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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기가 만난 조선사람] 모반을 꿈꾼 일곱 명의 서자들
문경 새재 주흘관(主屹關)의 모습 : 문경 새재는 예로부터 영남에서 서울로 이어지는 관문이자 요새였다. 박응서 일행은 이곳을 통해 왜관을 왕래하던 은상(銀商)을 살해해 모반을 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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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기가 만난 조선사람] 소학동자를 자처한 김굉필
김굉필을 모신 도동서원(道東書院)의 모습 : 소학 공부를 몹시 중시했던 김굉필은 위정자의 덕목으로서 수기(修己)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갑자사화 때 희생됐던 그를 모신 도동서원은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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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기가 만난 조선사람] 효종을 좌절시킨 김육의 애민 고집
잠곡(潛谷) 김육(金堉)의 영정 : 대동법 실시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김육은 조선 최고의 경제 전문가였다. 젊은 시절 가평에서 하층민들의 힘든 생활을 몸소 체험했던 그는 영의정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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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기가 만난 조선사람] 선조의 피란길 … 민중은 아무도 불쌍히 여기지 않았다
선조가 1593년 9월 의주에 머물 때 내린 한글 교서. 당시 조선 백성 가운데 포로로 잡혀 일본군에 협조하고 있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에게 개과천선을 촉구하면서 돌아오라고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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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기가 만난 조선사람] 대마도 정벌을 주장했던 황신(Ⅱ)
황신을 모신 창강서원(滄江書院). 적국 일본에 건너가 갖은 수모를 겪었던 황신은 대마도를 정벌하여 일본에 복수하려 시도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충남 부여군 부여읍 저석리 소재.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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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기가 만난 조선사람] 임금의 상징인 전패를 훔쳐 토막 낸 현원일
상주의 객사인 상산관(商山館)의 모습. 객사는 임금의 상징인 전패를 봉안하는 신성한 곳으로 조선시대 각 고을 동헌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이었다. 경북 상주시 만산동에 있다.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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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기가 만난 조선사람] 중국의 현실을 직시했던 연암 박지원
산해관(山海關)의 정문인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의 모습. 만주에서 베이징(北京)으로 이어지는 관문이자 요새였다. 명을 숭앙했던 조선의 지식인들 가운데는 18세기 중반에도 산해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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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기가 만난 조선사람] ‘환향녀’의 비극 … 장유의 며느리와 한이겸의 딸
심양 고궁(故宮)의 모습. 병자호란 당시 여성들을 포함한 수많은 조선 포로들이 심양으로 연행되었다. 어렵사리 속환된 여성들은 ‘환향녀’라는 손가락질 속에 자신의 남편으로부터 버림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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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기가 만난 조선사람] 칙사로 올 때마다 횡포 부린 조선출신 환관 윤봉과 정동
조선에 왔던 명나라 칙사의 행렬도. 중앙에 보이는 관복을 입고 가마를 탄 사람이 칙사다. 15세기 조선에 온 칙사 가운데는 조선 출신 환관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갖가지 요구를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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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기가 만난 조선사람] 조선에 귀순해 충성을 다한 일본인 김충선
김충선을 모신 녹동서원(鹿洞書院). 임진왜란 당시 귀순해 병자호란 이후까지 조선을 위해 공을 세웠던 김충선은 정헌대부에 녹훈되었다. 대구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동에 있다. [사진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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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기가 만난 조선사람] 신문고, 서민은 만져보기도 힘들었다
영조의 어진. 영조는 1771년 폐지됐던 신문고를 건명문 밖에 다시 설치해 민의를 수렴하려 했다. 하지만 워낙 많은 사람이 북을 울리자 신문고를 폐지하려 시도하기도 하고 북을 울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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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기가 만난 조선사람] 조선인삼의 일본 밀반출에 협조한 사람들 (Ⅱ)
조선 노루. 대마도가 ‘조선약재 조사’ 당시 포획해 정교하게 그린 노루의 모습이다. 왜관은 이 같은 동물들을 포획해 반출하는 과정에서 많은 자금을 들여 조선인들을 매수해 활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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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기가 만난 조선사람] 조선 인삼의 일본 밀반출에 협조한 사람들 (Ⅰ)
일본 바쿠후(幕府)의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 조선 인삼을 수입하느라 막대한 은이 유출되는 것을 우려했던 그는 조선 인삼을 국산화하기 위해 ‘조선의 동식물 조사’를 위장한 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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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기가 만난 조선사람] 인조 정권 뒤흔든 이괄의 난 … 일본만 쾌재를 불렀다
공주 공산성의 모습. 이괄의 반란을 맞아 인조는 공산성으로 피란해야 했다. 반란은 곧 진압되었지만, 조선이 처한 위기를 계기로 임진왜란을 저지른 일본의 위세가 다시 높아지는 결과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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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기가 만난 조선사람] 정조와 기록 중시 시대정신 보여준 『화성성역의궤』
『화성성역의궤』에 수록된 낙성연(落成宴) 장면. ‘의궤’에는 기록을 통해 경험을 계승하고 부정과 부패를 막으려 했던 조선시대 선조들의 의지가 담겨 있다. 화성 건설공사의 기획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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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기가 만난 조선사람] 위기에서 발휘된 최명길의 진정성
최명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신도비(神道碑). 병자호란이 일어나는 것을 막으려고 애썼던 최명길은 실제 전쟁이 터지자 목숨을 걸고 적진에 나아가 담판을 벌인다. 그 과정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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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기가 만난 조선사람] ‘천천히 결정하겠다[徐當發落]’를 남발했던 광해군
산대놀이는 조선시대에 성행했던 가면극의 일종이다. 세종대 이래 서울에 온 중국 사신을 영접하는 과정에서 산대도감을 두고 관장하다 민간에도 전파됐다. 송파 별산대놀이와 양주 별산대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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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기가 만난 조선사람]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나” … 살주계를 조직한 노비들
전남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 필암(筆巖)서원에 보관된 노비안(奴婢案, 보물 제587-12호)의 겉표지와 본문. 조선시대 노비는 토지와 함께 양반 지배층의 중요한 재산이었다. 18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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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기가 만난 조선사람]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곽재우, 그를 나 몰라라 한 조정
곽재우의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예연(禮淵)서원. 대구 달성군 유가면 가태리에 있다. 홍의장군 곽재우는 왜란 당시 가장 먼저 의병을 조직해 경상우도와 전라도를 지켜냈다. 일찍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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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기가 만난 조선사람] 왕자를 팔아넘긴 국경인과 그를 진압한 정문부 (Ⅱ)
임진왜란 당시 정문부의 대첩 사실을 기록한 북관대첩비. 1905년 러일전쟁 때 일본이 강탈해 간 뒤 도쿄의 야스쿠니(靖國) 신사 외진 구석에 방치돼 있었다. 오랜 교섭 끝에 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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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기가 만난 조선사람] 왕자를 팔아넘긴 국경인과 그를 진압한 정문부 (Ⅰ)
정문부 장군의 초상. 장군의 호는 농포(農圃), 시호는 충의(忠毅)다. 1588년(선조 21)생원이 되고 문과에 급제, 북평사(北評事)가 되었다. 1592년 회령의 국경인 등이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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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기가 만난 조선사람] 칼을 찬 유학자 남명 조식의 올곧은 기상(Ⅱ)
경남 산청군 시천면에 있는 산천재(山天齋). 남명 조식이 61세 이후 작고할 때까지 머물며 제자들을 가르치던 유서 깊은 곳이다. 서북쪽으로 지리산 천왕봉을 바라보는 위치에 자리 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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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기가 만난 조선사람] 칼을 찬 유학자 남명 조식의 올곧은 기상 (Ⅰ)
조선 중기의 뛰어난 학자이자 교육자였던 남명 조식의 영정 사진. 경(敬)과 의(義)를 함양하고 실천할 것을 강조했던 그의 학풍과 교육관은 16세기 조선에서 아주 이채롭고도 소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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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기가 만난 조선사람] 황수신과 이극돈 … 사관의 사후 평가는 냉정했다
명재상 황희와 아들 황수신을 모신 창계서원(創溪書院). 전북 장수군 장수읍 선창리에 있다. [출처=문화재청 홈페이지]세종대의 명재상 황희에게는 아들 삼형제가 있었다. 치신(致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