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6·25 20주…3천여의 증인 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3년|돌출부의 혈전(3)|낙동강 공방전(2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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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적은 마지막 9월 총공세 때 돌출부에 대해 또 한번 강습을 시도했다. 낙동강 교두보에 대한 8월 공세가 좌절 된지 대체로 10여일 후에 재게된 적의 9월 공세는 그들로서는 승산의 최종기회였던 만큼 그 규모나 강도에 있어서 전자를 훨씬 능가하는 것이었다. 16개 사단으로 된 총 9만8천의 병력을 5개 공격집단으로 편성하여 교두보에 대해 일제히 공격을 개시했다.
돌출부에 대해서는 제 2공격집단의 제 2, 제 4, 제 9, 제 10의 4개 사단(총 2만8천)을 투입했다. 8월 공세 때에는 이건식의 제 4사단뿐이었지만, 이번에는 그 4배의 사단을 동원한 것이다. 그러나 실 병력은 2개 사단 정도로 평가되었다. 이에 대해 미군은 새로 막 내한하여 8월 공세 때 이 방면에서 적과 싸운 미 사단과 교대한 로렌스·B·카이저 소장의 제2사단이 대전했다. 이밖에 미 해병대가 8월 공세 때와는 달리 그 투입 여부로 논쟁이 있었지만, 결국 이번에도 미 2사단에 가세하여 돌출부에서 적을 내모는데 큰 몫을 했다.
적 4개 사단은 8월31일 하오 11시30분에 총공격을 개시하여 미 2사단 전면 4개 소에서 도하를 강행, 폭 10㎞ 걸쳐 미군 진지를 돌파했다. 이래서 미군진지는 영산과 창녕의 2개 지구로 분단되고, 8월 공방전 때 초점이었던 클로버리프와 대봉리의 두 고지도 다시 들어갔다. 그러나 이때 현풍 서쪽의 북괴군 제 10사단 행동이 완만했던 것은 미 8군으로서는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럼 여기서 북괴군 연대장으로 이 돌출부 전투에 참가했던 전 괴뢰군 장교의 증언을 잠깐 들어보겠다.

<적, 창녕 앞 고지까지 진출>
▲임헌일씨(당시 북괴군 제2사단 포병 연대장·휴전직후 월남귀순·48) 『8월 하순부터 괴뢰군은 최후의 총 공격을 개시하기 위해,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1주일동안 준비 단계에 들어갔읍니다. 우리는 연대외 도하지점을 구하려고 4일 동안 지형정찰을 한 다음에 창녕 방면의 미군 방어 진지를 돌파하기로 작전을 세웠어요. 8월 31일 야밤중에 3개 사단(현풍 지역의 제 10사단 제외)의 집중 공격으로 4백문의 포가 일제히 불을 뿜는 가운데 보병들은 결사적으로 낙동강을 도하하기 위해 뛰어들었읍니다. 이때 괴뢰군의 포화는 상당했어요 이 마지막 공격을 위해 각종 포와 탄약을 모졸 긁어모았으니까요.
괴뢰군 제 2사단은 사장단 최현 소장(현 북괴 민족 보위상)이 직접 지휘하여 연대장들을 선두에 내세워 격전지 끝에 겨우 창녕 앞 고지까지 진출할 수 있었어요. 그러나 미군의 압도적인 포격과 폭격으로 더 이상 꼼짝할 수가 없었어요. 괴뢰군의 포 지원도 처음에는 괜찮았는데 점차 탄약이 부족하고, 미군폭격으로 며칠 후부터는 아주 쇠약해졌어요. 우리 사단 좌익의 제 3사단은 2차나 도하에 실패, 포와 탱크의 대부분을 상실했고 보병은 약 1개 연대의 병력이 살아남았을 뿐이예요.
이 도하 작전 때 지휘관들이 사병을 사지로 몰아놓기 위해 기만전술을 썼어요.
2사단장 최현은 괴뢰군 전투기가 출격하여 보병을 엄호한다고 백색 대공포 판을 펴게 했어요. 하도 미 공군기가 상공에서 난무해 질려있으니까 이런 식으로 부대장병 사기를 드높이려고 한 고지요. 그러나 이것은 나중에 미 공군기의 좋은 표적이 되어 오히려 큰 피해를 보았어요. 그러나 이 전투에서 웃지 못할 일은 미군 기들이 낙하산으로 식량투하 하는 것을 보고 이쪽에서도 대공연락포판을 깔아 보급품의 투하를 바랐다는 사실입니다.

<미 2사단 진지 양분되고>
그만큼 이때 괴뢰군은 굶주리고 있었어요. 간혹 미군과 괴뢰군 증간에 식량을 실은 낙하산이 몇 개씩 떨어졌는데 이쪽에서도 야간에 결사적으로 접근하여 때아닌 양식 레이션을 포식하는 등 웃지 못할 촌극도 벌어지곤 했지요.
9월10일께가 되니까 마산 방면을 공격하던 괴뢰군 제6, 제7사단이 완전히 진격이 저지됐고, 영천 방면의 제 8, 제 15사단도 국군의 과감한 반격작전으로 거의 녹았어요.
또 설상가상으로 9월 8일에 독전하고 전선에 나왔던 괴뢰군 전선 사령부 참모 총장 강건 중장이 영천전투에서 국군포격으로 죽는 바람에 전 전선은 대구를 눈앞에 바라보며 정돈 상태에 빠졌읍니다(주=괴뢰 쪽은 강건이가 지뢰 사로 전사했다고 주장하고 있음). 돌출부의 창녕 정면 전선도 마찬가지였지요. 9월14일 밤 나도 창녕 앞 고지 전투에서 끝내 부상을 했어요. 미군이 쏜 로키트 포탄이 폭발하면서 그 파편이 내 앞에 있던 포병부연대장의 머리를 까고 나가는 바람에 그는 인사하고, 나는 오른쪽 다리와 얼굴에 중상을 입었어요
나는 벌써 오래 전부터 이 전쟁에 공포를 느껴왔으며 부상한 것이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읍니다. 하루빨리 전선에서 물러나 후퇴하기를 바랐던 것이 이렇게 뜻대로 된 거예요. 9월16일에 나는 서울 점령 때 계획했던 고급 승용차 편으로 영동 야전병원에 후송됐는데 거기에는 중상자만도 5백 여명이 됐고 미처 치료를 받을 사이도 없이 기차에 짐짝처럼 실려 후송합디다. 나는 영동에서 2일간 응급치료를 받은 다음 서울대학의 야전병원으로 다시 이송됐읍니다.』
한편 적 3개 사단이 돌출부에 도하 진출하여 미 제2사단 진지가 양분되자, 워커 장군은 9월1일에 해병대의 재투입을 결심하게 되었다. 장군은 해병대의 사용은 인천상륙에 지장을 줄지 모르지만 낙동강 교두보의 확보가 인천상륙의 전제인 만큼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영산 방면에 들어온 북괴군은 그들의 8월 공세 때처럼 해병대가 아니고는 물리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워커 장군은 후방에 있던 해병대에 영산 이동을 명령했다.

<해병 5연대 조건부 투입>
그런데 이 해병대의 투입문제를 가지고 9월2일에 맥아더 사령부에서는 육·해군 지휘관사이에 격론이 벌어졌다. 인천 상륙작전의 책임자인 올리버·P·스미드 해병사단장과 해군 측 수뇌부는 상륙계획이 근본적으로 뒤흔들린다고 투입된 해병대의 복귀를 강경히 요구했다. 스미드 소장은 직속상관인 제10군단장 에드워드·알먼드 육군중장에게 인천상륙의 제1진으로 계획된 해병 제 5연대를 즉시 영산에서 빼주지 않으면 자기는 인천에 가지 않겠다고 까지 극언했다. 그러나 알먼드 장군은 워건 장군으로부터 전화로 『해병대 없이는 교두보를 지켜낼지 의문이다』라는 전갈을 듣고 있었기 때문에 빼낼 수 없다고 응수했다.
이 문제는 이날 결론을 보지 못한 채 그 이튿날까지 끌고 갔다. 육·해군이 서로의 주장을 고집하여 한치의 양보도 없었다. 결국 결정은 맥아더 원수가 하게됐는데 그는 해군 측 주장에 동의했다. 이에 당황한 워커 장군은 맥아더 원수와의 끈질긴 전화보고를 통해 해병대를 9월6일까지만 조건부로 사용하는 허가를 얻었다.
9월4일 아침8시에 해병 제5연대는 미2사단 9연대와 함께 돌출부에 대한 반격을 재개했다. 비가 내린 간밤에 적은 이상하게도 조용하게 있었다. 날이 새어 진격하는 미 해병대와 보병은 괴뢰군의 혼란과 공포의 광경을 목격했다. 전일에 돌출부상공을 덮은 전술공군의 대폭격과 포격의 전과를 본 것이다.
매장되지 않은 적 시체가 여기저기 흩어져있고 버리고 간 장비 중에는 말짱한 2대의 T-34탱크도 있었다. 어떤 골짜기에는 몇 개의 천막도 그대로 서 있었다. 적 9사단 CP였음이 분명했다. 이날 저녁에 해병대는 대봉리와 클로버리프 능선에 도착하여 5일 새벽의 공격을 준비했다. 영산 방면에 침투했던 적 9사단은 큰 피해를 보았지만 이때 창녕 정면의 미 제 23 연대와 현풍 남쪽의 제 38연대는 여전히 원형진지 안에서 고전 중이었다.
해병대는 9월5일 영산 정면에서 3일께 반격을 계속하여 클로버리프 등 동족 고지를 탈환했다. 이때 2대의 탱크를 앞세운 적 3백명의 맹렬한 역습이 있었으나 대국적으로 보아 적의 공격력은 현저히 둔화되었다. 이날, 8월31일부터 4일 밤까지 북괴군의 주 도하점인 박진도장을 내려다볼 수 있는 대곡 고지를 사수하던 슈미트 부대의 생존자 22명이 귀환하여 귀중한 정보를 제공했다.

<22명만 남은 슈미트 부대>
즉 적은 야간에만 가설하는 철주교와 수중교로 매일 밤 8백 내지 1천명을 돌출부로 도하시키고 있다는 보고였다. 그날 밤 미 공군은 이 수중교를 폭파했다.(주=슈미트 부대란 적의 9월 공세 때 미2사단 9연대의 DH중 화기중대와 박격포중대가 분산되어 대곡 고지에 모였을 때 H중대장 슈미트 중위가 지휘한 부대를 말한다. 슈미트 부대는 용전 끝에 중위 이하 대부분이 전사하고 22명만이 귀환했다.)
해병대는 3일간의 반격을 성공리에 끝내고 6일 상오 0시 제 9연대에 진지를 넘겨주었다. 영산 전선을 이탈한 해병대는 인천으로 가기 위해 우선 부산으로 내려갔다. 영산의 두 번째 위기는 사라진 것이다.
돌출부 북쪽의 창녕 방면에서도 9월5일께부터 적의 전력은 쇠진해 갔다. 이 방면의 미 2사단 23연대는 비록 제1대대가 호수를 등지고 고립되었지만 적2사단과 부딪쳐 끝까지 싸우며 견디었다. 자매 연대인 제 38연대가 북으로부터 제23연대를 지원하기 위해 이동하자 적은 오히려 협공을 받을 위험에 빠졌다. 9월9일까지 미23연대의 전력은 불과40%미만으로 약화되었다. 그러나 적2사단은 여러 번 저돌적 공격에 실패하고 패주하고 말았다.
9월 공세 때 창녕 방면에서는 얄궂게도 피아가 다 같은 2사단끼리 싸웠다.
한국전쟁에서 가장 신비스러운 일 중의 하나는 미제 23연대가 고립되었을 때였다. 앞서도 좀 언급했지만, 현풍 남쪽에 있는 적 제 10사만은 7천명의 강력한 병력을 가지고 포위된 미 23연대 쪽으로 남하하든지 혹은 동북으로 달려 대구로 들어갈 기세를 보였다.
만일, 이때 적 제10사단이 일제공격으로 나왔다면 낙동강 교두보는 결단이 났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적 제 10사단은 오산이었는지 혹은 사단장의 무능이었는지, 하여간 교두보를 전혀 공격치 않았다.
9월10일 이후 돌출부 안에서는 큰 전투가 없은 채 그후의 인천상륙과 유엔군의 총반격이 전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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