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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추억] 70년대 한국 외교 기반 닦은 최장수 외교 수장
1977년 1월 27일 박동진 외무장관(왼쪽)이 외무부 업무계획을 보고받기 위해 서울 세종로 중앙청(1995년 철거)으로 들어가는 박정희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 [중앙포토]역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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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의 외교사절 보면 커가는 한국 보인다
1948년 7월 24일 오전 10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의 취임식이 서울 중앙청 광장에서 열렸다. 보슬비가 내렸다. 한복을 입은 이승만 대통령은 오른 손을 들고 국민에게 드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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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의 외교사절 보면 커가는 한국 보인다
관련기사 세계 각국 수장 취임식 살펴보니 그래픽 크게보기매 정부가 출범할 때마다 자랑해온 게 있다. ‘역대 최대 규모 축하사절단’이 온다는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한국의 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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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 과거사 조사대상 7대사건이란?
◇김대중 납치사건= 1973년 8월 8일 일본 도쿄(東京)에서 한국 야당지도자 김대중이 납치된 사건. 1972년 신병치료차 일본에 체류중이던 김대중은 유신체제가 선포되자 귀국을 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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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대상의 아시아
공교롭게도 한.미 양국은 지금 대통령의 수난기(受難期)다.김영삼(金泳三)대통령이 한보사태 등으로 진통을 겪는 동안 빌 클린턴 미 대통령은 선거자금 문제로 곤욕이 크다. 그러나 클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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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니아사태 데이턴 합의의 두主役-홀블루크 美국무부차관보
리처드 홀브루크(54)미국무부 유럽담당차관보는 강력하고 적극적인 자세와 협박에 가까운 협상술로 도저히 타협할 수 없을 것같던 보스니아 내전세력들의 의견을 조정,마침내 평화협정을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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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代부장 김재규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의 유신체제를 떠받친 최대지주는 정보부였다.보안사는 軍이었고 경찰은 완전공개조직이어서 한계가 있었다. 70년대의 정보부는 나라 안으로는 긴급조치 유지를 위한 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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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CIA의 퇴조(분수대)
77년초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요르단 후세인 국왕에게 거액의 뇌물공세를 편 사실이 폭로됐을때 이 사건은 박동선 스캔들과 맞물려 한동안 워싱턴 정가를 시끄럽게 했다. 그 무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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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안기부CIA 蜜月
5共때 韓美관계는 朴正熙시대와는 판이한 밀월을 구가했다. 이는 全斗煥대통령이 朴正熙대통령의 독자적 군사외교노선을 일찌감치 포기,정통성의 결함을 對美밀착외교로 보완하려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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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의장막 소련 뚫어라 함병춘 밀사 파견
81년10월중순 南山의 국가안전기획부 부장실.兪學聖부장은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며 방문을 들어선 신사를 정중히 맞았다.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 兪부장의 입술이 떨리듯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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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당혹」서 지지|"미국은 정국변화를 「현실」로 수용"
지난 봄이래 미국은 한국의 정치발전에대한 관심을 훨씬 공개적으로 표시해봤다. 그 무렵 서울에 부임한 신임 「릴리」미 대사는 전임자와 달리 야당을 비롯한 재야각계 지도자와 접촉을 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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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정계 요인의 내한
「슐츠」미국무장관이 6일 다시 서울에 온다. 그의 방한빈도로 보면 지난해 5월이후 두번째요, 시기는 정치적 배경과 관련해 의회가 한국의 민주화를 촉구하는 결의안을 쏟아내고, 국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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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만명 상주…「권력핵」에 영향력 행사
미국 조야로부터 불어오는 보호주의바람이 점점 더 거세질 기미를 보임으로써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의 통상국들이 대책을 시급히 마련해야할 단계에 있다. 그런 대책은 보호주의 입법활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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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을 움직이는 「로비 군단」|줄잡아 2만명 한의원에 40명꼴
미국의 보호주의 무드에 비례하여 워싱턴로비의 중요성이 고조되고 있다. 워싱턴의 로비전쟁은 어떻게 전개되고 있으며 한국은 어떻게 참여하고 있는가. 최근 잇달아 나오는 미국의 수입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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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과 워싱턴에서 열번대좌 우의굳혀
건국이후 지금까지 한미정상간의 교환방문은 각각 5차례로 모두 10번에 이른다. 비공식접촉까지 포함하면 13차례 있은 양국 정상간의 교환중 대부분의 경우 양자간에는 큼직한 현안을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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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직자들
지난9일 버마의 랭군 아웅산 국립묘지에서 불의의 폭발사고로 비명에간 지위의 순직자 유해가 11일 환국했다. 조국의 발전과 번영에 기여하고자 이역만리에 갔다가 광기에 찬 테러범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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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과 실무에 밝은 미국통
박동선 사건으로 한미관계가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주미대사를 역임해 이론·경험 면에서 미국을 가장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사람중 하나. 하버드대학 법학박사로서 70년 초까지 연세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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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단에 복귀한 전 주미대사 함병춘 씨, 외교현장 경험 가미해서 강의
『학교를 떠난 뒤에도 대학원 강의를 줄곧 맡아와 전혀 새롭다는 느낌은 덜하지만 막상 관직생활을 청산하고 본연의 교수로 돌아오게 되니 약간 설레입니다.』 2학기부터 연세대 법대교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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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중의 대사 주미대사
주미대사- 외무장관자리와 함께 외교관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오르고 싶어하는 대망의 자리다. 지금은 주미대사를 하다 외무장관이 되면 영전이라고 하지만 초대 장면대사같은 분은 국무총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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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관계 지금이 가장원만”
35세의 나이로 「카터」미행정부의 국무성간아시아담당차관보에 앉아 박동선사건, 철군문제등 「불편했던」한미관계를 다루면서 한때 한국민의 가슴을 무던히도 죄게했던장본인-. 이제 불혹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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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명암드리운|70년대 한국의 대사건
70년대는 한두마디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격동의 한 세대」였다. 선량한 시민 32명의 목숨을 앗아간 와우「아파트」붕괴사건(70년 4월8일)으로부터 시작해 최규하 10대 대동령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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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안보-경협세미나
한미간의 안보및 경제협역증진 방안을 위한 국제「세미나」가 오는23일부터 3일간「조치타운」대학 국제전략문제연구소 주최로 「워싱턴」에서 열린다. 한국측에서 유정회의 최영관원내총무·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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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P사장, 주미대사를 방문
「워싱턴·포스트」의「도널드·그레이엄」신임발행인은 16일 동사의 경제담당 「칼럼니스트」「호바트·로원」, 국제문제담당「돈·오버도퍼」기자와 함께 김용직주미대사를 관저로 방문해 점심을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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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의외교」 강조하는 외교|대통령외교담당특보 함병춘 씨
영어ㆍ우리말 할것없이 언변이 탁월한 국제정치학자출신 외교관. 미국 「하버드」 대학 법학박사로 70년 청와대정치담당특보를 맡기까지 11년간 연세대교수로 일했고 이번으로 두번째 특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