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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8)중공군 개입(7)|맥아더의 오산(하)
맥아더, 청천강에 비래 「맥아더」 원수는 11월24일 「유엔」군에 대공세를 명령했다. 이날 원수는 동경으로부터 각 삼모와 기자들을 데리고 청천강변의 미8군 전방사령부로 비래하여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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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제4야전군의 출현(하)|중공군 개입(3)|6.25 21주…3천 여의 증인회견, 내외 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3년
10월 24일부터 전개한 유엔군 총 추격전의 최종목표인 한·만 국경에 제일 먼저 도달한 부대는 국군 제6사단 2연대 수색중대의 제3소대였다. 20명으로 된 이 3소대는 10월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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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8선돌파와 북진(16)
(중) 북한수복지역의 군정은, 미8군 관할지역과 미10군단지역과는 그 체제나 실시방법 등에 있어 좀 달랐다. 원래 미10군단은 재한 미지상군 사령관인 「월튼·워커」중장의 지휘를 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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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8선 돌파와 북진 (14)|미 10군단의 국경 진격|「6·25」21주…3천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한국 전쟁 3년
미 제1 해병 사단과 미 제7 보병 사단을 기간으로 한미 제10군단 사령부는 10월26일 이미 한국군 제1군단이 육로로 점령한 원산에 상륙했다. 이보다 3일 후인 29일에 10군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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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원산 (하)
「맥아더」원수는 원래 인천에 상륙,서울율 수복했던 미제10군단 (미제1해병사단과 미제7보병사단)을 해로로 부산을 거쳐 다시 원산에 상륙작전을 전개하여 서진시켜 서부에서 북상하는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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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6·25」20주… 3천 여의 증인 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3년
(5) 평양공격은 「프랭크·밀번」소장의 미 제1군단의 작전담당이어서 그 군단소속의 미 제1기 병사, 한국군 제1사, 미 제24사, 영국군 제27여단이 각각 1번 입성의 진격경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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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8선 돌파와 북진(7)|평양으로(4)|「6·25」20주…3천 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다큐멘터리」한국전쟁 3년
평양으로 일로 쇄도하는 국군 제1사단의 진격 상황을 다시 한 연대장으로부터 들어보겠다. 당시 평양공격을 직접 진두에서 지휘하고, 휴전 후부터 현재까지 국제정치학파 전사를 연구해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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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미켈리스」주한 미군 사령관 증언
본인은 한국에서의 본인의 역할과 본인 지휘하에 있는 병력 내용과 차원을 결정하는 제 사실에 관해 보고하고자 한다. 나의 임무는 휴전을 준수하고 한반도의 평화를 유지하는 것임을 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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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시가전 |서울 수복 (3)|6·25 20주…3천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 전쟁 3년
9월25일 저녁에 적의 서울 방어 주저 항선은 무너졌다. 미 제5해병 연대와 한국 해병대는 격전 끝에 연희고지 일대의 「서부 방벽」을 돌파했고 미7사단 32연대와 한국군 17연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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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증언(171)
낙동강전선에서 충반 격해 올라간 8군과 인천에 상륙한 10군단과의 극적인 악수는 수원남방의 오산에서 이루어졌다. 한국전쟁에서는 여러 면에서 우연한 일치가 많았지만 8군의 제1기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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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6·25」20주년…3천 여의 증인회견·내외 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3년|인천상륙(10)|한국 해병대의 출동(2)
한국 해병대는 미 제1해병 사단에 배속됐기 때문에 자연히 모든 작명이나 지휘를 미군으로부터 받았다. 인천에 상륙할 때에도 미 해병 다음으로 제2파에 끼여 올라갔다. 그러나 상륙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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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인천상륙(9)|한국 해병대의 출동(1)
인천상륙의 주력부대는 미 제1해병사단과 미 7사단이었지만, 우리 한국군도 해병대1개여단과 육군 제17연대가 이 작전에 참가했다. 또한 미 7보병 사단에도 일본에 건너가 훈련을 받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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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신민 승리 장담의 표 속셈|67년의 「동서 경향」재현 전망엔 의견 일치
선거일이 공고된 이후 19일 동안 여야는 주로 중소도시에서의 유세를 통해 비교적 차분한 분위기를 유지하며 탐색전을 벌여왔다. 지금까지의 선거전은 63년 선거 때의 사상 논쟁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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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 워싱턴과의 논쟁 (1)|인천 상륙 (3)|6·25 20주…3천여의 증인회견·내외 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 전쟁 3년
「해리·S·트루먼」미 행정부가 북괴의 남침 후 한국 문제에 관한 정책을 우선 결정하고 그 후에 「유엔」의 추인을 받은 것과 비슷한 경우가 실제 전쟁 지휘에 있어서 현지 군사령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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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맥아더의 집념(2)|인천 상륙(2)|6·25 20주…3천여의 증인 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 전쟁 3년
1945년8월30일 일본의 후목 비행장에 첫 발을 내디딘 맥아더 원수는 『「멜버른」 (호주수도) 서 동경까지의 길은 멀었다』고 말함으로써 일본이 항복할 때까지의 연합군이 겪은 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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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맥아더의 집념 (1)|인천상륙 (1)
1950년9월15일 상오 6시27분. 미 제10군단 산하 제1해병사단 제5연대 제3대대는 함포와 공중 지원을 받으며 월미도로 적전 상륙을 개시했다. 맥아더 원수는 미 해군 순양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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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학도 의용군(8)-이북선무(1)
학도의용병의 전국적 조직으로는 「학도의용대」가 있었다. 6·25 직후에는 각 중학이나 대학에서 개별적으로, 혹은 몇명씩 집단으로 군문으로 들어갔지만, 그후부터는 몇갈래의 조직을 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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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군,「체폰」공략 개시|호통로 요충, 4개 공정대대 투하
【쾅트리(월남)5일AFP합동】약2천명의 월남군 제1보병사단 4개 대대가 5일 호지명 통로상의 주요 공산군 보급기지인「체폰」에서 동남방 6내지 10㎞, 월남 국경선에서「라오스」영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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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군 기지 또 상실
【사이공26일 UPI급전동양】6대 가량의 전차를 앞세운 월맹군 보병대가 25일 하오 전격적으로 라오스 내 월남공륜 부대기지인 제31고지를 점령하고 미군전폭기 1대를 격추하는 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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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낙동강교두보의 운명을 건 영천회전에서 아군이 대승한 것은 지휘관들의 적절한 작전지도와 장병들의 용전분투 때문이지만 또한 운도 좋았다. 때로는 전투에서 우연한 일들이 승패를 좌우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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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6·25 20주…3천여의 증인 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3년|돌출부의 혈전(3)|낙동강 공방전(22)
적은 마지막 9월 총공세 때 돌출부에 대해 또 한번 강습을 시도했다. 낙동강 교두보에 대한 8월 공세가 좌절 된지 대체로 10여일 후에 재게된 적의 9월 공세는 그들로서는 승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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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6·25」20주…3천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3년|낙동강 공방전(21)|돌출부의 혈전(2)
월튼·워커 사령관은 낙동강 돌출부의 위기를 구하기 위해 8군의 예비대인 미25사단27연대도 투입했다. 존·H·미켈리스 대령(현 주한미군사령관)이 지휘하는 27연대의 전투상은 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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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6·25 20주…3천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3년|낙동강 공방전(20)|돌출부의 혈전(1)
낙동강은 창녕군 익산 서쪽으로 돌출하여 낙동강돌출부를 형성하고 있는데 이곳은 거창·합천·창녕 지구로부터 영산을 거쳐 밀양과 삼랑진으로 이르는 요충 지대이다. 낙동강 교두보를 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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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월남 군 3만명, 라오스 작전 계속
【사이공 5일 AP 동화】호지명 통로 주변에 집결되어 있는 월남 군이 대거 접경 진공 했다는 증거는 없지만 월남 군 정찰대들이 매일 통로를 떠나 남부 라오스로 침투, 적정 정찰 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