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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20)제80화 한일회담(219)-굴욕외교반대시위
64년 3월9일 야당진영은 「대일굴욕외교 반대투위」를 결성했다. 윤보선·박순부·김도연·장택상씨등 정치인과 변영태·이인·장준하씨등 종교·사회단체대표들이 이 운동에 가담했다. 이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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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18) 제80화 한일회담(217) 일본의 속셈
한일문제는 63년 상반기 내내 부심하는 국내정세 때문에 소강상태를 유지할수 밖에 없었다. 박정희의장은 2·18성명을 통해 민정이양과 자신의 민정 불참을 선언했으나 3월16일에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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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17)한국 정정에 촉각-제80화 한일회담(216)
김종필씨가 「자의반 타의반」의 외유서 떠날 무렵 한일간에는 배의환-「스기」수석대표 사이에 예비회담이 진행되고 있었다. 당초 김-「오오히라」회담에서 청구권문제를 매듭 지을 당시 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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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15)|제80화 한일회담-김-오오히라 메모탄생
회담은 마침내 마지막 고비에 다다르고 있었다. 김부장은 △무상3억달러△대외협력기금(ODA)2억달러△민간산업차관 1억달러+ α의 카드를 마지노선으로 밀고 나갔다.여기서 더이상 물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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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13)|제80화 한일회담(212)-태평외상과 두 번째 대좌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미국으로 향한 바로 그날, 미국에서는 이른바「쿠바사태」가 터졌다. 쿠바를 핵미사일 기지화하려는 소련의 기도를 저지하기 위해 「케네디」대통령은 해상봉쇄라는 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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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12) 제80화 한일회담(211)
혁명정부의 두 핵이었던 박정희최고회의의장과 김종필중앙정보부장은 한일문제에 관해서 일찍부터 의기가 투합해 있었다. 김부장이 미국무성초청으로 출국할 때는 박의장과 김부장간에 이미 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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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화 한일회담(210)-김부장-일재계대표 환담
62년 9월 하순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은 그의 청구동 자택에서 10여명의 일본 경제인들과 환담하고 있었다. 이들은 군사정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5차5개년 계획의 참여 가능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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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4010) 제80화 한일회담(209) 윤곽 드러난 일「카드」
한일회담은 62년 하반기로 접어들면서 수개월간의 소강상태에서 서서히 벗어나기 시작했다. 「이께다」 일본수상은 7월의 총재선거에서 재선관문을 무난히 돌파, 안정기에 접어들게돼 한일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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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9)첫 정치회담 결렬-제80화 한일회담(208)
한일회담 타결을 위한 양국 외무장관간의 정치회담 개최가 당시로서는 눈이 번쩍 띄는 진전이었다. 우선 「정치적 타결」이라는 용어자체에 거부반응을 보여온 일본의 일부 여론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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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98) 제80화 한일회담 (197)특사 외교로 돌파구
한일회담의 연전속결을 위해선 청구권 문제에 대한 양국의 현격한 인식차 극복이 가장 선결과제였다. 군사정부는 통상적인 외교채널의 협의로는 청구권에 대한 현격한 견해차를 좁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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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93)제80화 한일회담(192) 기상천외의 제의|김동조
군사 정부의 초기 대일 자세는 한마디로 「순진무구」로 표현해도 좋을 만 했다. 군사 정부 지도자들은 과거의 우리 대일외교가 자유당때는 고집, 민주당때는 무능 때문에 잘 되지 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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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07)제79화 육사졸업생들|한·일관계 개선추진
민정이양 계획을 밝힌 소위 「8·12성명」 이후 김종필씨는 한일간의 관계개선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과거 자유당정권때나 민주당정권때도 일본과 관계개선의 필요성을 누구나 인정했으나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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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터 회고록 「신의를 지키며」…국내 독점 전투
11월17일, 「호메이니」는 「미국의 스파이가 아닌」여자와 혹인 인질들을 석방하겠다고 발표했다. 우리는 즉각 이란측이 단 한사람의 인질이라도 재판에 회부하거나 처벌을 한다면, 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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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원폭피해자 보상문제
한국인원폭피해자에대한 일본측의 보상문제가 한일양국간의 정부「레벨」에서 실무절충단계에 이르렀다는 소식은 만시지탄은 있으나 환영할만한 일로 평가된다. 이로써 한일양국민사이에는 지금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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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각료 회담 9월14∼15일 개최
정부는 정례 한·일 각료회담이 오는 9월14∼15일에 열릴 것으로 보고 회의의제 등을 검토하고 있다. 외무부당국자는 29일 지난번 한·일 외상회담에서 한국측 제의에 따라 정기각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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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실리」 일본은 「명분」|각료회담 결산
5, 6일 이틀동안의 한·일 각료회담은 「새로운 차원의 협력」을 내걸고 공식·비공식회의를 통해 막후적 타결을 지은 인상을 풍겼는데 그 결산을 보면-. 박정희 대통령, 김종필 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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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국교정당화 국내(3)
한국과 일본 두나라 국가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삼폐인」잔이 높이 치켜졌다. 65년 12월18일 중앙청「홀」-. 한·일 양국전권대표단 6명은 박정희 대통령과 속인천황이 서명하고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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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철차관 계속 검토
【동경=조동오특파원】 한국이 요청한 포항종합제철재정지원에대해 일본의 「오오히라」 (대평정방) 통산상은 이견을나타냈다. 15일 대평통산상은 기자들에게 일본은 한국의 요청을 잘라 거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