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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꿈의여정 50년 칸타빌레] 122. 앵무새 문신
큰 딸 정아는 친아버지인 길옥윤 선생을 닮아 내성적이고 문학적 소질이 뛰어난 한편 나를 닮아 고집이 세고 집념이 강하다. 둘째 카밀라는 아버지 아르만도 게디니를 닮아 사교적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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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꿈의여정 50년 칸타빌레] 115. 건강 관리법
유명 디자이너 크리스티앙 디오르의 패션쇼에 참석한 필자. 나 자신과 팬들에게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내 몸과 내 목소리를 유지하는데 지금까지 했던 것보다 두세 배 이상의 노력을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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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꿈의여정 50년 칸타빌레] 98. 올림픽 폐막 공연
서울시청 앞에 안치된 서울올림픽 성화를 배경으로 ‘서울의 찬가’를 부르고 있는 필자. 나는 서울올림픽 폐막 공연에도 참가했다. 160개국 2000여 명의 선수가 출전했던 서울올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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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꿈의여정 50년 칸타빌레] 94. 어머니의 소원
기독교로 개종한 어머니 영전에 필자가 2004년 바친 가스펠 음반 ‘지금까지 지내온 것’.오빠와 언니들이 결혼을 하고, 하나 둘 이민을 가면서 내가 어머니를 줄곧 모셨다. 길옥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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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꿈의여정 50년 칸타빌레] 91. 1978년 컴백 공연
이탈리아의 저명 화가였던 시아버지 아리고 게디니가 그린 필자의 초상화.두 딸을 키우며 노래를 부르지 않고 살았던 2년 반. 나는 아이들에게 충실한 엄마가 되려고 노력했다. 특히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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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꿈의여정 50년 칸타빌레] 88. ‘세계인’ 정아
유엔난민고등판무관에 근무하던 시절의 정아.2003년 크레이그 윌리엄스와 결혼한 정아는 이제 ‘정아 게디니 윌리엄스’가 됐다. 정아는 만 다섯 살에 미국으로 온 뒤 중학교 시절 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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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 꿈의여정 50년 칸타빌레(6)
쉽지 않은 결혼생활, 음악적 성공 그리고 이혼과 함께 온 최대의 위기 55. 불화의 싹 베트남 위문공연을 마치고 서울 세검정 신혼 집으로 돌아오자 길옥윤 선생의 생활 태도는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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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꿈의여정 50년 칸타빌레] 78. 마음의 짐
길옥윤 씨의 유작 앨범 재킷.부부는 촌수가 필요 없는 무촌 사이지만 등 돌리고 돌아서면 촌수를 따질 수 없는 남남이다. 나와 길 선생은 부부로서의 사랑을 영원히 지키지는 못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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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북카페] 가요로 되돌아본 '서울~ 서울~ 서울' 70년
성장과 경쟁의 현대사회를 보여주는 서울 도심의 빌딩숲. 이곳에 사과나무를 심을 마음의 여유를 우리가 누릴 수 있을까. 1960년대만 해도 서울은 녹지로 둘러싸인 도시였다. [중앙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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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꿈의여정 50년 칸타빌레] 77. 사랑은 영원히
길옥윤 선생 장례식에서 묵념하고 있는 필자.1994년 6월 19일, 마침내 후배 음악인들이 생존 작곡가에게 헌정하는 ‘길옥윤 이별 콘서트’가 열렸다. 이 콘서트는 SBS에서 생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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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꿈의여정 50년 칸타빌레] 76. 길 선생의 명예회복
일본에서 투병 중인 길옥윤씨를 한국으로 데려오기 위해 애쓰던 무렵의 필자.길옥윤 선생의 술집이 문전성시를 이루며 장사가 잘 됐다는데, 이상하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거액의 부도를 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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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꿈의여정 50년 칸타빌레] 75. 길 선생의 재혼
길옥윤 선생 추모콘서트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필자.1974년 6월 열린 도쿄 국제가요제에 참가한 뒤 나는 서울로 돌아가지 않았다. 정아와 함께 큰오빠가 있는 미국 LA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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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꿈의여정 50년 칸타빌레] 74. 도쿄 국제가요제
1974년 도쿄 국제가요제에 출전한 필자(오른쪽에서 둘째).가수는 참으로 축복받은 직업이다. 빈털터리가 되더라도 목소리 하나로 다시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고, 다시 생활할 수 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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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꿈의여정 50년 칸타빌레] 73. 최대 위기
길옥윤씨와 이혼했을 당시의 필자.세상 사람들이 쏘아대는 그 엄청난 비난의 화살을 온몸으로 맞으면서도 나는 입을 다물었다. 무엇보다 나의 자존심을 지켜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길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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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꿈의여정 50년 칸타빌레] 72. 비난과 오해
무대 위 필자. 길옥윤씨와 헤어진 뒤 ‘이혼 가해자’라는 오해에 시달려야 했다.미우나 고우나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한때는 사랑을 했기에 결혼까지 했던 것이다. 그래서 아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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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선 총장은 교수 눈치 보느라 대학 개혁 못해”
“교수들이 총장을 선출하면 선거 과정에서 대학 사회가 분열되고, 총장이 교수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어 대학 개혁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이언 처브(64) 호주국립대 총장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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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프렌들리’ 캠퍼스
미국 인디애나대에서 한국학 수업을 듣는 학생 20명이 연세대의 초청으로 방한해 14일부터 9박10일간 현장학습을 하고 있다. 21일 청계천을 찾은 학생들이 연세대 국제처 교직원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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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꿈의여정 50년 칸타빌레] 71. 이혼 발표
1973년 필자는 길옥윤씨와 이혼했지만 ‘음악적 동반자’ 인연은 이어가기로 약속했다.어쩌다 생각이 나겠지 냉정한 사람이지만 그렇게 사랑했던 기억을 잊을 수는 없을 거야 때로는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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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꿈의여정 50년 칸타빌레] 70. 뉴욕 여행
길옥윤씨와 별거하던 때의 필자.‘이별’은 나와 길옥윤 선생이 별거하던 1971년 만들어졌다. 발표는 72년에 했다. 결혼 초부터 술로 인한 갈등이 끊이지 않자 우리는 결국 별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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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꿈의여정 50년 칸타빌레] 69. 서울의 찬가
‘서울의 찬가’를 발표할 즈음 필자의 앨범 재킷 사진.지난 40여 년간 국내 공식 석상에서 ‘애국가’ 다음으로 많이 불린 노래가 있다면 아마 ‘서울의 찬가’일 것이다. 우리 대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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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꿈의여정 50년 칸타빌레] 67. ‘패티 김 쇼’ 인기
‘패티 김 쇼’를 진행하는 필자.‘매주 수요일은 패티 김 쇼 방송 시간에 맞춰 집에 도착하지 못할 것 같으면 도중에 버스에서 내려 택시를 갈아타고라도 급히 들어온다’는 사연을 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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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꿈의여정 50년 칸타빌레] 66. ‘패티 김 쇼’ 신설
TBC -TV 프로그램 ‘패티 김 쇼’에 출연한 필자.뮤지컬 ‘살짜기 옵서예’ 공연이 성황리에 끝났다. 나는 일약 ‘한국 최초 창작 뮤지컬의 히로인’이 됐다. 그 인기를 배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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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꿈의여정 50년 칸타빌레] 65. 꿈은 이루어진다
미국에서 뮤지컬 ‘플라워 드럼 송’ 출연 당시의 필자.뮤지컬 ‘대춘향전’ 공연 의상은 당연히 한복이었다. 부른 배를 감쪽같이 가리고 공연할 수 있었다. 뮤지컬 공연 땐 체력 소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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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꿈의여정 50년 칸타빌레] 63. 최초의 뮤지컬
뮤지컬 공연보다 앞서 발매된 앨범 ‘살짜기 옵서예’. 길옥윤 선생에게 술은 유일한 도피처이자 안식처였다. 반면 그 술은 우리 결혼 생활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됐다. 결혼 초기부터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