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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20주 3천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3년-낙동강 공방전(24)|<영천회전>(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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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낙동강교두보의 운명을 건 영천회전에서 아군이 대승한 것은 지휘관들의 적절한 작전지도와 장병들의 용전분투 때문이지만 또한 운도 좋았다. 때로는 전투에서 우연한 일들이 승패를 좌우하는 적이 있는데 영천회전도 그런 경우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그럼 다시 8사단장 이성가 회장(현 오스트리아 주재대사·50)의 이야기를 계속 들어보겠다.
『적15사단과 8사단에 대한 포위망이 거의 완성할 무렵에 마침 포항의 우군3사단에 지원 나갔던 우리사단10연대가 돌아오게 됐어요. 고근홍 중령의 10연대는 아화로 들어오면서 포위망 속에 들어간 적을 자살북상 했어요. 한편 배에서는 1주일간 경비기간을 준 16연대를 정면에 배치했고요. 영천 남쪽 동굴 속에 적 포진지가 있었는데 16연대가 기습공격을 가해 1시간만에 완전히 파괴해 버렸습니다. 적15사단은 포가 파괴되어 화력이 없으니까 전력을 잃은 거예요.
아화 쪽의 10연대와 북쪽의 16연대를 연결시켜 포위망을 죄면서 적을 섬멸했지요. 이때 생포한 적 장교로부터 그들 작명을 입수했는데 내용은 15사단에 호된 독전을 하는 겁디다. 12사단은 벌써 경주에 들어갔는데 15사단은 뭘 하느냐고 호통이에요. 영천 전투 때는 김묵 소령이 이끄는 공병대대의 공도 컸어요.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어요.
21연대에서 연락이 왔는데 지금 미군 탱크가 막 통과했다고 해요. 나는 미군으로부터 그런 연락을 받은 일이 없어 틀림없이 적 탱크이니 쳐부수라고 명령했어요.

<21연대 포위로 적 전력 분산>
남으로 내려갔던 적 탱크가 밤에 다시 북상한 것을 미군 탱크로 오인한 거예요. 아니나 다를까, 3대의 적 탱크였는데 용감한 신병이 탱크 위로 올라가 뚜껑을 열고 수류탄을 넣었어요. 뒤따르던 나머지 탱크는 모두 서버렸는데 포위해서 다 노획했습니다.
하루는 영천동쪽 고지서 전투를 지휘하고 있는데 당시의 서울시경국장 이익흥씨가 찾아왔어요. 고지에서 내려가 만났더니 내무부도 지금 대구에서 부산으로 옮기려고 모두 짐을 꾸려놓고 마지막으로 전세를 살피러왔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 몇 시간만 있으면 적을 완전히 섬멸하고 반격으로 나간다고 설명했지요. 내 말을 듣고 조 장관은 몹시 안심하는 표정입니다. 그래서 조 장관은 끝까지 대구에 머물러 있게된 것이지요.』
다음은 적에 포위 고립되어 사주방어를 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영천대첩의 계기를 마련한 21연대장의 증언을 들어보겠다. 21연대의 경우는 적중에 포위 고립된 부대일지라도 편제를 견지하면서 분사되지 않으면 승전의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교훈을 남겨 주었다.
▲김용배씨(당시8사단 21연대장=대령·전 육군참모총장·예비역대장·48) 『9윌5일 영천 북쪽 50리쯤인 자천 쪽에 배치된 아군부대가 적 무정군단의 공격을 받고 밀려났어요. 자천에서 급하게 심한 공격을 받아 어떤 연대는 후퇴명령도 없이 물러나 버렸어요. 나도 후퇴명령을 받지 못했어요. 21대의 원위치를 고수하다보니까 인접부대는 모두 후퇴했고, 적은 후방50리의 영천까지 점령해 버렸어요. 그러니까 21연대는 완전히 고립되어 적진 후방에 남게 됐어요. 할 수 없이 자천 서북쪽의 수풀우거진 고지에 사주방어 진을 쳤읍니다.
적은 45연대·103연대·73연대 등이 우리 연대를 공격해 왔어요. 독 안에 든 쥐 격이 됐지만 이때 우리 연대장병은 놀랄 만큼 잘 싸웠어요. 낮에는 유리한 지형을 이용해 은폐와 차폐를 하는 등 가능한 한 공격이나 정면 대결은 피했습니다. 사주방어의 둘레를 나중에는 10리 정도로 좁혔어요. 밤에는 1개 분대 또는 2개 분대의 병력으로 10여 개의 특공대를 조직해 여러 방향에서 적진을 기습했구요. 이 특공대 기습이 적에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그때 장교들이 지원해 특공대장이 돼 나갔지요.
이런 식으로 3일을 싸웠는데도 웬일인지 사단본부와 무전연락이 안돼요. 3일 동안 고립전원상태에서 포위되니까 식량과 탄약이 제일 큰 문제입디다.
3일째 늦게 유재흥 군단장과 겨우 무전이 됐는데 곧 반격할 테니 계속 지금 위치에서 싸우라고 합디다. 4일째 되는 날 영천 남쪽의 연대보급소에 있던 군수참모 허순오 소령이 드리쿼터에 비스킷과 탄약을 가득 싣고 왔어요. 정말 3년 가뭄 끝에 단비를 만난 기분이더군요. 허 소령은 사병3명을 대리고 적중을 결사적으로 돌파하고 온 거예요. 갑자기 환성이 터지고 연대장명의 사기가 충천했어요. 계급에 상관없이 모두 비스킷을 두개씩 나누어 먹었읍니다.』

<사단선 21연대 전멸로 간주>
▲장본인 허순오씨(당시21연대 군수참모=소령·예비역회장·현 한전이사·50)의 이야기. 『나는 영천의 조금 남쪽 연대보급소에 있었는데 21연대가 적 후방에서 실종(?) 돼버렸어요. 적 후방으로 군수보급을 할 수 없거니와 도대체 연대의 위치를 알 수가 있어야지요. 참 답답하고 미칠 지경입디다. 그러다가 9월7일 하오에야 연대위치를 알았어요. 드리쿼터 한 대에 보급품을 싣고 사병3명을 데리고 내가 직접 나섰습니다. 샛길로 차를 몰고 가다가 적 도로 경비병한테 두 번이나 습격 받았어요. 다시 길을 찾아 북상했지요. 적 점령지역이지만 아직도 틈바구니가 많았어요. 그리고 그때는 죽어버렸으면 하는 심정이어서 겁도 안 납디다.』
다시 김용배 연대장의 이야기로 되돌아가겠다. 『이때 영천 쪽을 향해 서주 방어를 하던 박모 일등병이 적 탱크와 4명의 탑승 병을 사로잡았어요. 무슨 목적인지 적 탱크 1대가 북상 중이었는데 호속에 숨어 있던 박 일등병이 겁도 없이 뛰어나가 탱크에 올라타 뚜껑을 열고 M1소총을 들이댔대요.
알다시피 탱크 안에서는 시계가 제한되어 있어 박 일등병을 못 보았던 모양입니다. 사단에서는 그 연대가 전멸한 줄 알았대요. 몇 달이 지난 다음 21연대가 그때 적중에서 성공적으로 사주방어로 버티어 적 2∼3개 연대를 붙들어매었기 때문에 아군부대가 영천반격을 할 수 있는 시간 등 여유를 만든 계기가 되었다고 해서 정부에서 나에게 태극무공훈장을 줍디다.』
영천회전에서는 참전자들의 무용담이 속출했는데 이 중에서도 홀로 6대의 적 탱크를 부순 일선 소대장의 경우는 출중했다.

<"아내에 전사일 알려줘라">
▲변규영씨(당시 제6사단 19연대 1대대 1중대 1소대장=소위·59년 중령제대·현 석공원주주재원사무소장·47) 『6사단 본부 군수처에서 상사로 근무하면서 신령까지 후퇴했다가 장교가 모자라 8월30일에 현지 임관되어 소대지휘를 맡았습니다. 영천으로 가는 신령 고개 위에 배치돼있는데 적 16연대가 10여대의 탱크로 공격해 19연대가 큰 피해를 봤어요. 적 탱크 때문에 장병들의 사기가 말이 아니었어요.
적 탱크 포탄이 30리 떨어진 영천읍내까지 날아갔으니까요. 9월4일께인데 새벽1시에 10여대의 적 탱크가 헤들 라이트를 켠 채 일렬 종대로 신령고개위로 올라왔어요. 아군이 다 후퇴한 것을 알았는지 보병 엄호도 없이 아주 유유하게 올라와요. 내 소대원들이 겁이 나서 벌벌 떨어요. 군수처의 일을 보았기 때문에 나도 이때 처음으로 적 탱크를 보았지만 춘천서부터 저놈 때문에 사단이 쫓긴 생각을 하니 이가 부드득 갈립디다. 한번 겨루어 보자는 결심이 생겼어요. 강성의(전사)·하모 등 2명의 일등중사에게 수류탄 10여 발씩을 들고 나를 따르라고 했어요.
「내가 혼자서 탱크에 기어오를 테니 너희들은 나에게 수류탄을 공급하고 엄호사격을 하라. 그리고 내가 죽거들랑 결혼6개월 된 마누라에게 죽은 날짜나 알려줘라」 고 당부했어요. 고갯길을 내려가 길가에 엎드려 있는데 모두 14대의 탱크가 우르렁 거리며 지나가요. 탱크들이 나의 매복지점 앞을 지나가는데도 겁이 나서 떤 것은 아닌데 뛰어 오르기가 마땅치 않아요. 그냥 엎드려 기회를 보았지요. 좀 있으려니 도로파괴용 매설지뢰가 폭파하여 5m 적경의 큰 웅덩이가 파지며 선두 탱크가 처박힙니다. 그러니 뒤따르던 탱크들이 차례로 정지해요. 이어 도로 지로 폭파지점에서 3백m아래의 교량에 설치된 TNT가 터졌어요. 그러니까 또 한 대가 개울에 떨어지더군요. 이렇게 해서 모두 8대가 꼼짝 못하게 됐고 나머지 꽁무늬의 6대는 도망칩니다. 앞 탱크의 뚜껑이 열리면서 적병들이 기어 나오는 것을 셋이서 카빈으로 사살했어요.

<임관 7일만에 중위진급>
이어 나 혼자 뛰어나가 다음 탱크의 뚜껑을 주먹으로 두드렸어요. 「야! 빨리 열어」했더니 저희 편 일줄 알고 뚜껑을 엽니다. 수류탄 1발을 집어넣었죠. 이런 식으로 차례로 부쉈는데 마지막 탱크에서 눈치를 챘어요. 길가에 엎드려 있는 사병한테서 수류탄을 받아서 달려드는데 기관총을 냅다 쏩니다. 엎드리며 굴러 길가에 숨었다가가 다시 탱크에 올라서서 뚜껑을 두드리며 「너희 편 탱크는 다 죽었다. 문열고 나오라」고 했더니 장교 1명과 병사 4명이 손을 들고 나와요.
이때 동이 트고 있었는데 김익열 연대장·김종오 사단장·미군고문 등 많은 19연대장병들이 고개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었어요. 나 혼자서 모두 적 탱크 6대(지뢰에 걸린 것까지 8대)를 부수거나 생포했어요. 거짓말 같지만 사실 이예요. 이 전공으로 나는 임관 7일만에 중위로 특진하고 을지무공 훈장을 받았읍니다.
다시 영천동북쪽 포항가두(지금의 제2육사근처)에서 영천공방전을 하다가 적 포탄에 오른쪽다리가 날아갔어요. 탱크 부슬 때 같이 나갔던 강성의 중사는 이때 전사했는데 강 중사는 6·25전에 북에서 혼자 월남한 사람 이예요. 단독으로 수색활동을 귀신처럼 잘 하던 사람인데 지금도 내가 그 사람의 사진을 꼭 갖고 다니지만 통일된 후에나 찾아갈 사람이 나타날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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