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 (273)-(1)김효록

    필자 김효록씨는 1904년 평양에서 출생, 숭실 중학교와 일본신호상업대학을 졸업하고 39년∼44년까지 연희전문에서, 해방이후에는 서울대상대 (46년∼47년) ,고려대 (48년∼현재

    중앙일보

    1971.10.06 00:00

  • 서울대 교수들의 대학자율선언

    18일 서울대문리대교수회는『최근의 학원동요는 학원의 여러 가지 불합리한 현실 때문에 빚어진 것』이라고 전제하고, 이러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①학원의 자율성과 연구의 자유분위기를

    중앙일보

    1971.08.20 00:00

  • 국회사무총장 선우종원씨

    제9대 국회사무총장으로 임명된 선우종원씨는 4년 전 공화당에 입당한 후 중앙선관위위원(대통령지명「케이스」)으로 있다가 이번 제8대국회의 살림을 맡게되었다. 해방후의 혼란기에 사상검

    중앙일보

    1971.07.31 00:00

  • (215)자동차 반세기(9)|서용기(제자는 필자)

    1931년의 일이다. 광산 왕 최창학씨가 새로 산 「마스터·비크」를 몰고 가다 임진강 나루터에서 전복사고를 냈다. 그 차는 당시 최고급으로 딴 차 값이 4천원 안팎일 때 1만원은

    중앙일보

    1971.07.26 00:00

  • (204)제14화 무역…8·15전후

    (중) 일단 문을 연 무역협회가 다음에 해야할 일은 사무국의 실무직원을 확보하는 일이었다. 사무국에는 조사부 이외에 총무부와 사업부를 두기로 돼있었는데 여러 차례로 나누어 그해 1

    중앙일보

    1971.07.13 00:00

  • (203)제14화 무역…8·15전후

    (상) 해방 후에 있었던 여러 가지 유형의 무역얘기는 이 정도로 해두고 세월을 다시 해방직후로 되돌려 한국무역협회가 설립된 경위와 초창기 사정을 정리해봐야겠다. 앞에 어느회에선가

    중앙일보

    1971.07.12 00:00

  • (900)반갑고 다행스런 개강|유홍열

    서울대학교 4개 단과대학에 대한 휴업령이 해제되어 24일부터 정상수업에 들어가게 된 것은 반갑고 다행한 일로 생각한다. 서울대학교는 경성제대 재학 때부터 인연을 맺어 총장직무대리

    중앙일보

    1971.06.24 00:00

  • (188)방송 50년(17)이덕근

    조선「호텔」앞, 지금 왕궁다방이 있는 3층 건물은 본래「텔러·빌딩」이었다. 이 3층에 신문·「라디오」에 「뉴스」를 공급하던 동맹통신 한국지사가 있었다. 일본이 항복하기 하루전인

    중앙일보

    1971.06.24 00:00

  • (295)진도 개 순종은 사라져 간다

    진도는 면적이 4백46평방km에 11만3백51명의 인구를 가졌다. 이 진돗개의 내력에 대한 정설은 없지만「모리」박사의 설이 외에 촌 노들의 구전으로 내려오는 몇 가지가 있다. 그

    중앙일보

    1971.06.19 00:00

  • (175)방송 50년(4)|이덕근(제자는 필자)

    27년에 생긴 경성 방송국은 l933년까지 5년 동안 일본어 단일 방송을 하다가 33년4월26일에 소위 이중 방송의 실시로 한국어 방송과 일본어 방송이 각각 독립했다. 단일 방송

    중앙일보

    1971.06.09 00:00

  • 국무총리에 김종필씨-어제 하오 전격개각

    박정희 대통령은 3일 하오 백두진 국무총리를 비롯한 전 각료의 일괄 사표를 수리하고 국무총리에 김종필 공화당 부총재를 임명했다. 7대 대통령을 보좌할 새 내각에는 이밖에 ▲외무=김

    중앙일보

    1971.06.04 00:00

  • (161)|경성제국대학(15)|강성태 &해방과 함께 교명도 「경성 대학」으로 변경|47년에는 현재의 「서울대학」으로 다시 개교|일제가 세운 학교 다녔다고 욕먹은 졸업생도

    해방되던 해에 졸업한 의학부 17회 졸업생 (법문학부 18회에 해당) 에는 강중구 (개업) 김세경 (우석 의대 학생) 노종문 (개업·이비인후과) 임창제 (개업) 함용주 (개업·냇

    중앙일보

    1971.05.22 00:00

  • (160)|경성제국대학(14)|강성태

    1940년부터 내선일체이므로 일본인과 한국인이 권리와 의무를 같이해야 한다는 미명 아래 창씨 개명을 지시했고 43년부터는 한국인에 대해서도 징병제를 실시했다. 처음 실시한 징병은

    중앙일보

    1971.05.21 00:00

  • (159)|경성 제국 대학(13)|강성태

    홍진기씨는 대학 졸업 후 상법의 권위자인 서원관일 교수의 조수로 연구실에 남아 있을 때 주로 교수들만 집필하던 경성 제대 법학회 논집에 「주식회사 합병에 있어서의 교부금」이란 논

    중앙일보

    1971.05.20 00:00

  • (158)| 경성 제국 대학|강성태

    요릿집은 대개 한상에 5원부터 10원까지 받았는데 5, 6명은 충분히 먹을 수 있었다. 기생은 전속제가 아니고 권번이 있어 시간제였는데 대표적인 권번으로 한성·조선·종로 등이 있

    중앙일보

    1971.05.19 00:00

  • (156)(10)강성태

    법과 9회의 김영년씨(경인 개발 주식회사 사장)는 학부2학년 말 시험 볼 때 일인학생에게 시험지를 보여주어「커닝」을 하게 했다 해서 무기정학 처분을 받고 여러 달 동안 도서관에

    중앙일보

    1971.05.17 00:00

  • (155)| 경성제국대학(9)|강성태

    수가 적은 데다 민족적인 차별대우에 불만이 많았던 한국학생들은 무슨 일이고 단결했으나 싸움이 일어나면 더욱 단결력을 과시했다. 현석호씨가 옛과에 다닐 때 이른바 「달밤의 소동」이라

    중앙일보

    1971.05.15 00:00

  • (154) | 경성제국대학 (8)|강성태

    4회의 최식씨 (현 성균관대 법정대 교수·6회의 고인은 잘못임)는 영남 일대는 물론 전국적으로 알려진 경주 최 부잣집의 집안이다. 9대 진사에 12대 만석꾼인 최 부잣집의 종가에

    중앙일보

    1971.05.14 00:00

  • (153)제11화 경성제국대학(7)

    의학부의 학생생활은 법문학부와 다소 차이가 있었다. 김석환씨(중앙병원원장)의 기억으로는 당시에는 학부만 졸업하면 그대로 의사면허를 주어 요즘과 같은 국가시험제도는 없었다 한다.

    중앙일보

    1971.05.13 00:00

  • (151)제11화 경상제국대학(5)

    임문석씨는 졸업 후 평안도선천군수로 갔는데 총독부의 연례 지방행정관회의 때 우원 총독의 농촌진홍정책내용에 대해 농민착취 내용이 많다고 약30분간 신랄한 비판을 가해 『당신은 신문

    중앙일보

    1971.05.11 00:00

  • (150)제11화 경성제국대학

    <일본인 교수들> 경성제대를 세울 때 일본정부는 내용충실을 기한다는 발표와 함께 한국인을 차별대우 하지 않는다는 것을 내세우기 위해서인지 일본국내에서도 유명한 교수를 전임교수로 초

    중앙일보

    1971.05.10 00:00

  • (149)제11화 경성제국대학(3)

    경성제대예과 개교당시 입학한 45명의 한국인 학생 가운데는 법과에 유진오 주병환(4대민의원·대구고보졸) 이민희(전 상업은행전무·고인) 김처순(교육자·평양고보졸·고인) 전승범(전

    중앙일보

    1971.05.08 00:00

  • (148)제11화 경성제국대학(2)

    경성제대가 일본교육제도에 따른 신교육령에 의해 설립됐기 때문에 구교육령에 따른 학제로 교육을 받은 한국학생들은 입학자격문제를 둘러싸고 큰 진통을 겪었다. 고등보통학교까지 8년 과

    중앙일보

    1971.05.06 00:00

  • (147)|경성제국대학-개교

    ※편집자주=필자 강성태씨는 1903년 서울에서 태어나 21년 경성고등보통학교 (현 경기중 고교)를 졸업한 뒤 경성제대개교와 함께 입학, 29년 법문학부를 1회로 졸업했다. 강씨는

    중앙일보

    1971.05.05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