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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 보고도 없이 장도영 체포…박정희 “혁명에도 의리 있다” (17) 유료 전용
「 JP에게 늘 의문의 인물이 있었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내각수반, 국방부 장관, 육군참모총장, 계엄사령관의 5개 직책을 한 손에 쥐고 있던 장도영이다. 그는 혁명세력에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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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 기자의 공개 못한 취재수첩] “한진이 미군 수송감들 살려준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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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들이 뽑은 가장 좋은 작품…시:만년필, 소설:명랑한 밤길
문인들이 꼽은 지난해 가장 좋은 시에 송찬호(47.사진(左))의 '만년필'이, 가장 좋은 소설에 공선옥(42.사진(右))의 '명랑한 밤길'이 선정됐다. 도서출판 '작가'가 3년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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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9화 육사 졸업생들(157)장창국-장 의장 권한 축소
김종필씨를 중심으로한 8기생의 독주에 대한 5기생들의 불만은 6월 3일 국가재건 비상조치법 등이 제안됐을 때 폭발됐다. 그동안 최고회의는 법적 뒷받침 없어 「최고회의령」에 의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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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혁명위 구성과 8기
혁명군이 일단 서울을 점령한 5윌16일 아침 박정희소장은 5인 혁명위를 구성하고 그밑에 분과위를 두기로 하고 명단을 발표했다. 5인위는 박정희소장 김동하소장(예비역) 채명신준장 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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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3686)|제79화 육사졸업생들(139)|혁명전사
박정희소장의 신당동사택은 5월15일 아침부터 여러 장교들의 출입이 찾았다. 출동시간인 15일 밤 12시를 불과 몇시간 앞두고 최종협의와 출동전검결과 보고등을 위해서였다. 16일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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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제79화 육사졸업생들(138) 거사일 최종확정
「4·19계획」과「5·12계획」이 차례로 유산됐으나 거사추진에는 큰 동요 없이 박정희소장의 일정은 다시 바빠지기 시작했다. 당시 2군 부사령관이면 그는 2군참모장 이주일장군(7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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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제79화 육사졸업생들(111)-「7특」과 「5·16」
5·16직후인 18일 혁명주체들은 현역장교 30명으로된 군사혁명위원회를 구성했다가 20일자로 그 명칭만을 「국가재건 최고회의」로 고쳤다. 구성원은 그대로였고 퇴역 원로군인 2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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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29) 제79화 5기생의 현주소
정승화대장(56)은 요즘 그림공부에 몰두하고 있다. 옥고를 치르고 나온뒤 시작한 동양화공부가 1년남짓에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한다. 지난 1월19일 전북 이리서 열린 스승 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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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26) 제79화 육사졸업생들(79)「5기생주도 반혁명사건」
육사8기와 함께 5·16의 양대 주동세력이었뎐 육사5기생들은 혁명 성공 불과 1개월여만에 반혁명의 이름으로 혁명대열에서 거세되는 불운을 맛보아야 했다. 이른바「장도영일파 44명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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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25)유사졸업생들-「5·16」후의 5기생
5·16군사혁명에 무력부대를 출동시켜 혁명을 성공으로 이끈 실질적 주역인 5기생들은 혁명성공 후 다수가 혁명정부 요직에 참여했다. 군사정부의 최고의결기구였던「국가재건최고회의」최고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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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24)5기생과 「5·16」-제79화 육사졸업생들(77)
5·16은 많은 육사5기생들에게도 생의 진로를 바꾸는 전환점이었다. 5·16군사혁명에 이른바 「주체」로 참여한 5기생들은 ▲김재춘(55·경기김포 당시 대령·6관구참모장최고위원·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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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23)-제79화 육사졸업생들-5기생과 『6·25』
나중 공군참모총장에까지 오른 박원석(59·충남대덕·중장) 장지량(57·전남나주·중장)장군은 그 때 육군항공대 창설요원으로 가 공군이 됐다. 포병의 방경원(57·경남김해·소장6관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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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21) 제79화 육사졸업생들(74) 5기생
육사5기는 47년 7월l일 입교해 만9개월의 교육을 받고 48년4월6일 3백80명이 소위로 임관했다. 9개월의 교육기간은 4년제 이전 사관학교에서는 생도1기로 불리는 10기의 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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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에 충실했지만 덧붙일 점도…
5·16 주역 5명이 자리를 같이해 중앙일보의 연재물「제삼공화국」에 대한 도움말을 주었다. 「5·16 민족상」이사를 맡고 있는 이들은 지난 22일 국일대반점(5·16 민간협력자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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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출동 일부 주력부? 지휘관들 정책소외에 불만 "당하기 전에 손쓰자" 세력 규합
『7월1일 새벽으로 기억합니다. 박 소장이 상임위원들을 비상소집했어요. 그는 이 자리에서고 밝히더군요. 박 소장은 고 합디다. 모두들 「올 것이 왔구나」로 받아 들었지요.』 장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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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국가재건최고회의』(2)
국가재건최고회의가 5월19일 발족되기는 했으나 그 설치근거가 마련된 것은 그로부터 보름이 지난 6월6일이다. 최고회의는 이날 최고회의의 법적지위와 설치근거를 규정한 「국가재건비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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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국가재건최고회의」①
5·16주체들은 진압의 움직임 등 그들을 가로막고있던 장벽을 넘어섰다고 판단한 5월19일「국가재건최고회의」란 통치기구로서 그 모습을 나타냈다. 민정이양까지의 과도기간 혁명과업을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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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가장 길었던 사흘(8)
장도영 참모총장이 다시 방첩대로 돌아온 것은 5월16일 0시가 지나서였다. 출동을 중지하라는 총장의 지시는 집행되지 않은 채였다. 부대의 웅성거림은 계속되고 있었고 수습 특명을 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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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과 함께 도강
박소장이 사령부에 도착한지 얼마안돼 헌병차감 이광선 대령이 70여명의 수사요원을 대동하고 들이닥쳤다. 그러나 이대령이 동조자로 바뀌어 위기를 넘긴다. 이광선씨의 회고. 『15일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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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장 소재지 몰라
이렇게 해서 사령부는 혁명군 쪽에서 부대수습의 책임을 맡았다. 그러나 사령관의 비상소집으로 귀가했던 장교들이 부대로 들어와 뒤섞였다. 누가 혁명군인지 누가 진압군이 될지 분간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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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원곡 김기승)>혁명전야(9)
5·14주체들은 두 차례 계획의 불발로 불안과 초조가 절정에 있었다. 12일 거사를 연기한 박소장은 L-19경비행기로 야전군으로 날아갔다. 주체들은 저녁에 무교동의 경찰청에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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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묵했던 주역들의 증언과 묻혔던 자료를 캐내 엮는 대하 다규멘터리(3)<제자=원곡 김기승
6l년 5월은 한고비를 넘긴 평온의 달이었다. 장면정부를 몰아대던 국회도 휴회에 들어갔다. 극성스럽던 데모의 홍수도 지나갔다. 확실히 3, 4월과는 현저히 개선된 5월이었다.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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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 상 실천에 감명"…책과 편지 보내와
「브라질」의 현직고등법원판사 「뉴튼·사바·기마량이스」씨는 최근 『한국의 개혁가 박정희-용기의 인간상』이란 박정희 대통령의 전기를 발간, 1일 박 대통령에게 증정본과 함께 편지를 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