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도 폭파하면 했지 못 준다” JP가 밝힌 ‘독도 폭파설’ 실체 (28) 유료 전용
‘김종필-오히라 회담’은 대일청구권(對日請求權) 자금의 규모와 조건을 정하기 위한 만남이었다. 우리 둘은 양국 정상에 틀림없이 보고하기 위해 합의안을 종이에 썼다. 나중에 언론은
-
국익위해 뛴 실무진 4명…‘해오외교관상’ 수상
김혜진, 이동규, 김동윤, 김수인(왼쪽부터 순서대로) 김혜진 외교부 아세안협력과장, 이동규 재외국민보호과장, 김동윤 주베트남대사관 1등서기관, 김수인 주벨라루스대사관 참사관 등
-
국익 위해 뛰는 젊은 외교관…김혜진 등 4명 ‘해오외교관상’ 수상
김혜진 외교부 아세안협력과장 등 4명이 28일 외교 최일선에서 활약한 실무 외교관에게 주어지는 ‘해오외교관상’을 수상했다. 제10회 '해오외교관상' 수상자. 좌측부터 김혜진
-
[사람 속으로] 북 위협 속 현장근무 자청하고, 인도 전통 옷 입어 환심 사고
━ ‘해오외교관상’ 받은 두 여성 외교관 말끔한 슈트 차림의 중년 남성. 외교관이라 하면 떠올리는 이미지이지만 이제 이런 모습은 더 이상 외교관 전체를 상징하지 못한다. 2000
-
[백가쟁명:유주열]한일국교정상화 50주년과 성산별곡
‘공산(空山)에 쌓인 잎을 삭풍이 거두어 불어 떼구름 거느리고 눈까지 몰아오니 천공(天公)이 일을 즐겨 옥으로 꽃을 지어 만수천림(萬樹千林)을 잘도 꾸며냈구나‘ 송강 정철이 정쟁에
-
청구권만큼 난제였던 어업협상, 막판에 타결
이동원(左), 김동조(右)‘김-오히라 메모’(1962년 11월 12일)로 대일 청구권(請求權) 문제를 해소한 한·일회담은 7차 회담(64년 12월 3일 개시)에서 마무리된다. 마무
-
첫 '해오 외교관상' 강상욱·임시흥 과장 등 5명
강상욱(左), 임시흥(右)제1회 ‘해오(海吾) 외교관상’ 시상식이 11일 서울 도렴동 외교부 청사에서 열렸다. 박정희정부 때 초대 주일 대사를 지낸 김동조(1918~2004년) 전
-
대사 귀국 강경 카드 꺼내 든 정부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이 14일 일본 정부의 중등교과서 해설서의 독도 영유권 명기 강행 문제로 시게이에 도시노리(重家俊範) 주한 일본대사를 초치했다. 유 장관은 시게이에 대사와 악
-
"'영감의 뜻'으로 '독도밀약'에 나섰고, 극비 유지 위해 문건 불태웠다"
▶김종락 당시 한일은행 전무 ‘독도밀약’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기 전 필자는 김종락이라는 인물을 알지 못했다. 그가 3공화국 이후 한국정치의 산 증인인 김종필(JP) 전 국무총리의
-
[사진] 한·일 수교 회담
김종필과 오히라가 회담하는 모습(1962년 10월 20일) 한·일 협정에 반대하는 학생들의 시위 모습(1964년 서울) 한·일 협정을 위해 얘기를 나누고 있는 이동원(가운데)외무
-
[2004년 떨어진 별 - 국내] 시대를 빛냈던 그들
'고통과 죽음은 인생의 한 부분'이라는 격언처럼 살아 있는 그 누구도 죽음을 피할 길은 없다. 세상을 휘어잡았던 권력가도, 노벨상에 빛나는 학자도, 은막의 전설이라 불리던 스타도
-
[삶과 추억] 별세한 김동조 전 외무부 장관
김동조 전 외무부 장관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서울 세종로 외교부 청사에 있던 외교관들은 모두 잠시 일손을 접고 고인을 추모했다. 김 전 장관은 1943년 일본 고등문
-
김동조 전 외무부 장관 별세
해오(海吾) 김동조(사진)전 외무부 장관이 9일 오후 2시30분 숙환으로 별세했다. 86세. 김 전 장관은 1918년 부산에서 태어나 43년 일본 규슈(九州)대 법학부를 졸업, 5
-
[집중탐구정몽준]中.현대重소유주에서월드컵까지:부친 정주영 총애… 31세 현대重 사장에
정몽준은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에서 석사과정을 밟던 도중인 1979년 7월 29일 다섯살 연하의 김영명(金寧明·46)과 결혼했다. 주일·주미대사와 외무장관 등을 지낸 김동조
-
[대사소환 사례] 한·일 어협 항의 98년 일주일 소환
'대사 소환(summon)' 은 한 나라가 상대방 정부에 대해 가장 강하게 불쾌감을 전달하는 외교적 대응 수단이다. 정식 소환의 경우 외교관계의 장기 경색이나 단교(斷交)까지 각오
-
김동조 전 외무부장관 회고록 출판 기념회
해오(海吾) 김동조(金東祚)전 외무부장관이 건국 초부터 1970년대 말까지 우리 외교 현장에서 겪은 비화들을 정리한 회고록 '회상 80년, 냉전시대의 우리 외교' 출판 기념회가 3
-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오프 더 레코드 (54)
54. 백악관의 물밑 지원 한.일 국교정상화를 매듭짓기까지 나는 마치 미로(迷路)를 헤매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65년 2월 20일 마침내 한.일 기본관계 조약을 가조인하고 나니
-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오프 더 레코드 (51)
51."독도는 우리땅" 1965년 2월 18일 청와대. 시나(椎名悅三郞)일본 외상을 환영하는 朴대통령 주최 오찬이 있었다. 시나는 나이도 잊은듯 대통령을 만나자마자 최대한 공손하게
-
“73년 김대중 납치사건 이후락씨가 직접 지시”
[워싱턴 = 길정우 특파원]미국 정부는 지난 73년 8월 김대중 납치사건이 당시 박정희 (朴正熙) 대통령의 의중을 반영, 이후락 (李厚洛) 중앙정보부장의 직접 지시로 이뤄진 것이라
-
김태지 주일대사 일시귀국…사실상 소환
김태지 (金太智) 주일대사가 25일 일시 귀국한다. 그의 일시귀국은 국회 요구와 정무협의를 위한 것이지만 외무부 당국자의 설명처럼 일본의 어업협정 일방파기에 대해 불쾌감을 표시하는
-
정부공개 54~65년 외교문서 내용-재일교포 北送
북한이 지난 65년 7월30일 재일한국인의 북한 송환 1년 연장을 제의하고 그 다음날 일본이 이에 동의하자 한-일간 외교마찰이 본격화됐다.특히 6월22일 한-일기본조약이 서명되고
-
2.외교가의 DJ 김동조 외무
우리는 영자이름 약칭으로 DJ라면 으레 金大中 前民主黨대표를일컫는다.그러나 DJ의 원조로 말하면 金東祚 前외무장관이다. 韓國 외교사에 DJ사단이 있다고 할만큼 金東祚씨는 50년대부
-
2.내가 겪은 김동조장관-최호중 前외무
꼭 2년동안 외무부를 책임졌던 金東祚장관은 보스 기질이 강하고 뱃심좋은 이른바 DJ사단의 長이었지만 시운을 타지못해 2년동안 그다지 순탄치를 못했다. 金장관은 駐美대사로 있다가 1
-
미·일 등 주요국 대사 이동 배경|"실무형 중용"…현안 해결 중점
노태우 대통령은 지난달 말 우리 외교 망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주미·주일·주영·주유엔 대사 등을 새로 임명했다. 현홍주(미)·오재희(일)·이홍구(영)·노창희(유엔)씨가 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