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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한 군주’ 고종의 재발견 이끈 정상수 명지대 교수
“대한제국의 고종 황제는 결코 나약한 군주가 아니었다. 외교권을 빼앗으려는 일제의 야욕을 저지하기 위해 그가 기울인 노력은 눈물이 날 정도로 처절했다.” 이는 최근 중앙일보의 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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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한의학은 미래산업의 블루 오션
의료는 삶의 일부인 동시에 삶을 지배한다. 수준 높고 저렴한 의료 서비스는 선진 복지사회의 기본 요건이며, 이를 뒷받침할 의료산업은 차세대 핵심 성장 동력으로 미래 한국의 블루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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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현시시각각] 고종의 재발견
똑같은 우리나라 역사에도 신나는 장면과 우울한 장면이 따로 있게 마련이다. 고구려 역사는 역시 요동 벌판 말달리며 수나라·당나라를 무찌르던 무렵이 최고다. 백제도 한강 유역을 호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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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하고 무능한 군주로만 알았는데 고종 재평가 … 교과서 새로 써야”
한국 정부가 독일 외교부 정치문서보관소에 소장돼 있는 대한제국 고종(高宗·사진) 황제의 친서에 대해 본격적인 확인·보존 작업에 들어갔다. 고종 친서를 처음 발견하고 확인한 정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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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거나 무너져야 돌아볼 것인가
비명 소리도 없이 사라져간 문화재가 한둘일까. 멀리 갈 것도 없이 6·25 뒤 50여 년만 헤아려도 가늠할 수가 없을뿐더러 그 정확한 기록조차 없다. 잃어버린 우리 시대의 문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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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거나 무너져야 돌아볼 것인가
비명 소리도 없이 사라져간 문화재가 한둘일까. 멀리 갈 것도 없이 6·25 뒤 50여 년만 헤아려도 가늠할 수가 없을뿐더러 그 정확한 기록조차 없다. 잃어버린 우리 시대의 문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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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황제에 보낸 밀서는 고종 친필”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 체결 이후 대한제국과 일본의 정치지도자들이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중앙포토]고종이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에게 보낸 밀서는 고종이 직접 쓴 것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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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신이 왜 없는가” … 황제는 답답했다
“고종은 통신의 자유를 박탈당한 군주였다.” 대한제국 황제인 고종의 측근이었던 프랑스인 정무 고문 알퐁스 트레믈레가 1906년 5월 19일 독일 외무부 차관에게 쓴 서신에 나타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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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1905년 유럽 공관에 훈령
대한제국 황제인 고종(사진)이 일제의 강제로 체결된 을사늑약(1905년 11월)을 저지하기 위해 그해 12월 유럽 주재 공관들에 훈령을 내린 사실이 22일 밝혀졌다. 고종은 ▶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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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밀서, 독일 황제에 전달 안 돼
고종 황제가 을사늑약(1905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체결된 조약)의 원천 무효를 호소하며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사진)에게 보낸 밀서(본지 2월 20일자 1면)는 외무부 실무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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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서 찾아낸 정상수 교수 “독일 문서보관소는 대한제국 자료의 보고”
“독일 역사가 대한제국과 연결될 수 있다는 게 경이로웠습니다.” 독일제국 빌헬름 2세 황제에게 보낸 고종 황제의 밀서를 발견한 정상수(44·사진) 명지대 국제학연구소 연구교수는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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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의 “을사늑약 원천 무효” 밀서
“일제의 국권 침탈에 필사적으로 저항했던 고종 황제의 외교 발자취를 입증하는 사료다.” 고종의 친서를 연구해온 서울대 이태진(국사학·사진) 교수는 고종이 을사늑약 이후 독일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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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을사늑약 원천 무효” 밀서 1906년 독일 황제에게도 보냈다
대한제국 황제인 고종이 일본에 외교권을 빼앗긴 을사늑약(1905년)의 부당함을 알리고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1906년 5월 독일 빌헬름 2세에게 보낸 밀서가 처음 발견됐다. 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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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택의펜화기행] 광화문 네거리의 '잊혀진 건물'
1910년께의 기념비전, 종이에 먹펜, 36X50cm, 2007서울 광화문 네거리 동북쪽 코너에 정자 모양을 한 잘 생긴 한옥이 있습니다. 자주 지나치면서도 ‘고종 즉위 40년 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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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병현 전 주중 대사 "대만 문제 관련 비밀 각서 있다"
수교 협상에 직접 나섰던 권병현(사진.69) 전 주중대사는 "협상 중 6.25 전쟁 문제로 한때 분위기가 크게 경색돼 '이것으로 수교회담이 깨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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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레터] 일본인 손 빌려 광복 의미 되새겨서야
광복절을 앞두고 관련 서적 세 권이 나란히 출간됐습니다. 세 책 모두 일제시대 전후의 숨겨진 역사를 밝히고 있어 흥미진진합니다. 이 중 『대한제국 황실비사』(이마고)는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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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로푸는역시] 일제 식민지 본격화 … 의병이 된 군인들
러일전쟁(1905년)에서 승리한 일본은 일방적으로 을사늑약을 발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았고, 통감부를 설치하며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하는 고종이 헤이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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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고함(孤喊)] 이상설·이위종에도 깊은 경의를
사회적 지위를 탐하여 학력을 속이는 공문서위조의 범죄행위를 서슴지 않은 어린 여성이 사회기강을 문란케 해놓고도 오히려 큰소리를 뻥뻥 친다. 과학적 진실조차도 사종교와도 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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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 열사 순국이 항일 투쟁 불 지폈다
헤이그 특사 100주년 기념식이 14일 오전(현지시간) 네덜란드 헤이그의 이준 열사 기념관 인근 뉴케르크 교회에서 열렸다. 행사를 마친 뒤 주최 측 관련자와 현지 동포.학생들이 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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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초대 검사' 이준 임명장 동판 헤이그 기념관에 기증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이준 열사 기념관의 송창주 관장이 12일 대검찰청으로부터 대한제국 초대 검사 중 한 명인 '헤이그 특사' 이준 열사의 흉상과 검사 임명장 동판(사진)을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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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택의펜화기행] 조선후기 상업의 중심
서소문, 종이에 먹펜, 30X40cm, 2007.서소문(西小門)은 태조 5년(1396)에 만들어졌습니다. 첫 공식 명칭은 소덕문(昭德門)이었다가 후에 소의문(昭義門)으로 바꾸었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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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 열사 순국 100주년 (下) 서울서 헤이그까지 여정 재구성
그래픽 크게보기 한국사를 빛낸 위인 가운데 이준 열사만큼 논란과 궁금증을 많이 남긴 인물도 드물다. 고종 황제와의 만남, 신임장을 받게 된 경위, 헤이그 호텔에서의 사인 등이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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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 열사는
이준(사진) 열사는 물장수로 유명한 함경남도 북청에서 1859년에 태어났다. 호는 일성(一醒). 유년기에 부모를 잃고 할아버지 밑에서 한학을 배우며 자랐다. 고향에서 27세에 늦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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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 열사 순국 100주년 (上) 헤이그서 내달 14일 기념식
1907년 7월 14일 이준 열사가 숨을 거뒀던 드종 호텔자리. 현재 이준 열사 기념관으로 쓰이고 있다.[헤이그=전진배 특파원] 1907년 6월 27일. 100년 전 이날은 이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