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스계 - KBS 한때 긴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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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체스와 바둑이 한 방송 프로그램 때문에 한판 붙을 뻔하다가 고수들답게 조용한 화해가 이루어지고 있다. 공교롭게도 그 중심에 바둑황제 조훈현 9단이 서 있다.

조 9단이 독일에서 체스의 룰을 막 배워 그 자리에서 서양의 체스 마스터를 꺾었다는 얘기는 이미 26년 전의 화제였고 그 스토리는 조 9단의 일대기인 '전신 조훈현'에도 나온다.

그런데 최근 세상의 신기한 일을 다루는 KBS-2TV의 '스펀지'란 프로그램에서 이 스토리는 별 5개를 받아 1등을 했고 제보자가 100만원의 상금을 타가면서 다시 화제가 되었다. 그러자 체스 동호인들이 인터넷에다 강력한 항의성 글을 올리며 방송 제작진의 사과를 요구하고 나섰다.

체스가 보급된 161개국에서 겨우 500여명만이 '마스터'의 칭호를 받는데 체스를 금방 배운 사람이 마스터를 이겼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이 얘기 때문에 체스가 마치 하위의 게임인양 오도되는 것을 참을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조 9단의 이름이 자주 언급되자 이번엔 바둑팬들이 "그렇다면 조 9단이 사실을 조작했단 말이냐"고 발끈했다.

온라인에서 양측의 공방전이 오고가자 조 9단이 직접 자신의 홈페이지에 글을 올렸다.

"1979년 독일에서 개최된 유럽바둑선수권전에 초청받아 갔을 때 지도대국이 끝난 후 체스를 몇판 구경했다(호기심 많은 조 9단은 한국.일본.중국장기 등을 다 아는데 체스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대국자 중 한 사람이 한판 둘 것을 권해 이에 응했다. 첫판은 폰(졸) 하나 차이로 졌고 두번째는 상대가 제일 센 말이 잡히자 졌다며 패배를 시인했다. 종국 후 상대 실력이 어느 정도냐고 묻자 '바둑은 약하나 체스는 마스터'라고 대답했다.이게 당시의 전말이다."

조 9단은 자신이 겪은 에피소드를 말했던 것이고 체스를 폄하하거나 가볍게 여길 생각은 전혀 없었다고 덧붙였다.

이후 흥분했던 체스인들도 진정세로 돌아섰다. 봉천동에서 체스클럽을 하고 있는 김영진씨는 "처음엔 화가 났으나 조훈현 선생님이 겪은 얘기가 신화처럼 변한 상황을 이해하게 됐다"고 말하고 있다.

TV프로 스펀지에 직접 출연했던 MSO(Mind Sports Olimpiad)의 체스 담당 이상범씨도 "해외(서양)진출을 위해선 바둑과 체스가 협력하는 것이 크게 도움이 된다. 바둑 쪽에서 체스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줬으면 좋겠다"고 톤을 낮췄다.

한국기원 양형모 홍보실장은 "바둑과 체스는 동.서양을 대표하는 두뇌 스포츠다. 이번 일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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