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의 묘미는 극단적인 은유로 현실을 드러내고 현실을 비판하는 데 있다. 이는 유럽 만화 매니어들이 걸작으로 꼽기에 주저함이 없는 SF만화 『니코폴』 3부작의 작가 엔키 빌랄의 장기이기도 하다.

빌랄이 다시 한번 과거.현재.미래가 복잡스럽게 얽힌 현란한 시간여행을 펼친다. 현실문화연구에서 펴낸『야수의 잠』 1부(이재형 옮김.1만5천원) 다.

2026년 유일신을 섬기는 세 종교의 원리주의자들이 '몽매주의교' 라는 이름 아래 뭉친다. 이들이 치켜든 깃발은 '역사적 수정주의' 다. 사상.문화.학문 이 세 가지를 인류의 역사와 기억에서 깡그리 지워버리자는 과격한 주장이다.

이들은 주요 국제회의가 열리던 파리의 에펠탑을 공습하고 뉴욕에 있는 가상의 국제기구인 세계중앙기억은행(BCMM) 을 파괴한다. 테러의 도구가 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직접 목표물 안으로 침투해 레이저 광선이 발사되도록 유도하는 사이보그다.

몽매주의교의 수장 격인 워홀 박사는 기억이라는 것을 혐오하는 인물이다. 그의 걸림돌로 등장하는 사람이 주인공인 나이키 아트스펠트다.

나이키는 BCMM의 기억력 전문가로, 태어났을 때의 기억까지 되살릴 수 있는 놀라운 기억력의 소유자다. 워홀 박사는 나이키의 복제품을 만들어 나이키를 제거하려 한다.

『야수의 잠』은 디스토피아의 냄새를 풍겼던 '토탈 리콜' 이나 '블레이드 러너' 같은 할리우드 영화들과 닮은 꼴이다. 사이보그의 등장이 원본과 복제품(레플리칸트) 의 갈등을 불러 일으키고 나아가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끝없는 회의를 가져온다.

혹자는 몽매주의교의 세 지도자를 세르비아의 밀로셰비치 등 보스니아 내전의 세 장본인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작가 빌랄이 유고슬라비아 태생임을 떠올린다면 이 SF만화가 보스니아 내전이라는 현실에 대한 은유가 될 수 있음은 분명하다.

전에 소개된『니코폴』보다는 쉽게 읽히지만, 말풍선을 한 칸 전체에 채우거나 심리묘사를 대신하기 위한 내레이션의 잦은 등장 등 유럽 만화 특유의 연출은 일본 만화에 익숙한 국내 독자들에겐 여전히 낯설다. 총 3부작 예정.

◇ 엔키 빌랄은 누구=1951년생. 파리국립미술학교에서 수학했다. 80년대?볶寧瑩떫湧?장』『여자의 함정』 『차가운 적도』 등『니코폴』3부작을 발표해 일약 주목을 받았다.

철학적 주제를 어둡고 관능적인 회화풍의 감성적 그림으로 풀어내는 것이 그의 장기다. 뫼비우스.드뤼이예 등과 함께 SF만화의 거장으로 대접받고 있다. 87년 세계적 권위의 앙굴렘 국제만화페스티벌에서 대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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