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성탁의 시선] 선거날, 향후 2년 간 선거 없음이 걱정된다

    김성탁 기획취재2국장 22대 총선 본 투표 날이다. 선거운동 마지막까지 여야는 열심히 지지를 호소했다. 격전지가 상당히 많다고 하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정당 지도부나 지역구 후보들이 자신들을 지지해 달라고 목이 터지라 매달리는 모습을 보면서 ‘진작 좀 저렇게 하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총선 사전투표율이 역대 총선 중 최고치를 보인 것은 뭔가를 위해 투표장으로 몰려갔다는 의미다. 그 속에 여당 심판 여론이 높을지, 야당 심판 여론이 클지는 까봐야 알 것이다. 하지만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 2년 정도에 치러지는 총선인 만큼 집권 세력의 그동안 국정 운영에 대한 평가가 판단 기준의 앞줄에 있을 수밖에 없다.     ■  「 누가 이기든 국회가 현안 풀어야 의대정원 문제부터 특위 꾸리길 의원·단체장 매년 뽑으면 어떨까 」    정부·여당이 아주 잘했을 경우 임기 중반 선거에서 야당이 설 자리는 거의 없다는 게 중론이다. 대통령과 여당 지지율이 높은 상황에선 정책 결정이나 집행에 직접 관여할 수 없는 야당이 명함을 내밀기는 쉽지 않다. 여러 여론조사를 보면 현 정부의 성적표가 좋지 않은 건 분명하다. 그렇다고 총선 결과가 반드시 여론조사와 일치하라는 법도 없다. 단 한 표라도 많으면 이기는 대통령 선거와 달리 총선은 지역구 의석의 합과 비례대표 확보 수로 결정된다. 막판 지지층 결집 여부에 따라 한쪽으로 쏠릴 수도, 큰 격차가 안 날 수도 있을 것이다.   범야권이 이기든, 여당인 국민의힘이 이기든 이번 선거가 끝나면 제발 정치권이 국민 생활과 직결된 현안을 해결했으면 좋겠다. 대표적인 게 의대 정원 증원을 포함한 의료 대란이다. 전공의가 병원을 떠나자 대형병원까지 진료에 차질이 생기면서 뇌 질환 등 중병이 있는 환자들이 검사나 수술이 줄줄이 연기돼 불안에 떨고 있다. 하지만 해결할 역량이 정부에는 없는 것 같다.   대통령이 2000명 증원을 결정한 이후 의료계의 현실을 알고 있을 법한 관련 부처 고위직들마저 원안 사수에 총대를 메느라 바빴다. 진료 현장을 떠난 의료인들의 처사는 부적절하지만, 의사가 부족하다면서 이미 자격을 가진 의사들의 업무 수행을 막아버리는 전공의 면허 정지 강행 카드를 꺼내 드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대통령의 담화 역시 증원 수를 줄이겠다는 것인지 강행하겠다는 것인지 헷갈렸고, 총리가 나서도 대화체 하나 만들지 못하는 지경이다.   장상윤 대통령실 사회수석은 의대들이 학생들의 집단 유급 사태를 막기 위한 시한에 쫓겨 개강하자 “대학들이 수업을 정상화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강의실은 썰렁하고 의대생 단체는 “행정적 재개일 뿐”이라고 했다. 실제 현장에선 올해 입학한 예과 1학년생들이 교양과목마저 수강을 중단하고 있다. 현장을 알고도 ‘정상화’라고 대통령에게 보고했다면 기만이고, 현장을 모른다면 무능한 것이다.   결국 해법을 찾으려면 총선에서 어느 쪽이 다수당이 되든 국회가 나서야 할 것 같다. 연금개혁도 정부가 단독으로 결정하기 어려워 국회에 특위를 두는데, 언제까지 정부에만 맡겨놓을 건가. 선거 기간 한동훈 비대위원장이 숫자에 얽매이지 않는 협상을 말했고, 이재명 대표도 국회 논의를 거론한 만큼 여야가 당사자인 전공의 등 의료계와 환자 단체, 정부 등을 모아 접점을 찾았으면 한다. 정원만 늘린다고 필수과 기피 현상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의견을 포함해 필수 의료 살리기 대책을 제대로 만드는 작업도 국회가 주도하는 게 빠른 길이다.   투표소 대파 반입 금지 논란이 일었을 정도로 심각한 물가와 코로나 이후 심해진 양극화 대책 등 민생 현안도 정부에만 맡겨놓을 일이 아니다. 경제부총리나 대통령실 경제팀의 역량이 미치지 못한다면 여당인 국민의힘이 야당과 함께 세제와 재정 운용, 중소기업의 경쟁력 향상, 반도체 등 미래 먹거리 문제까지 머리를 맞대면 좋겠다.   이런 기대를 하면서도 우리 국회가 과연 여야 협력을 할 줄 아는 집단인지 회의를 떨칠 수 없다. 지난해 10월 강서구청장 선거와 오늘 총선이 없었다면 각 정당이 국민 여론에 반응이나 했을까. 정부·여당만 아니라 민주당에서도 선거 공천을 하면서 여론의 시선 따위는 무시하고 ‘비명횡사’ 공천을 줄줄이 선보였으니 말이다.   이번 선거가 끝나면 향후 2년 동안 큰 선거가 없다는 게 걱정된다. 자잘한 보궐선거가 있지만, 2026년 9월 지방선거까지 공백기다. 그때까지 또 민생 현안은 제쳐놓고 쌈박질만 계속할까 겁난다. 그러다 또 지방선거와 2027년 대선이 가까워지면 서로 국민의 뜻을 받들겠다고 나설지 모르겠다. 해법 찾는 정치를 이번에도 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국회의원과 지방자치단체장을 절반씩 나눠 매년 선거로 뽑는 식으로 바꿨으면 좋겠다. 그렇게라도 해야 계속 국민 눈치를 볼 것 아닌가.     김성탁 기획취재2국장

    2024.04.10 00:33

  • 총선 과반의 변수...요동치는 수도권과 충청 [김성탁의 시선]

    김성탁 기획취재2국장 “선거는 마치 염전과 같다.” 여야를 넘나들며 국내 정치에 오랫동안 관여해온 한 인사의 말이다. '하얀 금'으로 불리는 천일염을 얻으려면 바탕이 되는 갯벌과 햇볕, 바람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바닷물을 들이는 갯벌은 지지 기반이라고 볼 수 있다. 국민의힘은 영남, 더불어민주당은 호남이 갯벌에 해당한다. 정치 성향으로 따지면 보수, 진보 성향의 유권자로 분류가 가능하다.    22대 총선을 한 달여 앞둔 시점에 정당별 지지율 추이를 보면 4년 전 총선처럼 민주당이 압승을 거두는 결과는 예상하기 어렵다. 오히려 여야 중 과반 의석을 확보하는 정당이 나올 것인지가 관심이다. 151석을 차지하면 국회의장과 주요 상임위원장을 확보하고, 각종 법안 처리에서 유리해진다. 여권은 국정 동력을 살리기 위해, 야권은 집권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달성해야 하는 목표다.   강변북로에서 바라본 국회의사당. 우상조 기자  최근 개별 지역구에 대해까지 쏟아지는 여론조사 결과를 통해 현시점에서 예상 의석의 향배를 가늠해보자. 확정된 지역구 254석 중 민주당의 텃밭인 호남은 28석, 국민의힘의 기반인 영남은 65석이다. 지난 총선에서 민주당은 전북 남원·임실·순창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된 이용호 국민의힘 의원을 제외하고 호남을 석권했었다. 이번 총선에선 전남 순천을에 이정현 전 의원이 국민의힘 소속으로 출마해 당선 여부를 지켜봐야 하지만, 지난 총선과 비슷한 성적을 거둘 가능성이 크다.    영남 지역구 65석 중 지난 총선에서 민주당은 부산 3석, 경남 3석, 울산 1석을 얻었다. 여권 일각에선 영남 전체적으로 5석가량을 잃을 수 있다는 견해가 있지만, 최근 여론조사 흐름은 민주당에 불리하다. 경남 양산을에 대해 지난달 한국리서치·모노리서치 등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민주당 김두관 의원은 국민의힘 김태호 의원에게 오차범위 내에서 경합하거나 밀리는 것으로 나왔다. 민주당에 불리하지 않다고 평가 받는 여론조사꽃이 선거구 획정 전인 지난 1월 민주당 현역 의원 지역구인 부산 북·강서갑을 조사한 결과 정당 지지율에서 국민의힘이 민주당을 크게 앞섰다. 국민의힘에선 5선 서병수 의원이 출마한다.    강원도의 경우 지난 총선에선 미래통합당과 무소속 등 국민의힘 계열이 5석을, 민주당이 3석을 확보했었다. 여론조사꽃의 지난달 말 민주당 현역 의원이 있는 춘천·철원·화천·양구군갑 조사에서 총선 때 찍을 정당의 후보를 묻자 민주당과 국민의힘의 차이는 2.4%포인트였다. 민주당이 3석을 모두 얻었던 제주에서도 서귀포 지역구의 경우 여론조사꽃의 지난달 말 조사 결과 국민의힘 후보를 뽑겠다는 응답이 민주당 후보를 뽑겠다보다 16.6%포인트 높았다. 민주당이 지난 총선 때 얻었던 지방 지역구 의석에서 득점 요인이 약해지는 모습이다.   ■  「 여야 텃밭 영남 65석, 호남 28석 민주 이겼던 스윙보터 지역 흔들 견제냐 지원이냐 어떤 바람 불까 」   하지만 지역구 의석수에서 영남이 호남보다 압도적으로 많고 민주당이 지난 총선 때 국민의힘 텃밭에서 얻은 의석도 극소수여서 이 정도 변수로는 승부에 미치는 영향이 크지 않다. 민주당의 지난 총선 대승은 수도권과 충청에서의 압승이 핵심 요인이었다. 이번 총선 역시 ‘스윙 보터’인 두 지역에서의 결과로 승부가 결정 날 가능성이 크다. 지난 총선에서 민주당은 수도권 121석 가운데 18석만을 내주고 모두 이겼다.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승리 이후까지만 해도 수도권 판세는 야당으로 기우는 듯했다. 하지만 최근 서울 지지율 조사에서는 국민의힘이 민주당을 따돌렸다.    갯벌에서 소금이 만들어지려면 햇볕이 필수인데, 선거에서 햇볕은 당이 만들어내야 한다. 하지만 민주당 공천 과정에서 파열음이 두드러지면서 수도권과 충정 지역 조사에서 민주당 현역 의원 지역구인데도 국민의힘 후보와 접전을 벌이는 경우가 다수 확인되고 있다. 경기 수원은 여당의 험지로 불려왔는데, 코리아정보리서치가 지난달 하순 수원 갑·을·병·정·무 지역구 주민을 상대로 여론조사를 한 결과 민주당 우세 2곳, 경합 2곳, 국민의힘 우세 1곳으로 집계됐다.    여론조사에서 발견되는 특이점 중 하나는 일부 지역구의 경우 윤석열 대통령의 국정 운영에 대해 '못하고 있다'는 응답이 매우 높게 나오는데도 정당 지지율이나 후보 선호도에서는 국민의힘이 앞서는 모습을 보인다는 점이다. 임기 중반에 치러지는 총선이 대통령의 국정에 대한 평가 기회가 되곤 했지만, 한동훈 비대위 체제 가동과 의대 증원 이슈 등이 등장하면서 희석되는 경향으로 볼 수 있다. 남은 기간 정부 견제론과 정부 지원론 중 어느 바람이 세게 불지, 여야가 새로운 이슈로 바람을 일으킬지 지켜볼 일이다. (자세한 여론조사 결과는 선거여론조사심의위 홈페이지 참조) 김성탁 기획취재2국장

    2024.03.06 00:26

  • ‘약속 대련’이든 아니든 흥행 성공, 민주당은? [김성탁의 시선]

    김성탁 기획취재2국장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그제 용산 대통령실에서 오찬을 함께 하며 2시간 30분가량 만났다. 충남 서천특화시장 화재 현장을 함께 방문한 지 6일 만이었는데, 이 자리에 이관섭 대통령 비서실장이 배석했다. 이 실장이 한 위원장에게 사퇴를 요구했다고 알려졌던 터라 이날의 화기애애한 오찬 간담회 장면은 ‘당정 갈등’이 해소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전망을 낳았다.    여권의 당정 갈등은 총선을 앞두고 단연 이목을 끈 사건이었다. 임기가 3년이나 남은 대통령에게 ‘20년 측근’인 한 위원장이 일종의 반기를 들었다는데, 화제가 안 되면 그게 이상한 일이다. 대통령 비서실장이 김건희 여사의 명품백 수수 의혹에 대한 한 위원장의 대응에 섭섭함을 표했다는 단독 보도가 나오고, 한 위원장이 ‘국민 보고 나선 길, 할 일 하겠다’는 입장문을 내는 등 드라마틱한 서사까지 갖췄었다.   윤석열 대통령이 29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국민의힘 지도부와 오찬회동을 하고 있다. 윤 대통령부터 시계방향으로 이관섭 비서실장, 한오섭 정무수석, 이도운 홍보수석, 국민의힘 윤재옥 원내대표,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 [사진제공=대통령실]  일련의 전개를 놓고 정치권 안팎에서 다양한 해석이 나왔다.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가 실시간으로 반응했던 ‘약속 대련’에서부터 ‘궁정 쿠데타’(신평 변호사)까지 스펙트럼도 다양했다. 대통령과 여당 비대위원장의 마찰이 일종의 기획이었든 실제였든, 여권발 이슈가 흥행에 성공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  「 한동훈 '尹 아바타' 탈피 효과 명품백 의혹 극복 플랜 준비중 오히려 민주당이 숙제 떠안아 」   여권 사정을 잘 아는 인사에게 전말을 물었더니 전후 설명 대신 여권이 거둔 효과부터 거론했다. 한 위원장의 가장 큰 아킬레스건이 ‘윤석열 아바타’라는 시각이었는데, 여당의 총선 승리를 위해선 그 고리부터 끊는 게 우선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 갈등 양상으로 아바타 딱지를 떼는 계기가 마련됐다고 평가했다. 이 인사는 "이 비서실장은 내공이 간단치 않다. 경거망동했을 리가 있느냐"라고 말해 대통령실과 여당 사이에 모종의 공감대가 있었을 수 있음을 내비쳤다.    한 위원장에 대한 대통령실의 반응이 김 여사 관련 의혹에 대한 대응과 관련한 것이었던 만큼 실전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한 위원장이 ‘국민의 눈높이’를 언급했고, 김경률 비대위원이 ‘마리 앙투아네트’ 발언까지 꺼냈으니 용산에서 불쾌해했을 개연성이 크다. 하지만 이런 변수 속에서도 명품백 수수 의혹을 그대로 두고 총선을 제대로 치르기는 어렵다는 인식은 대통령실과 여당 핵심이 공유하고 있다는 전언이다.    당초 민주당이 띄운 김 여사 관련 논란은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의혹 특검법에 대한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가 출발이었다. 그런데 당정 갈등이 시선을 독차지하는 사이 명품백 사과 논란으로 치환된 측면이 있다. 윤 대통령이 조만간 관련 입장을 밝힐 것이라는 예상이 나오는 시점에 맞춰 여권 인사들은 ‘덫에 걸린 쪽에만 사과하라고 하느냐’며 일제히 여론전에 나섰다. 여권 일각에선 '기획 녹화'의 문제점을 국민에게 알리면서 제2부속실 설치 등 보완책과 함께 영부인 경호에 구멍이 뚫린 점을 고려해 경호 라인에 책임을 묻는 조치도 수습책의 하나로 검토 중이라고 한다.    이번 충돌을 ‘권력 2인자’의 차별화로 보며 일종의 레임덕으로 풀이하는 시각도 있었다. 하지만 여권 인사는 “총선에서 져서 진짜 레임덕이 오는 게 더 심각하다는 점을 여권 수뇌부가 모를 리 있느냐"라고 반문했다. 이번 사건을 거치며 윤 대통령의 국정운영 지지율은 나아지지 않았다. 하지만 서울경제·한국갤럽의 25~26일 여론조사 결과, 더불어민주당 지지율이 국민의힘에 앞서긴 하지만 한 달 전 조사에 비해 정부·여당 심판론이 5%포인트 낮아졌다. 총선에서 국민의힘 후보를 뽑겠다는 비율은 6%포인트 올랐다. 특히 스윙 보터 지역인 대전·세종·충청에서 국민의힘 후보 선호도가 12%포인트 증가했다.    당정 갈등 이슈는 오히려 민주당에 숙제를 던진 모양새다. 이전과 달리 여당이 용산을 제대로 견제한다는 이미지를 확보할 경우 선거에서 야당을 뽑아야 할 필요성이 줄어들 수 있다. 대통령실과 여당은 GTX 노선을 경기 평택과 충남 아산까지 연장하겠다고 발표하는 등 민심을 얻기 위한 정책 수단도 동원 중이다. GTX가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 시절 시작된 것을 보면 언제 실현될지 알 수 없는데도 이미 평택·김포 등이 들썩이고 있다.     민주당 출신 인사가 나서 “지역구 의석이 호남 28석, 영남 65석인 데다 강원·충청 등에서 민주당이 밀린다. 이대로면 총선에서 민주당이 질 가능성이 크다”(최병천 전 민주연구원 부원장)는 경고음을 울리고 있다. 그런데도 민주당 의원들은 여전히 여권 내홍을 평가하느라 바쁘다. 이재명 대표의 민주당이 여권의 실책만 기대하고 유권자에게 어떠한 감동도 주지 못한다면 경고가 현실이 되지 말란 법이 없다. 김성탁 기획취재2국장

    2024.01.31 00:16

  • 집단 무기력의 시대, 리더는 어디에… [김성탁의 시선]

    김성탁 논설위원 “아빠는 삼성전자 주식도 안 사고 뭐 하셨어요?” 대기업 임원을 지내다 퇴직한 50대 초반 지인이 아이들이 묻는 말이 달라졌다며 꺼낸 표현이다. 저랬던 질문이 “아빠는 서울 강남에 집도 안 사고 뭐 하셨어요?”로 바뀌었다가, 요즘은 “비트코인도 안 사고 뭐 하셨어요?”가 됐다고 한다. 부모가 저런 자산을 준비해두면 자녀가 성인이 돼 자리 잡는 데 도움이 된다는 걸 웅변하는 듯해 우스개로만 들리지 않았다.   시장에서 상인들이 추워진 날씨에 모닥불을 피워 놓고 추위를 녹이고 있다. 뉴스1  이런 말이 중년 세대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은 사는 게 팍팍하기 때문이다. 부모 세대만 아니라 아이들 처지도 비슷하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이 끝나고 요즘 대입 수시모집 합격자가 발표되고 있다. 다음 달 정시 지원도 시작되겠지만, 대학 학과 선호도는 부모 세대 때와 완전히 달라졌다. 과거엔 이른바 ‘스카이(SKY)’로 불리는 서울대·연세대·고려대 등에 합격하면 입시에 성공했다고 했다. 하지만 성적 최상위권이 의대를 필두로 ‘메디컬 계열’로 향한 지 오래다.     ━  대학 들어가도 미래 보장 없어     올 초 ‘2023 대한민국 집단 무기력의 시대가 시작되다’라는 강의로 유튜브를 달군 공부법 전문가 조남호는 “우리나라에선 행복과 돈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큰데, 더는 SKY를 나와도 크게 부자가 되지 못한다”고 했다. ‘인생을 바꿔 주는’ 대입 선택지가 의대 진학이 됐지만, 진입 가능한 인원은 SKY보다 훨씬 적다는 것이다.    대입을 준비하는 10대가 메디컬을 가는 방법은 수시와 정시가 있는데, 수시에서 지역인재 선발 등이 다소 느슨할 뿐 일반고 기준으로 내신이 1점대 극초반이어야 하는 경우가 많다. 고교 3개 학년 모두 전교 1~2등 정도여야 한다는 말이다. 정시에서 의대에 가는 것은 수능을 매우 잘 봐야 가능한데, 이는 N수생의 무대다. 공부를 잘한다는 학생들도 학교 내신 시험 한번 삐끗하면 정년 없이 고소득을 얻을 수 있는 일자리를 잡기 어려울 것이라고 여긴다고 한다. 이런 구조에서 학원을 도는 아이들이 무기력해지지 않을 수 있을까.    ━  집값에 저출산, 조기퇴직 물결      모두 의사가 될 필요도 없고 실제 대다수 성인은 다양한 직장에 다닌다. 하지만 자력으로 수도권에 아파트 한 채 장만하는 게 쉽지 않다. 고물가에 영끌해 산 아파트 대출금 이자가 올라 자녀 학원비 대기도 벅찬 게 현실이다. 40~50대 퇴직이 줄을 잇지만 노후 대비를 제대로 해 놓은 게 없다. 이런 미래가 뻔히 보이니 결혼해도 자녀를 낳지 않는다. ‘워라벨’이 멋있게 들리지만, 일을 열심히 해봐야 변할 게 없다는 무력감이 우리 사회 전체를 뒤덮고 있다는 진단이 나오는 이유다.    급속한 고령화와 저출생이 국가의 존망을 위협하지만 이런 여건이라 해법이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 지방 광역시에도 기업의 생산 시설 등 일자리가 거의 없고 건물마다 각종 병·의원만 들어차 있다. 청년층 일자리도 없는데 조기 퇴직자가 국민연금 수급 때까지 크레바스를 버틸 일자리 찾기는 더 어렵다. 저성장 시대에 찾아온 집단 무기력 사회의 모습이다.    과거 우리는 벤처기업 붐을 거친 적이 있다. 초고속통신망 구축 세계 1위라는 말을 들을 무렵이다. 한때 스타트업이 고용을 주도했지만, 코로나 시기를 거치며 개발자 해고가 이어졌다. 학력 최상위층이 의대를 가지만 해외 의료 기업들이 고수익의 비만치료제 등을 내놓는 것 같은 파급 효과는 없는 사회, 뜻한 바 있어 인공지능 전공을 택해도 해외 선두 기업과의 큰 격차로 미래를 기약하기 어려운 사회, 고급 인력을 배출해야 할 대학이 수십 년 전과 달라지지 않은 사회, 수도권에 모든 인프라가 집중된 사회를 어떻든 바꿔내야 한다.    ━  내년 총선에도 기대는 어려워          개인이 목표와 활력을 되찾게 하려면 우리가 처한 문제를 제대로 짚고 대안을 말하며 지향을 제시해줄 리더들이 필요하다. 허허벌판에서 산업화의 초석을 세웠던 리더, 목숨을 걸고 민주화를 견인한 리더, 세계적 기업을 누르고 반도체 강국을 만든 리더, K소프트 파워를 일궈낸 창조적 리더 등 우리에겐 이런 이들이 있었다. 무기력을 떨쳐내게 하려면 미래 산업 육성을 위한 대학 교육 및 입시 개혁, 국가 산업 구조 개편, 사회적 약자 보호와 국토균형발전 등 모든 국가 정책과 예산 배분을 결정하는 정치권에서부터 리더십이 세워져야 한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여야가 다투지만 어느 쪽이 이기든 지금과는 다를 것이라는 희망을 주지 못하고 있다. 대통령이든 야당 대표든 다른 정치인이든 누구든, 현재 처한 상황에만 함몰되지 말고 대범한 청사진과 의지를 보여 달라. '세계에서 가장 빨리 발전한 나라'에서 '가장 빨리 사라질지 모르는 나라'로 바뀐 우리를 자극해줄 리더가 절실하다. 김성탁 논설위원

    2023.12.15 00:32

  • 변별력 높지만 사교육 잡기 역부족인 올 수능 [김성탁의 시선]

    김성탁 논설위원 "1교시 국어 풀다 ‘멘붕’ 왔는데 2교시 수학, 3교시 영어까지 어려운 '불수능'이다." 2024학년도 대입 수학능력시험을 치른 수험생들이 인터넷 카페 등에서 보였던 반응이다. 다음 달 8일 실제 수능 성적표가 나오면 정확해지겠지만, 수능 만점자를 찾기 어려운 가채점 결과를 보면 이런 반응이 실제일 가능성이 크다.    올 수능은 윤석열 대통령의 ‘킬러 문항’ 배제 방침에 맞춰 출제됐다. 교육 당국이 그런 문항의 포함 여부를 점검했다. 킬러 문항은 공교육 과정에서 다루지 않는 어려운 지문 등을 쓰기 때문에 사교육에서 기술을 익히고 반복 훈련한 학생에게 유리하다는 지적을 받았었다. 킬러 문항 배제의 목표가 사교육 경감이었던 셈이다.   202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일에 수험생들이 수능 시작 전 마무리 공부를 하고 있다. 뉴스1  실제로 수능 국어의 경우, 과학 관련 지식이 필요한 문제 등 킬러 문항이 사라졌다. 그렇지만 가채점 결과, 원점수 기준 지난해 90점대였던 1등급 커트라인이 80점대로 내려갈 것으로 예측될 정도로 어려웠다. 물론 고난도 수능 국어가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다. 국어 과목이 쉬우면 통상 고득점이 어려운 수학의 영향력이 과도하게 커진다. 대학이 정시모집에서 주로 반영하는 표준점수의 경우, 국어가 쉬우면 원점수를 잘 받더라도 수학보다 표준점수가 낮은 경우가 발생한다. 이번 수능에선 수학도 어렵게 출제됐는데, 지난 9월 모의평가에서 수학 만점자가 2520명이나 나온 문제점을 보완하려고 조절한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올해는 국어와 수학이 모두 주요 변수가 될 전망이다.    실채점 결과가 가채점 경향과 비슷할 경우 올 수능은 상위권 변별력이 매우 뛰어난 시험이 된다. 국어·수학으로 최상위부터 촘촘하게 일렬로 세우는 효과가 커진다. 여기에 더해 이번 수능에선 절대평가인 영어에서도 1등급 비율이 지난해 수능보다 크게 떨어질 것으로 예측됐다. 영어도 줄 세우기에 가세하는 셈이다.   ■  「 킬러문항 뺐지만 국·수·영 어려워 과탐 과목 유불리 격차도 그대로 복잡한 대입에 단순 접근이 잘못 」     하지만 정부가 킬러 문항 배제의 목적으로 내세웠던 사교육비 절감에는 역효과를 낼 소지가 크다. 국어의 경우 과거 킬러 문항이 주로 등장했던 비문학만 쉬웠을 뿐, 문법과 문학 등 나머지 분야의 문항은 모두 어려웠다. 수험생들 사이에선 "지문에 어려운 킬러 문항이 있을 경우 아예 젖혀두고 다른 문제에서 고득점을 노릴 수 있었는데, 이번 수능은 선지까지 헷갈리게 내 시험 시간 안에 문제를 푸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는 반응이 많다. 사교육 업체들은 문법과 문학, 독서가 다 어려운 국어에 대비하려면 학교 교육만으로 되겠느냐고 광고할 것이다.    수학에서도 가채점 결과 22번 문항의 정답률이 한 자릿수에 그칠 정도로 어려워 사실상 킬러 문항이 아니냐는 논란이 일었다. 수학은 안 그래도 사교육 1순위 과목인데, 여기에 영어까지 더해질 소지가 있다. 어렸을 때부터 과도하게 영어 사교육에 집착하는 것을 막으려고 절대평가로 바꾼 게 수능 영어다. 절대평가는 다른 수험생보다 잘 봤는지와 상관없이 90점 이상이면 1등급을 받는다. 그런데 이번 수능에선 상위권 중에서도 2등급이 속출했다. 독해력이 뛰어나야 소화할 수 있는 영어 지문이 많았고, 선지도 헷갈리게 냈다. 이러면 수능 영어를 고려해 사교육에 눈을 돌려야 하는지 고민하는 학부모가 늘 수 있다.     내년에 의대 정원이 늘어날 예정인 점도 사교육비 증가를 부추길 요인으로 꼽힌다. 의대 재도전을 위해 재수·반수생이 쏟아질 텐데, 서울 대치동 재수종합반에 다니려면 1년에 1000만원 이상이 든다. 아니나 다를까, 학원들은 대학 수업을 듣고 난 저녁에 재수 준비를 할 수 있도록 사상 최초로 야간반 재수 과정까지 이미 내놓았다. 결국 킬러 문항 배제는 사교육비를 줄이려는 목적에서 출발했지만, 빛이 바랠 개연성이 커졌다.    또한 이번 수능 가채점에 따르면 과탐2 과목의 표준점수 최고점이 과탐1에 비해 10점가량 높을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지구과학1 만점자보다 지구과학2 만점자가 14점이나 더 받을 것이라는 예측이 나왔다. 실채점에서도 마찬가지라면 수능 출제기관인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반수생 유입 등 변수 예측을 잘못해 과목별 유불리 잡기에 실패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 여파로 서울대 자연계 등은 과탐2 고득점자가 휩쓸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복잡한 함수가 작동하는 수능을 놓고 정부가 킬러 문항 배제처럼 1차원적으로 접근한 것 자체가 무리였다. 관련자들이 문책 당하는 것을 보고 킬러 문항 배제만 신경 쓰고 정작 사교육 절감이라는 목표는 흐릿해졌던 건 아닌가. 교육 당국은 수능의 기능과 과목 간 유불리 해소 방안 등 근본적인 고민에 나서야 한다. 김성탁 논설위원

    2023.11.24 00:38

  • 대통령이 스스로 언급한 단어 ‘탄핵’ [김성탁의 시선]

    김성탁 논설위원 코로나19 대유행이 한창이던 2021년 9월, 23년간 맥줏집을 운영해오던 서울 마포구의 한 상인이 경영난을 견디지 못하고 극단적 선택을 했다. 굳게 닫힌 가게 문에 나붙었던 추모 포스트잇 중에 ‘곧 따라갈 거에요’라는 글귀가 있었다. 한계 상황에 내몰린 자영업자들이 세상을 뜨는 경우가 전국에서 발생하던 시기다.   윤석열 대통령이 소상공인과 택시기사, 무주택자, 청년 등이 참가한 가운데 1일 오전 서울 마포구 한 카페에서 열린 `제21차 비상경제민생회의'에서 참가자의 발언을 듣고 있다. [사진제공=대통령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일 마포구의 한 북카페에서 비상경제민생회의를 주재하면서 당시 상황을 언급했다. 맥줏집과 고깃집 등이 들어찬 마포 일대를 “학창시절부터 친구들과 뻔질나게 다녔다”는 윤 대통령은 정치에 뛰어들며 밝힌 입장문의 첫 페이지가 마포 자영업자 얘기였다고 소개했다. 대선 승리 후 맨 먼저 영업규제로 손실을 본 자영업자들을 위해 50조원을 집행하는 일부터 했다고 설명했다.    회사원과 주부, 소상공인 등 60여 명을 초대해 의견을 들은 간담회에서 윤 대통령은 정부의 역할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국민의 안전을 살펴야 되고 어려움을 해결하고 달래줘야 정부”라고 말했다. “미래를 위해 전략적인 투자나 외교 활동도 하고 공정한 시장과 교육 환경을 만들어 민간 중심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것도 중요한데, 국민이 못 살겠다고 절규하면 듣고 답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더하고 뺄 것 없이 적절한 인식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언급에서 윤 대통령은 스스로 ‘탄핵’이라는 단어를 거론했다. “불요불급한 것을 좀 줄이고 정말 어려운 서민들의 절규하는 분야에 재배치시켜야 하는데, 받아오던 사람들은 죽기 살기로 저항한다”며 “받아오다가 못 받는 쪽은 그야말로 대통령 퇴진 운동을 한다”고 표현했다. “어려운 서민들을 지원하는 쪽으로 예산을 재배치시키면 아우성이다. 내년 선거 때 보자, 아주 탄핵시킨다 이런 얘기까지 막 나온다”고 목청을 높였다.    윤 대통령은 내년도 예산안 시정연설에 이어 간담회에서도 “재정을 더 늘리면 물가 때문에 서민들이 죽는다”며 긴축 재정 기조를 밝혔다. 그러니 재정 지출을 늘리지 않으면서 약자 보호를 두껍게 하려면 다른 예산을 줄일 수밖에 없는 불가피성과 자신의 진정성을 강조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대통령이 직접 탄핵을 언급한 것은 부적절하다. 예산안 관련 감축 시비가 이는 항목은 연구·개발(R&D) 예산이 대표적이다. 과학자들 사이에선 외환위기 때도 R&D 예산이 안정적으로 유지됐고, 핵심 연구기관의 예산까지 삭감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왔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도 어제 기자회견에서 재정 지출 확대를 요구하면서 R&D 예산 삭감 반대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이 예산을 놓고 대통령 탄핵을 주장하는 집단은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다.   ■  「 내년 R&D 예산 축소 놓고 논란 “대통령 탄핵해야“ 움직임 없어 반대파와도 진솔하게 대화해야 」     윤 대통령 퇴진을 공개 주장하는 세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양대 노총이 오는 11일 30만 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집회를 연다. 서울 도심에서 20만 명이 모이겠다는 민주노총은 “정권 퇴진을 외칠 것”이라고 예고했다. 윤석열정권퇴진운동본부 같은 단체가 가세한다. 한국노총 조합원 10만 명은 여의도에서 정권 심판을 내걸고 모인다고 한다.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 등 일부 야권 인사들이 집회에서 탄핵을 주장한 적이 있지만, 야당에서 탄핵을 의제화하고 있지 않다.    그만큼 대통령 탄핵은 쉽게 꺼낼 수 없고, 꺼내서도 안 되는 단어다. 과거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됐다가 헌법재판소에서 기각됐고, 박근혜 전 대통령은 탄핵안이 인용돼 대통령직에서 파면됐었다. 우리 헌정사에 그런 갈등과 아픔이 반복돼선 안 된다. 정부 예산에서 어떤 항목을 늘리고 줄일지는 국회에서 여야가 논의해 조정하면 될 일이다. 정부와 야당이 생각이 다르다면 각자의 취지를 국민에게 설명해 평가를 받으면 될 일이다.    대통령이 이런 사안에 ‘탄핵’을 말하면 자칫 예산 조정에 반대하는 측은 모두 정부 퇴진을 노리는 세력이 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탄핵은 헌법이나 법률을 위배한 때에만 가능하다. 탄핵안 의결도 국회 재적의원 과반의 발의와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필요하다. 쉽게 가능하지 않은 사안을 대통령이 거론하면 총선에서 반대쪽을 표로 심판해 달라는 ‘정치적 수사’로 읽힐 소지가 있다.      윤 대통령은 간담회에서 “누구의 탓을 돌리지 않겠다. 모든 것은 제 책임”이라고 말했다. “(탄핵을) 하려면 하십시오”라는 전투적인 표현 대신 예산 감축 대상이 된 이들과 만나 진솔하게 이해를 구하는 것이 지도자로서 책임을 다하는 모습일 것이다. 김성탁 논설위원

    2023.11.03 00:44

  • 유권자 역린 건드리는 필패의 수, 오만 [김성탁의 시선]

    김성탁 논설위원 ‘김행 임명 꼭 해야 한다.’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를 앞두고 여야의 선거운동 상황을 전하는 기사에 이런 댓글이 달렸었다. 비슷한 주장을 담은 글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에 대한 청문회에서 각종 의혹이 제기됐고 급기야 ‘김행랑’이란 용어가 회자하던 상황에서다. 하지만 이런 댓글은 김 후보자의 임명에 찬성하는 취지가 아니었다. 이어지는 내용 때문이다.   국민의힘 김기현 대표(오른쪽)와 윤재옥 원내대표. 김성룡 기자  ‘상식과 동떨어진 발언을 해온 신원식 국방부 장관 후보도 임명했는데 계속해야죠.’ 유인촌 문화체육부 장관을 포함해 후보자들의 재산이 매우 많다는 것을 빗대 ‘100억원 이상은 있어야 이 정부 장관 자격이 있는 것이지’라는 글도 보였다. 더 심각한 것은 ‘계속 마음대로 임명하세요. 내년 총선에 상대편 밀어 그들 원하는 대로 하라고 할 테니…’라는 반응이었다.    이번 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 진교훈 후보가 국민의힘 김태우 후보를 상대로 17.15%포인트 차이로 압승했다. 여권으로선 예상 밖 참패였겠지만 선거 과정에서 이상 신호가 이미 나타났다. 포털 등에 댓글을 쓰는 이들 중에는 강서구 유권자가 아닌 경우도 많았겠지만, 국민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밀어붙이는 행태에 대한 반감이 컸다.    윤석열 대통령과 국민의힘의 실책은 한국 유권자의 역린(逆鱗)을 간과한 데에서 비롯됐다. 역대 선거에서 승부를 가른 요건은 다양했겠지만, 특히 오만함을 보이는 정치 세력은 대부분 표로 응징받았다. 오랫동안 주요 선거를 경험한 정치인들이라면 정당을 불문하고 뼈저리게 아는 사안일 텐데, 과오가 반복된다. 주로 집권당에서 잦은데, 손에 쥔 권력이 판단을 가리기 때문이다.    국민의힘이 이번에 김 후보를 공천한 것 자체가 반면교사를 잊은 사례다. 2021년 4·7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는 여당이던 민주당 단체장들의 성추행 의혹 사건 때문에 치른 선거였다. 당헌에 따라 후보를 내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지만, 민주당은 당헌을 개정해 후보를 냈다. 결과는 참패였는데, 2020년 총선에서 174석이라는 거대 의석을 얻은 민주당의 오만이 원인으로 꼽혔었다. 보궐선거를 초래한 장본인인 김 후보를 공천한 여권이 다른 평가를 기대할 수 있었을까.   ■  「 "김행도 임명하라" 역설적 반응 '잠시 맡겨둔 권력' 잊으면 철퇴 역대 선거 보면 여든 야든 심판 」     문재인 전 대통령의 지지율이 40%대를 보이고 여당이 거대 의석을 가졌음에도 지난 대선과 지난해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이 패한 원인도 마찬가지다. 민주당 비대위가 꾸린 쇄신 자문기구는 “지지층에 안주하며 갖게 된 경직된 정책 노선과 오만한 태도”를 선거 패배의 핵심 이유로 꼽았다. 3000명을 온라인 조사하고 100여 명을 인터뷰한 보고서는 "김대중-노무현-문재인 정부로 이어지는 성공이 오히려 지지층의 확장성을 저해해 패하게 했다"고 지적했다.    이번 선거에서 윤석열 정부가 깨달음을 얻을지는 미지수다. 당장 논란이 됐던 김행 후보자를 자진 사퇴 형식으로 정리하긴 했지만 앞으로 지켜봐야 한다. 선거의 승부는 여야의 충성 지지층이 아니라 30%가량에 해당하는 중도·무당층이 결정한다. 여야를 막론하고 이들 눈에 오만하게 비치면 선거는 하나 마나다.    윤 대통령은 전임 정부를 빗대 줄곧 비교우위를 주장했다. 하지만 새롭게 시도했던 도어 스테핑을 그만둔 이후 기자회견 등을 하지 않는다. 국무회의 모두발언을 생중계하는데, 이런 방식은 국민과의 소통이 아니다. 과학적으로 문제가 없다지만 일본의 핵 오염수 방류에 대한 정부 대응에 불만족스럽다는 여론이 70%가량 나온다. 그런데도 윤 대통령이 “1 더하기 1을 100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세력들과는 싸울 수밖에 없다”고 말하자 인터넷에는 “내가 반국가세력인가?”라는 반응이 달렸다.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문제, 그리고 ‘자유민주주의’ ‘공산 전체주의’ 같은 표현을 써가며 이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윤 대통령의 발언도 계기나 배경을 국민에게 자세히 설명한 적 없다. 강성 지지층에게 호소력이 있을지 모르나 스윙보터인 중도·무당층엔 “먹고 살기도 어려운데 지금 왜?” 같은 의구심을 던진다.     보궐선거 승리 직후 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민주당의 승리라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다수 의석을 무기로 법안 처리 등을 강행하다 미운털이 박혀 정권을 내준 과거와 결별할 것인지 두고 볼 일이다. 오만한 권력을 심판하는 민심은 여와 야를 가리지 않는다. 선거에서 이겼다고, 권력을 쥐었다고 고개를 쳐들면 다음 선거에서 본때를 보이는 게 민심이다. 정치인들은 자주 망각하지만 산업화와 민주화 여정을 지나온 유권자들은 잘 알고 있다. 그들에게 권력을 잠시 맡겨둔 것임을. 김성탁 논설위원

    2023.10.13 01:06

  • 정치에서 감동 느껴본 게 언제인가 [김성탁의 시선]

    김성탁 논설위원 어제 국회 본회의를 앞두고 ‘빅데이’라는 표현이 쓰였다. 국회에서 큰일이 벌어진다는 의미였는데, 제1야당 대표에 대한 체포동의안 표결과 내각 수반인 국무총리에 대한 해임건의안 표결이 동시에 진행된 초유의 일이었다. 두 건 모두 법적 요건을 갖추면 표결하는 사안인 건 맞지만, 우리 정치가 처한 갈등 상황을 상징하는 장면으로 남을 만했다.    표결 결과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에 대한 체포동의안과 한덕수 국무총리 해임건의안이 모두 가결됐다. 민주당에서 이탈표가 나오면서 이 대표는 영장실질심사를 받게 됐고, 이 대표의 혐의가 유죄인지 무죄인지는 재판에서 판가름날 것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이 대표는 국민과 한 약속을 번복했다는 오명을 남겼다.   20일 오후 국회 본회의에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에 대한 체포동의안 가결 선포 직전 민주당 의원들이 모여 있다. 강정현 기자  지난 2월 이 대표의 대장동 의혹에 대한 1차 체포동의안이 부결됐었는데, 그 후 당 혁신위원회가 불체포특권 포기 당론을 권고했다. 민주당은 그러자 ‘정당한 영장 청구 시’라는 꼬리표를 붙여 당론으로 정하는 수준에 그쳤다. 이 대표는 지난 6월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 불체포 권리를 포기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검찰이 소환한다면 응하고, 구속영장을 청구하면 제 발로 출석해 영장실질심사를 받겠다는 다짐이었다.   ■  「 이재명 체포동의안 가결 안팎 돈봉투 의혹도 ”검찰 조작” 주장 야당 살려면 '바보 노무현' 필요 」     하지만 이 대표는 어제 표결을 앞두고 “명백히 불법 부당한 체포동의안의 가결은 정치검찰의 공작수사에 날개를 달아 줄 것”이라며 부결을 요구하는 글을 SNS에 올렸다. 글 분량만 2000자에 육박했다. 불체포 특권은 어차피 회기 중 영장 청구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약속을 스스로 뒤집었다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다. 급기야 단식의 진정성마저 의심받게 됐다.    역대 정부에서도 야당은 검찰 수사에 항의한 적이 많다. 하지만 특히 야당 지도자의 언행은 지지자는 물론 중도·무당층에까지 감동을 줄 수 있어야 정치적인 효과를 낸다. 정권을 내주고 예산을 수립하거나 정책을 집행할 권한이 없는 야당이 됐다면 국민 여론에 울림을 줄 행보를 해도 선거에서 이기기가 쉽지 않다. 국회 과반 의석을 가진 민주당이 그동안 정부·여당 비판 외에 유권자와 어떤 공감을 끌어냈었는지 잘 떠오르지 않는다. 민주당 일부의 합류로 체포동의안이 가결된 만큼 이 대표는 자신이 주장했던 대로 사법부의 무대에서 정당하게 평가받기 바란다.    '전당대회 돈 봉투 의혹’과 연관된 민주당 의원들의 반응 역시 실망스럽다. 구속기소 된 무소속 윤관석 의원 측이 법정에서 이정근 전 민주당 사무부총장으로부터 100만 원씩 담긴 돈 봉투 20개를 받았다고 시인했다. 혐의 사실을 부인하던 입장을 뒤집고 일부를 인정한 것이다. 정당법상 처벌을 가볍게 하려는 의도라는 해석이 나오지만, 관련 녹취록이 보도되는 와중에도 ‘검찰의 조작’이라며 반발했던 발언이 무색하다.     관련자들의 실토가 이어지는 것을 보면 송영길 전 민주당 대표부터 ‘정치적 기획수사’라는 반발 대신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야 하지 않을까. 당의 지도층 인사들부터 숨기에 급급한 모습이라면 민주당이 국민과 호흡하는 길은 멀기만 할 것이다.    민주당으로선 여당도 마찬가지 아니냐고 할 만하다. 신원식 국방부 장관 후보자가 2019년 자유한국당 집회에서 "이완용이 비록 매국노였지만 한편으론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었던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고, 과거 12·12 쿠데타를 두고 ”공백기에 나라를 구해야겠다고 나온 것“이라고 평가해 논란이 되고 있다. 개각을 한다면 창의적인 인물을 발굴해 내각에 수혈해야 할 텐데 어떤 기준으로 후보자를 고른 것인지 감동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국민의힘에선 윤희숙 전 의원이 국민권익위원회 조사 결과 부동산 투기 의혹이 제기되자 의원직에서 사퇴하는 식의 행동을 보여준 적이 있다.     민주당 계열에서 국민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 정치인으로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꼽힌다. 그는 당선 가능성이 있는 서울 지역구 출마를 거부하고 2000년 4월 16대 총선 당시 부산 북강서을로 갔었다. 패배 가능성을 알면서도 지역주의 타파를 내세우며 출마를 강행해 ’바보 노무현’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노 전 대통령은 선거사무실 해단식에서 “한순간의 승리가 모든 것은 아니다. 결코 헛일했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말했다. 지역주의 극복을 위한 자기희생은 2002년 대선 승리의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내년 총선까지 여야가 경쟁하겠지만, 특히 야당은 국민에게 대안이라는 공감대를 얻지 못하면 승리의 동력을 얻기 어려울 수 있다. 신뢰 회복은 자기희생과 내려놓기가 있어야 가능하다. 김성탁 논설위원

    2023.09.22 00:43

  • 쌈박질 거대 양당, 선거 기득권 사수는 한몸 [김성탁의 시선]

    김성탁 논설위원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였다. 내년 총선에 적용할 선거제도를 놓고 거대 양당인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이 공감대를 형성했다는 방안 이야기다. 선거제 개편 협상은 양당 원내수석부대표와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정개특위) 양당 간사가 참여하는 ‘2+2 협의체’가 해왔다. 소수 정당은 끼지도 못했다. 양당은 지역구에서 국회의원을 한 명 뽑는 소선거구제를 유지하고, 권역별 비례대표제를 도입하기로 의견을 모았다고 한다. 현재 47석인 비례대표 의원 수를 늘릴 것인지가 막판 쟁점으로 꼽힌다.   김진표 국회의장(가운데)이 지난 7월 국회에서 열린 '선거제 개편 협의체 발족식'에서 국민의힘, 더불어민주당 원내수석부대표 및 정치개혁특위 간사에게 자리를 안내하고 있다. 뉴스1  지난 2020년 실시된 21대 총선에서 ‘위성 정당’ 사태가 벌어졌던 터라 선거제도의 변화는 불가피했다. 21대 총선에 적용된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지역구에서 얻은 의석수가 전국 정당 득표율에 미치지 못하면, 비례대표에서 모자란 의석수의 50%를 채워주는 제도였다. 사표를 줄이고 다양한 정당의 원내 진출을 도와 거대 양당의 독식을 견제하면서 정치 다양성도 높이는 효과를 기대했었다.    하지만 실제 선거에선 거대 양당 때문에 비판의 대상만 되고 말았다.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는 2019년 민주당·바른미래당·정의당·민주평화당 등이 주도해 도입됐는데, 제도를 반대했던 국민의힘 외에 민주당까지 위성정당을 창당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는 여전한 거대 양당 구도였고, 정치 불신만 커졌다.   ■  「 양당, 권역별 병립형 비례 공감 잇속 타협에 정치 다양성 외면 적대적 공생 막을 제도 찾아야 」   국민의힘과 민주당은 내년 총선에서 전국 단위로 뽑아오던 비례대표제를 권역별 선출로 바꾼다는 계획이다. 그러면서 21대 총선에서 적용한 준연동형은 폐지하고, 과거처럼 병립형으로 돌아가겠다고 한다. 병립형에선 보정 없이 정당 득표율에 따라 비례대표 의석을 나눠 갖는다. 헌정 사상 최초의 국회 전원위원회를 열면서 국민의힘은 ‘도농복합형 중대선거구제+권역별 병립형 비례대표제’를, 민주당은 ‘소선거구제+권역별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제안했었다. 하지만 각 정당이 유불리를 따지다가 없던 일이 된 셈이다.    양당이 권역별 병립형 비례대표제에 의견을 모았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반발이 터져 나오고 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등 시민단체와 정의당·진보당·노동당·녹색당 등은 병립형 비례대표제 회귀 반대 기자회견을 열었다. 야 4당 등은 “병립형 비례대표제는 비례성 증진, 대표성 강화라는 선거제 개혁의 원칙을 무시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병립형 비례대표제가 지지율이 높은 거대 양당에 훨씬 유리하기 때문이다.    권역별 비례대표제로 바꾸면 전국 단위 비례대표제에 비해 일부 긍정적인 효과가 나타나기는 한다. 영남에서 민주당이, 호남에서 국민의힘이 일부 비례 의석을 얻어 지역 구도를 다소 허물 수 있다. 소수 정당이 특정 권역에서 유의미한 지지율을 얻으면 비례 의석 확보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선거제도 전문가들은 “병립형에선 권역별로 비례의원을 배분하더라도 소수 정당의 의석 확보 확률은 매우 낮다”고 지적한다.    양당은 위성정당의 유혹을 막으려면 준연동형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민주당은 ‘권역별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당 입장으로 제안한 적이 있다. 결국 스스로 후퇴한 셈이다. 일부 시뮬레이션 결과 이 제도를 시행하면 국민의힘이 호남에서 얻는 의석보다 민주당이 영남에서 얻는 의석이 많게 나왔다. 반면 도농복합형 중대선거구제는 민주당에 불리했다. 양당이 각자 손해날 제도를 거부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역대 정부를 거치는 동안 국민의힘과 민주당 계열의 거대 정당은 극단적으로 대립하기 일쑤였다. 양당의 충돌은 진영 간 대립으로 이어졌고, 지난 대선 역시 초미의 접전으로 끝났다. 대선 이후에도 서로에 대한 공격과 반대가 일상화했을 뿐 타협은 찾아볼 수 없다. 균형추나 중재자 역할을 할 세력 조차 없다.    윤석열 대통령이 ‘반국가세력’을 언급하고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무기한 단식에 들어가는 극한 대립을 보노라면 거대 양당 기득권에 제동이 꼭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선거제도 전문가들은 지역구 정당득표율보다 의석을 더 많이 얻은 정당을 비례 의석 배분에서 제외하고, 정당 득표율 대비 지역구 의석이 적은 정당부터 ‘보정 의석’을 순서대로 나눠주는 방식으로 다양한 정당의 원내 진입을 돕는 대안까지 이미 내놓고 있다. 위성정당 역시 양당이 핑곗거리로 삼는 대신 대국민 선언을 하고 만들지 않으면 될 일이다. 아무리 '마이너스의 정치'를 해도 주류에서 밀려날 일이 없는 정당들이 '적대적 공생'을 이어 가지 못하게 하려면 선거제 개편을 두 당의 야합에만 맡겨둬선 곤란하다. 김성탁 논설위원

    2023.09.01 00:48

  • ‘국가 동원령’이란 이름의 꼰대 문화 [김성탁의 시선]

    김성탁 논설위원 한 코미디 프로그램에 ‘MZ 오피스’ 시리즈가 있다. 요즘 직장 모습을 과장해 보여주는데, ‘맑눈광’이 등장한다. ‘맑은 눈의 광인’을 줄인 말이다. 배우 김아영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 해맑은 표정을 짓는다. 선배 사원이 “업무 중엔 에어팟 빼요”라고 주문하자 “저는 노래 들으며 일해야 능률이 올라간다”고 답한다. 당황한 선배가 “그럼 한쪽만 빼요”라고 하지만, 맑눈광은 뺐던 이어폰을 다시 꽂고 고개를 돌린다.   8일 오후 '제25회 세계스카우트잼버리' 참가 대원들을 태운 버스들이 전북 부안군 새만금 세계스카우트잼버리 부지를 떠나고 있다. 뉴스1  위계질서가 강했던 직장 문화에 익숙한 세대라면 의아하겠지만, 젊은 세대에선 할 일만 제대로 하면 되지 뭐가 문제가 되느냐는 반응이다. 한곳에 모여 일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의사소통도 메일이나 메신저로 자주 하니 이어폰 착용을 대수롭지 않다고 여길 수 있겠다.    최근엔 코미디가 아니라 실제 상황에서 논란이 뜨겁다. 부실 운영으로 비판받는 새만금 잼버리와 관련해서다. 폭염 대비 부족은 물론이고 더러운 화장실과 세면장, 부실한 식사에 의료 부족과 벌레까지 갖은 문제가 터졌다. 태풍 때문에 스카우트 전원이 철수했는데 그 과정에서 공무원과 공기업 직원 등에 동원령이 내려졌다는 불만이 잇따랐다.    세계적으로 나라 망신을 당한 마당이니 정부는 국가 차원의 대책 마련이 급했을 것이다. 급한 불은 꺼야 한다는 여론이 없지 않고 대학이나 기업, 교회까지 숙박시설을 제공하고 나섰다. 어린 학생들이 큰 비용을 들여 왔는데 이대로 돌아가게 하는 건 도리가 아닌 것도 맞다. 그럼에도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에 날 선 반응이 쏟아지고 있다.   ■  「 잼버리 차출 공무원·민간인 반발 "X 싸는 사람, 치우는 사람 따로?" 기업들에 기대는 관례 언제까지…  」   ‘태풍 같은 재난에 동원되는 건 당연히 나라에 헌신한다는 자세로 하는데, 타 지역 행사 망가졌다고 기숙사 파견 가서 사감 역할 하라는 게 맞나.’ ‘구청에서 학교당 어머니회 15명씩 지원해달라는데 그것도 휴가철에….’ ‘전쟁 나서 징발하는 것도 아니고 공기업 직원까지 왜?’ ‘잼버리 소방서 만든다고 구급차를 동원해버려 심정지 환자를 시군구 경계까지 넘어 출동하는 어이없는 상황’ 등이다. 화장실 청소에 지역 공무원들을 투입했다가 ‘강제 동원’ 시비가 일자 구인 사이트에 하루 20만원 알바 모집 글이 올라오기도 했다.      비자발적으로 지원에 참여하게 된 이들이 분통을 터뜨리는 이유는 명확하다. ‘똥 싸는 사람 따로 있고 치우는 사람 따로 있느냐’는 반응이 대표적이다. 잼버리 대회는 6년이나 준비 기간이 있었고, 예산만 1200억원에 달했다. 새만금이 후보지로 정해진 2015년 이후 관계 기관 공무원들이 다녀온 해외 출장만 99회다. 4만 명 정도가 참여하는 행사를 이 지경으로 만든 당사자들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다.    그래서 대통령실이나 국민의힘 관계자가 “기업, 지자체, 민간단체, 종교단체까지 금 모으기 운동처럼 나서 힘을 모았다”고 말한 것은 한참 잘못 짚었다. 주무장관으로서 “잼버리 사태가 한국의 위기 대응 역량을 보여줬다”고 한 김현숙 여가부 장관은 거론할 가치조차 없다. 반발하는 이들은 잼버리가 외환위기 같은 국가적 위기가 아니며, 세금을 들여 마땅히 임무를 완수했어야 할 공직자들의 무능을 보여준 사건이라고 질타한다. 정부와 여당은 물론 개최지인 전북 도지사들이 속한 더불어민주당까지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K팝 콘서트를 추진하는 과정에서도 달라진 세태가 도드라졌다. 아쉬움이 클 대원들을 위로하자는 취지였지만, 여당 인사의 BTS 참여 주장이 불을 댕겼다. 팬클럽이 입장문을 내고 “정부의 강압적인 요구에 따라 콘서트에 참여하는 것은 민주주의 퇴행이자 ‘공권력 갑질’”이라고 반발했다. 전시도 아닌데 국가가 필요시 요구하면 호응할 거라는 기대는 접을 때가 된 것이다.    MZ 오피스 코너에서 맑눈광은 새로 입사한 후배에게 시쳇말로 ‘역관광’(역공)을 당한다. 이어폰이 아니라 커다란 무선 헤드폰을 끼고 일하는 후배는 “PPT 자료 좀 달라”는 요청에 “어제 오후에 시키신 일이라 상식적으로 지금 완성하기 힘듭니다. 애초에 마감 기한을 말씀해주지 않으셨습니다만…”이라고 대꾸한다. 후배 사원의 이름은 기가 엄청 세다는 뜻의 ‘기존쎄’다.    이제 정부·지자체 등 공적 조직은 공무원은 물론이고 민간 부문과의 관계를 재정립해야 한다. 잼버리 위기 극복에 기업의 후원이 도움을 줬지만, 문제만 터지면 기업에 물품이나 시설, 인력을 지원받는 것도 그만할 필요가 있다. 맑눈광에 이어 기존쎄 세대는 고유 업무와 관련 없는 동원에 조직적 반발을 넘어 소송으로 대응할지 모른다. 꼬박꼬박 세금 내는데 공직자가 제대로 일하지 못했으면 그 자리를 내려놓으라고 요구할 것이다. 김성탁 논설위원

    2023.08.11 00:59

  • [김성탁의 시선] 잦아진 ‘직을 걸겠다’ 해석하면 ‘총선 출마’?

    김성탁 논설위원 최근 정부 장관들 사이에서 “직을 걸겠다”는 말이 자주 나오고 있다. 무엇인가 걸겠다는 용어는 대개 도박에서 쓰인다. 영화를 보면 가진 돈을 한판에 전부 거는 ‘올인’ 장면이 나오고, 땅문서나 건물을 걸거나 심지어 자신이 경영하는 회사까지 거론하는 모습이 등장한다. 도박판에서나 나올 법한 용어를 국정 운영을 책임지는 고위직 인사들이 쓰니 당황스럽다.   지난 6일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은 더불어민주당이 최근 국회 정무위원회 법안소위에서 단독 처리한 ‘민주유공자 예우법’을 반대하며 “해당 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다면 제가 보훈부 장관을 그만두더라도 (윤석열 대통령에게) 거부권을 건의할 것”이라고 말했다. 앞서 그는 백선엽 장군을 친일파로 보는 시각을 비판하며 “제 직을 걸고 이야기할 자신이 있다”라고 했다. 법안에 문제가 있으면 관련 부처 장관으로서 국민에 이유를 상세히 설명해 여론의 판단에 도움을 주고, 국난 극복에 공헌한 백 장군에 대해서도 정확한 사실부터 알리는 게 순서다. 그런데 자꾸 장관 자리를 걸겠다고 나선다.     ■  「 원희룡·박민식 장관 등 잇딴 발언 공직은 주권자 국민이 맡긴 자리 출마 겨냥 선명성 과시용 아닌가 」    원희룡 국토부 장관도 최근 양평 고속도로 종점 변경 논란이 불거지자 “제가 김건희 여사 (일가의) 땅이 거기 있었다는 것을 이 사건이 불거지기 전에 조금이라도 인지하는 게 있었다면 (중략) 저는 장관직을 걸 뿐 아니라 정치 생명을 걸겠다”고 했다. 원 장관은 지난해 8월에도 정부 1기 신도시 재정비 ‘공약 파기’ 논란이 일자 “국토부로 인해 재정비 일정이 지연되거나 지체되는 일이 없도록 장관직을 걸고 약속한다”고 말했었다.   현 정부 들어 장관직을 거는 발언으로 단연 주목을 받은 이는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다. 지난해 10월 김의겸 민주당 의원이 국회에서 이른바 ‘청담동 술자리설’을 제기하자 “제가 거기 있었다는 근거를 제시하라. 저는 직을 포함해 다 걸겠다. 의원님은 뭘 거시겠냐”고 항의했다. 해당 의혹이 실체가 없는 것으로 드러난 만큼 한 장관이 느꼈을 억울함은 가늠할 만하다. 하지만 이미 차기 대선 주자로 분류되는 그가 직을 걸겠다는 용어를 꺼낸 이후 부쩍 유사 발언이 잦아지는 느낌이다. 같은 검찰 출신인 이복현 금융감독원장도 소시에테제네랄(SG) 증권발 주가 폭락 사태가 우려되자 “시장 교란 세력들에 대한 전쟁을 선포한다. 과하게 말씀드리면 거취를 걸다시피 한 그런 책임감을 갖고 추진해갈 것”이라고 말했다.   직을 건다는 것은 그만큼 책임감을 갖고 정책을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강조하기 위한 수사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자세는 장관이라면 직을 걸지 않아도 당연히 갖춰야 할 덕목이다. 국회 과반 의석을 가진 거대 야당의 반대에 묶여 법안 하나 제대로 통과시킬 수 없고, 각종 공세를 막아내려다 보니 강한 표현이 나왔을 수도 있다. 당사자들로서는 과거 대통령이나 대선 후보도 그런 말을 했는데 뭐가 문제냐고 여길지 모르겠다.   실제로 2003년 대선자금 문제가 달아오르자 노무현 전 대통령은 “우리 캠프에서 쓴 불법 대선자금 규모가 한나라당의 10분의 1만 넘으면 대통령직을 사퇴하고 정계를 은퇴하겠다”고 말했었다. 이명박 전 대통령도 대선 후보 시절 “BBK와 관련이 있다면 대통령에 당선되더라도 대통령직을 걸고 책임을 지겠다”고 했었다. 심지어 이완구 전 국무총리는 2015년 ‘성완종 리스트’ 수사와 관련해 돈을 받은 증거가 나오면 목숨을 내놓겠다고 ‘생명’까지 담보로 건 적이 있다. 가능하지도 않은 이런 언급 역시 정치인들이 결백을 주장하면서 공세를 차단하려고 전략적으로 쓰는 것일 뿐이다.   정부 고위직들이 정말 책임감을 느낀다면 직을 건다고 할 게 아니라 성과를 보여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임명권자에게 사의를 표하고 평가를 받으면 될 일이다. 더욱이 도박에서 거는 것은 개인 소유물이어야 한다. 하지만 정치인이나 장관 등의 공직은 주권자인 국민이 위임해 준 것이다. 세금으로 월급을 받는 이들이 마치 자기 것처럼 거네 마네 할 사안이 아니다.   선명성을 드러내는 이런 표현은 진영으로 갈라진 한국 정치에서 자기편에 강한 인상을 남긴다. 그래서 유행처럼 번지는 강성 발언을 두고선 “빨리 나가고 싶어서 그러는 거예요. 선거운동하려고”(박지원 전 국정원장)라는 풀이까지 나왔다.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출마 희망 인사들의 경우 공직을 사퇴해야 하는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 정책 추진에 직까지 걸며 각오를 다진 이들이 총선 출마를 위해 직을 던지면 이율배반 아닌가? 두고 볼 일이다. 김성탁 논설위원

    2023.07.21 00:56

  • 불체포 특권, 말로만 ‘포기’ 실효 없어 [김성탁의 시선]

    김성탁 논설위원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국회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 ‘불체포 특권’ 포기를 선언하면서 이 문제가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불체포 특권을 둘러싼 논란은 과거에도 있었지만, 민주당이 이 대표를 비롯해 소속 의원들의 체포동의안을 연속 부결시키면서 비난 여론이 높아졌다. 기다렸다는 듯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는 “모두 포기 서약서에 서명하자”라며 치고 나왔다. 민주당은 '김은경 혁신위'가 1호 안건으로 내건 의원 전원 불체포특권 포기 서약서 서명을 의총에서 논의한다.   국회 교섭단체 대표 연설을 하고 있는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왼쪽)와 국민의힘 김기현 대표. 연합뉴스  여러 여론조사에서 국민 다수는 불체포 특권 폐지를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정치권이 불체포 특권 포기를 선언한다고 법적 효력이 생기는 게 아니다. 헌법에 명시된 권리이기 때문이다. 개헌하지 않는 한 체포동의안이 국회로 넘어오면 해당 의원이 다른 의원들에게 가결을 요청하고 국회가 실천해야 효과가 난다. 말로만 '포기'를 앞세우기보다 ‘방탄’을 위한 임시국회를 소집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여야가 지키는 게 차라리 낫다.    그래서 개헌 논의조차 하지 않는 정치권이 보여주기식 주장을 하는데 휘둘릴 게 아니라 국회의원에게 특권이 주어진 의미를 돌아보고 실천 가능한 해결책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 헌법 제44조 1항은 ‘국회의원은 현행범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회기 중 국회의 동의 없이 체포 또는 구금되지 아니한다’고 명시했다. 불체포 특권은 정부 수립 당시 제정된 제헌헌법 이래 계속되고 있다.   ■  「 '의원 전원 포기서약' 여야 공방 체포동의안 부결 '방탄'이 문제 사전 심사, 기명투표 도입해야   」   이런 특권이 생긴 곳은 의회제도가 처음 발달한 영국이다. 국왕과 귀족 간 갈등이 심했던 1215년 존 왕이 세금을 일방적으로 거두려 하자 귀족들이 국민을 등에 업고 들고 일어나 ‘마그나 카르타(대헌장)’에 서명을 받아낸다. 하지만 이후에도 의회를 구성한 귀족을 상대로 전제 왕권을 행사하려는 시도가 반복됐고, 의원을 체포해 가두는 일이 빈번했다. 권력으로부터 의회를 보호하려고 1603년 ‘의회 특권법’을 법제화한 게 불체포 특권의 시초다.    이후 미국이 연방헌법에 회기 중 의원의 불체포 특권을 명시했고, 나치즘의 위험을 경험한 독일은 더 강력한 특권을 두고 있다. 회기 중에만 보장하는 우리와 달리 독일은 의원 임기 내내 특권을 인정한다. 체포뿐 아니라 기소할 때도 연방의회 동의를 거쳐야 한다. 불체포특권을 법제화하지 않은 나라가 극소수일 정도로, 삼권분립이라는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장치로 필요성을 인정받는 셈이다.    오히려 문제가 되는 것은 제도 자체가 아니라 우리 정치권이 ‘방탄’에 이용하는 실태다. 국내에서 제헌국회 이후 제출된 의원 체포동의안 70건 중 가결은 17건으로 24.3%에 불과하다. 반면 일본은 현재까지 20건이 청구돼 16건(80%)이 가결됐고, 특권을 더 강하게 보장하는 독일조차 1990년부터 2018년까지 체포동의안 가결률이 92%에 달한다.    불체포 특권을 유지하면서도 적절히 운영하는 방안은 해외 사례에서 찾아볼 수 있다. 독일에 파견된 입법관이 2021년 국회사무처에 보고한 자료에 따르면, 그해 2월 독일 연방의회는 뇌물수수 혐의를 받는 기독사회당 의원과 기독민주당 의원에 대한 체포동의안을 가결했다. 해당 기독사회당 의원은 심지어 원내대표였는데, 한 섬유업체의 방역 마스크를 정부기관이 사도록 로비한 대가로 뇌물을 받은 혐의였다. 기독민주당 의원은 해외 정부로부터 뇌물을 받고 EU 차원의 결의문 채택 등 로비를 한 혐의를 받았다. 이처럼 의원들 스스로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지 못하면 특권 유지의 명분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    체포동의안을 사전 심사하는 절차를 두는 것도 우리와 다르다. 독일은 체포동의안이 오면 국회의장이 상임위원회인 ‘선거 심사, 불체포 특권 위원회’에 넘겨 사전 심사 후 의결 권고안을 본회의에 제출토록 하고 있다. 정당 차원의 방탄을 봉쇄하고 국회 전체에 일정한 판단 기준을 제공하는 것이다. 우리 국회는 체포동의안을 무기명 비밀투표로 하기 때문에 누가 찬성하고 반대했는지 모른다. 반면 독일은 기명 투표여서 대부분 거수로 의사를 밝힌다. 유권자가 사안의 경중을 따져보고 방탄에 동조한 의원들을 심판할 수 있도록 제도를 바꿔야 한다. 불체포 특권을 적용할 수 없는 범죄 유형을 예외 규정 형식으로 확대하는 것도 검토할 만하다.    국회의원의 특권을 줄이는 일은 수사기관과 사법부의 신뢰도와도 관련이 있다. 미국에선 ‘중죄’는 체포할 수 있는 대상이어서 해석에 따라 대부분 주요 범죄가 해당할 수 있다. 그런데도 불구속 수사 원칙이 굳건해 체포 시도가 많지 않다. 사법적 잣대가 정치적으로 이용되지 않는다는 신뢰가 있어야 특권 제도 변경을 꾀할 수 있다. 김성탁 논설위원

    2023.06.30 00:55

  • 학폭 피해 지원기관 신설, 그 안에 빠진 것 [김성탁의 시선]

    김성탁 논설위원 정부·여당이 학교폭력 피해자의 치유·회복을 전문적으로 지원할 국가 차원의 기관을 만들겠다고 지난 1일 발표했다. 이주호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과 국민의힘 교육위 소속 의원들은 당정 협의를 거쳐 피해 학생의 치유 회복에 관한 연구와 프로그램 보급, 교육·연수, 치유·지원을 할 수 있는 기관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4월 발표한 학교폭력 근절 종합대책의 후속 조치다. 국가가 전문 기관을 만들어 피해자를 돕겠다는 취지는 좋지만, 필요한 내용이 빠져있다. 종합대책이 학교 현장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국회 교육위원회가 국회에서 정순신 변호사의 자녀 학교 폭력 문제와 관련해 교육부와 서울대학교, 민족사관고등학교 등을 대상으로 긴급현안질의를 진행하고 있다. 장진영 기자  정부 대책의 핵심은 ‘학교폭력에는 반드시 불이익이 따른다’는 인식을 확립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른바 엄벌주의다. 이를 위해 가해 학생 학생부의 학교폭력 조치 기록(출석정지, 학급교체, 전학)을 현행 2년 보존에서 졸업 후 최대 4년으로 늘렸다. 또 대학 입시에 반영토록 했다. 초등학생 대상 학원에까지 ‘의대 준비반’이 생길 정도로 대입에 관심이 많으니 어느 정도 효과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학교 현장의 학교폭력 대처 양상이 어떤지를 고려하면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정부의 대책 발표는 정순신 변호사의 아들이 학교폭력 가해자였지만 서울대에 진학했고, 피해자는 고통을 겪은 사건이 계기였다. 가해자 측은 각급 학교폭력대책위원회(학폭위)의 결정에 대해 가처분과 집행정지 신청, 재심 신청, 전학 결정 취소 소송 등 법률적 대응을 하며 시간을 벌었다. 대입은 정시 전형이라 학교폭력 여부가 반영되지 않았다는 게 서울대 측 설명이었다. 정부는 이를 고려해 대입 정시까지 가해 여부를 반영토록 했고, 2026학년도부터 의무화한다.   ■  「 학교는 이미 변호사 간 대리전 대입 반영 의무화로 계속 늘듯 형편 어려운 학생 도울 방안은? 」   문제는 학교 현장에서 소송전이 빈번하다는 점이다. 경미한 학교폭력의 경우 가해 학생과 부모가 피해자 측에 반성과 사과하는 선에서 해결될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이런 경우가 없는 건 아니지만, 학교 관계자들의 얘기는 다르다. 한 중학교 교장은 “요즘은 학교에서 학교폭력 여부를 조사하는 단계에서부터 변호사들이 나타난다”고 전했다. 가해자 측이 변호사를 선임해 대응하는 경우가 늘면서 피해자 측도 변호사를 찾는다.    학교폭력이 발생해도 학교가 알아서 피해·가해 여부를 가려주기를 기대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교사들은 “피해 정도가 매우 심해 명확한 경우가 차라리 쉽지 오히려 경미한 학교폭력은 다루기가 더 어렵다”고 말한다. 아이들 사이 갈등이 교육적으로 중재 되지 못하면서 변호사를 동원한 부모 간 대리전이 진행된다. 변호사들이 학폭위나 각종 가처분, 소송 등의 단계별 대응을 이끈다.    서울 한 초등학교 교사는 "요즘은 저학년 사이에 발생한 일도 변호사를 선임하기 때문에 교사들은 한쪽 편을 든다는 오해를 피하려고 기계적인 대응을 한다"고 말했다. 이쯤 되면 대입에 필수로 반영될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상할 수 있다. 가해자로 확정되면 불이익을 받으니 더 기를 쓰고 변호사를 찾을 가능성이 크다.    학교폭력 사건은 변호사 업계가 광고까지 하는 시장으로 떠올랐다. 수임 비용은 편차가 있지만, 행정심판이나 형사소송 대리의 경우 수백만 원 단위이고 단계가 길어지면 1000만원을 훌쩍 넘기도 한다. 학폭위로 가는 순간 법정 다툼까지 예고하는 사건이 되는 셈이다. 정부 대책을 두고 학교폭력 관련 법률 시장만 키워주는 ‘외주화 대책’이란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이런 여건에선 부모의 경제적 형편이 영향을 미칠 것인 만큼 일정 소득 이하 등 형편이 어려운 피해자 측의 법적 대리를 지원해줄 대책이 필요하다. 정부가 만들겠다는 지원 기관에 이런 기능이 포함돼야 한다. 정부는 종합대책 발표 당시 국선 대리인 선임과 법무부 마을변호사 제도로 지원하겠다는 정도만 담았는데, 누구에게 어떻게 도움을 받으라는 건지 알 수 없다.    일선 교육청 등에 법률 전문가가 포함된 지원팀을 배치해 피해 학생을 도울 구체적인 대안이 나와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피해 학생과 가족은 치유할 겨를도 없이 경제적 부담을 지며 장기간 법적 다툼에 내몰리게 될 것이다. 소수 변호사를 자문역으로 기관에 배치하는 정도로는 쏟아지는 학교폭력 피해자 지원에 한계가 따를 것이다. 변호사 업계의 수입과 관련된 일이라 자원봉사 등으로 소화하기도 쉽지 않다.     정부는 법률 전문가 지원 방법과 관련 예산 확보 등을 서둘러 검토해 추가 발표하겠다는 국가기관 설치 계획에 반영해야 한다. 정부가 천명한 엄벌주의는 정순신 변호사 아들 사건으로 달아오른 여론을 식혔을지 모르지만, 더 복잡한 과제를 던져 놓았다. 김성탁 논설위원

    2023.06.09 00:56

  • 절박한 쪽이 이길텐데, 어디일까 [김성탁의 시선]

    김성탁 논설위원 노무현 전 대통령이 당선됐던 2002년 대선 당시의 일이다. 대선을 하루 앞둔 12월 18일 밤, 새천년민주당 노 후보와 단일화를 선언했던 정몽준 국민통합21 후보가 지지를 철회했다. 노 후보 측 선대위원장이던 정대철 헌정회장이 소식을 듣고 당사로 향했다. 무작정 노 후보를 차에 태웠다. “어디를 갑니까?” 정 회장은 정 후보 집으로 간다고 답했다. “형 나 안 가! 돌려.” 노 후보의 답이었다. 워낙 거부 의사가 강해 정 후보의 서울 평창동 자택에 도착하기까지 한강을 건넜을 때, 이화여대 앞에서, 광화문 인근에서 등 세 차례나 차를 돌렸었다는 게 정 회장의 회고다.   가상자산(암호화폐) 이상 거래 의혹으로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한 김남국 의원. 뉴스1  설득 끝에 노 후보는 정 후보 자택 문 앞까지 갔고, 정 후보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 장면이 TV로 중계됐다. 실제 대선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확인할 길은 없다. 하지만 다음날 인터넷이나 휴대전화 문자로 투표 독려 현상이 발생했다. 이 장면이 안쓰러워 노 후보를 찍으러 갔다는 이들도 있었다. 대선에선 노 후보가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57만여표 차이로 이겼다. 후보가 싫어하는데도 끝까지 찾아가는 모습으로 유권자의 감정을 자극한 것은 대선에서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절박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난해 3월 20대 대선을 앞두고 승리를 위해서라면 어떤 변신도 할 수 있다는 자세를 보여준 쪽은 국민의힘이었다. 대선이 한참 남았을 때까지만 해도 국민의힘에선 더불어민주당을 상대로 이길 후보를 찾기 어려웠다. 문재인 전 대통령의 지지율이 공고했고, 180석 거대 여당이기도 했다. 하지만 보수적이고 고령층 당원이 많은 국민의힘 지지층이 '30대, 0선' 이준석을 당 대표로 뽑았다. 골수 보수 지지층만으로는 안 되고 중도층을 흡수해야 정권 교체를 할 수 있다는 판단이 작용했을 것이다.   ■  「 한밤 정몽준 집 찾은 노무현 승리 국민의힘은 이준석 파격으로 승기 민심 놓친 돈봉투·김남국 대응 」   윤석열 대통령이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된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윤 대통령은 2016년 박근혜 전 대통령 국정농단 사건 특별검사팀에서 수사팀장으로 활동했다. 2019년 검찰총장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선 국민의힘 전신인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그를 향해 날 선 발언을 쏟아냈었다. 하지만 윤 대통령이 문재인 정부와 각을 세우고 대선에 나서자 자당 후보로 선출했다. 대선은 0.73%p 차이 신승이었는데, 국민의힘 당원과 지지층의 선거 승리를 향한 열망이 밑바탕이었던 셈이다.    한국 정치에서 고정관념을 깨는 양상으로 선거판을 흔든 사례는 민주당 계열에서 자주 나왔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보수 계열과 손잡은 ‘DJP 연합’으로 집권했고, 2002년 호남 경선에서 '노무현 돌풍'이 일었던 게 사례다. 하지만 최근에는 국민의힘이 오히려 앞서가는 것 같다. 최근 국민의힘 윤리위원회는 “5·18 정신을 헌법 전문에 넣겠다는 윤 대통령의 말은 선거 때 표를 얻으려 한 것”, “전광훈 목사가 우파 천하 통일” 등 설화를 일으킨 김재원 최고위원에게 당원권 정지 1년 처분을 내렸다. 국민의힘 소속으로 총선에 나갈 수 없는 중징계다. 그런데도 김 최고위원은 “재심 청구나 가처분 소송은 생각해보지도 않았다”고 받아들였다. 내년 총선에서 승리해 여소야대 구도를 바꾸지 못하면 사실상 ‘식물 정권’이 될 수 있다는 위기감이 이런 변화의 배경이라고 생각한다.    반대로 민주당은 민심을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 이재명 당 대표가 대선 패배 후 곧바로 지역구 출마에 이어 대표 경선에 나섰다. ‘사법 리스크’로 조용할 날이 없지만, 민주당 당원들은 이 대표를 선택했다. 더 심각한 것은 ‘2021년 전당대회 돈 봉투’ 사건이 발생하고 생생한 녹취 파일이 공개됐는데도 송영길 전 대표나 관련 의원들이 마치 거리낄 게 없다는 듯한 태도를 노출하고 있다. 자진 탈당하는 게 고작이다.    거액의 가상자산 투자 논란 끝에 탈당한 김남국 의원을 국회 윤리특별위원회에 제소하기까지 민주당 지도부는 ‘선 진상조사, 후 제소 검토’를 고수했다. 그러다 비판 여론이 거세지자 떠밀리듯 늑장 대응했다. 이런 문제가 설화보다 훨씬 심각한 것 아닌가. 최근 여론조사에서 민주당 지지율은 텃밭 호남과 윤 정부에 등 돌렸던 20~30대에서까지 흔들리고 있다.    내년 4월 총선까지 10개월여가 남았다. 2017년 대선, 2018년 지방선거, 2020년 총선에서 승리했던 민주당은 지난해 대선과 지방선거에서 연패했다. 다음 총선에선 민심을 무시한 채 오만하고 무례하게 구는 쪽이 질 것이다. 선입견과 확신에 빠져 뻔히 보이는 변화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쪽이 질 것이다. 절박함이 덜한 쪽이 질 것이다. 누가 승자일까.      김성탁 논설위원

    2023.05.19 00:48

  • 민주당에 드리운 '이정근 노트' 먹구름 [김성탁의 시선]

    김성탁 논설위원 “거기 해야 돼, 오빠. (효과가 있든 없든) 오빠 호남은 해야 돼.” “관석이 형이 ‘의원들은 좀 줘야 되는 것 아니냐’ 나한테 그렇게 얘기하더라고.” “성만이 형이 좀 연결해줘서 그거 좀 나눠줬다, 그렇게 얘기를 했어 내가. (누구한테?) 영길이 형한테.” “‘형님 기왕 하는 김에 우리도 주세요’ 또 그래 가지고 거기서 세 개 뺏겼어.”    2021년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 '돈 봉투 의혹'과 관련해 이정근 전 민주당 사무부총장의 휴대전화 녹취 파일에 담긴 내용이다. 이 전 사무부총장이 윤관석 민주당 의원을 ‘오빠’라고 부른다. 다른 관계자들도 송영길 전 민주당 대표나 국회의원들을 ‘형’이라 칭하고, 의원들끼리 ‘형님’이란 표현을 쓴다. 대화만 보면 무슨 ‘패밀리’ 같다.   이정근 전 더불어민주당 사무부총장이 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중앙지검으로 출석하던 중 입장을 밝히고 있다. 뉴시스  어느 조직이든 오랜 친분을 맺은 이들끼리 사석에서 ‘형, 동생’ 하는 일은 낯선 게 아니다. 하지만 전당대회에서 표를 매수하려고 불법으로 돈을 모아 뿌렸다는 혐의로 수사받는 이들 사이에서 등장하는 건 차원이 다르다. 정당은 민주주의 국가 체계의 중요한 축이다. 그것도 대부분 공직자인 이들이 불법 행위를 모의하고 실행했다면 이런 패거리 문화도 한 요인이었을 것이다. 형이나 오빠를 위한 일이니 기꺼이 나서고, 동생이니 무슨 뒤탈이 없을 거라 여기며 나중에 자리를 나눠줬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이번 의혹은 이 전 사무부총장의 녹음파일에서 꼬투리가 잡혔다. 무려 3만여 개에 달한다니 또 어떤 인물과 의혹이 불거질지 알 수 없다. 민주당이 이런 지경인데 또 다른 시한폭탄이 던져졌다. 이른바 ‘이정근 노트’다. 이 전 사무부총장이 지난해 9월 구속되기 전 구술하고 지인이 받아쓴 A4 용지 5장 분량의 문건이라며 시사저널이 최근 보도했다.   ■  「 돈봉투 녹취록 파문 이은 악재   친문·친명계까지 연관된 의혹 쓰나미 앞에서 위기의식 없어  」     문건의 진위는 확인되지 않았다. 하지만 녹취파일이 송 전 대표의 전당대회 관련 의혹에 집중된 것과 달리 이 노트에 적혀 있다는 내용은 범위가 훨씬 넓다. 문건에는 ‘노무현’ ‘문재인’ ‘재수회(문재인을 재수시켜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한 모임)’ ‘이재명 7인회’ 등과 문재인 정부 고위직을 지낸 인사의 이름 등의 제목이 달렸다고 한다. 문건 사진을 보면 관계도를 그래픽 형태로 그려 놓기도 했다.    이 전 사무부총장은 사업가 박모씨로부터 청탁을 대가로 9억8000여만원을 받은 혐의로 1심에서 4년 6개월 중형을 선고받았다. 그런데 이 노트에는 추가로 금품 수수 혐의가 제기될 수 있는 인사들의 이름과 액수, 정황 등이 담겨있다는 것이다. 민주당 주변 등에선 이 문건에 10명 이하의 국회의원이 적시돼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문재인 정부 당시 청와대에서 근무한 인사나 이재명 대표의 측근 그룹 중에서도 거론되는 이들이 있다. ‘비명 그룹’에 속하는 다선 의원과 민주당 거물급 정치인의 이름도 회자하는 중이다.    의혹이 제기된 만큼 검찰 등이 수사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 이 전 사무부총장이 실제 구술한 내용이 맞는다면 확인에 나서는 게 수사기관의 책무다. 이런 파괴력 때문인지 법무부 장관을 지낸 박범계 민주당 의원은 라디오 방송에서 “녹취록 3만개보다도 이정근 노트가 사실은 가늠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만약 전체적으로 녹취록 등의 신빙성이, 증거능력이 인정되고 거기에 이정근 노트가 제시된다면 가늠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했다.    지금 제기되는 의혹은 대부분 민주당이 여당이던 시절 빚어졌다. 검찰 등 사정기관 인사를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권력을 쥔 때였다. 일련의 의혹이 수사와 재판을 거쳐 사실로 드러난다면 민주당은 국가 운영 권한을 줬더니 자신들의 배를 불렸느냐는 비판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특히 문재인 정부는 국정농단과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을 거쳐 집권했다. 윤석열 정부의 성과와 무관하게 도덕성을 상실한 민주당의 운명이 위태로운 상황이다.    쓰나미가 밀려올 것으로 예상되는데도 민주당은 위기의식이 없는 듯하다. 송 전 대표는 돈 봉투 의혹에 대해 모른다고만 하고, 당 지도부도 자체 진상 규명조차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이은주 정의당 원내대표는 민주당 내에 ‘악의 평범성’이 팽배해 있다고 비판했다. 소속 의원들에 대한 무더기 체포동의안이 오면 민주당은 또 부결시킬 것인가. 호남에서도 당 지지율이 빠지고 있는데 '정치 탄압'이라고 주장한다고 중도층이 동의해 줄 것 같은가. 과거 한나라당은 ‘차떼기당’ 오명을 벗으려고 허허벌판에 천막을 쳤다. 쓰나미 경보는 울렸는데 진솔한 고백이나 과감한 혁신조차 없이 민주당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                  김성탁 논설위원

    2023.04.28 01:09

  • ‘조선 제1혀’ 한동훈과 정치인의 길 [김성탁의 시선]

    김성탁 논설위원 요즘 한동훈 법무부 장관에 대한 표현이 화제다. “정말 말싸움 하나는 잘한다. 그런 능력이 저도 부럽다. 일부 언론이 ‘조선 제1검’이라고 평가하는데, 편파 수사를 해 그런 별칭은 붙일 수 없고 대신 오늘 말하는 걸 보면 ‘조선 제1혀’다.” 더불어민주당 김의겸 의원이 한 장관의 대정부질문 답변 태도 등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국회 법사위 전체회의에 출석해 의원들의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김성룡 기자  그러자 한 장관은 취재진과 만나 자신을 ‘조선 제1검’이라고 부른 건 민주당이라고 반박했다. 김 의원을 향해선 “덕담하셨으니 저도 덕담을 해드리자면, 거짓말이 끊기 어려우시면 좀 줄이시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응수했다.    민주당 박용진 의원은 ‘초등학생 논법’이란 표현을 썼다. “논리적으로 되든 안 되든, 초등학생들 말싸움하듯 유치한 논법을 계속 쓴다”고 공격했다. 한 장관은 이에 대해서도 “국회에선 잘못을 지적받으면 호통치고 고압적으로 말을 끊고선 끝나면 라디오로 달려가 욕하고 뒤풀이하는 게 민주당 의원들 유행인가 보다”고 맞받았다.    최근 국회 상임위나 대정부질문에선 야당 의원들과 한 장관의 언쟁이 단연 이목을 끈다. 이런 모습은 윤석열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꼽히는 한 장관의 인사청문회 때부터 시작됐다. 한 장관에게 화력을 집중하다 민주당 측이 '이모씨'를 이모로, 한국3M을 한 장관 딸로 오인하는 웃지 못할 장면까지 등장했다. 여권을 통틀어 '대야 화력' 면에서 한 장관을 따라갈 사람이 없다는 평가다.    윤 대통령과 국민의힘 지지층에서 한 장관에 대한 지지가 뜨겁다. 정부 출범 이후 여권의 텃밭인 대구 민심을 취재하면서 윤 대통령의 국정 운영에 대한 평가를 물은 적이 있다. 희한하게 “윤 대통령은 이미 대통령이 되지 않았느냐. 여기 관심은 온통 한동훈”이라는 반응이 꽤 많았다. 이들은 여소야대 국회에서 한 장관이 야당 의원을 상대하는 태도에 박수를 보냈다.   ■  「 야당 의원과 맞짱, 지지층 환호 원조 이낙연, 차분한 언변 주목   서민의 고단한 현실과 만나야 」   정부를 공격하는 야당 의원을 무력화하는 모습으로 지지층의 인기를 끌어낸 원조는 이낙연 전 국무총리다. 이 전 총리는 2018년 대정부질문 등에서 야당 의원의 말문을 닫게 해 ‘사이다 총리’로 불렸다. 당시 자유한국당 의원이 “청와대와 여당에도 쓴소리하고 야당 목소리에 귀 기울일 줄 아는 경륜을 보여달라”고 하자 이 전 총리는 “쓴소리는 비공개로 하고 있다”고 답했다.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핵을 포기할 거라 생각하느냐”는 야당 의원의 물음에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믿는다고 하지 않았느냐”고 되물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방북 때 북한 김정은 위원장과 벤츠 차량을 타고 카퍼레이드한 것이 대북제재 위반이란 지적에는 “거기 가서 그 차를 타지 않고 어떻게 했어야 하는지 말해 달라"고 했다. 당시 이 전 총리에게 “정부가 잘못한 게 맞다”는 답변을 받아내는 야당 의원은 주인공이 될 것이란 얘기까지 나왔었다.    하지만 이 전 총리와 한 장관의 야당 의원에 대한 태도에는 차이가 있다. 물론 이 전 총리는 20년 넘게 기자를 하고 5선 의원과 전남지사까지 지낸 베테랑 정치인이다. 검사만 하다 장관을 처음 하는 한 장관에게 그런 연륜을 기대하는 건 무리다. 그럼에도 이 전 총리는 공방 도중 화를 내지 않고 시종일관 저음을 유지했다. 국정 현황을 꿰고 있어 짧으면서도 핵심적인 답변을 내놓곤 했다.    반면 한 장관은 국회의원들의 질의 도중 의자 등받이에 털썩 기대거나 표정 등으로 거부감을 드러내는 경우가 잦다. 덩달아 언성이 높아지거나 “호통치지 마시라”고 대놓고 말하기도 한다.    정무직 공무원인 한 장관은 이미 정치인이다.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등판설이 끊이지 않는 한 장관은 최근 서울 송파병 이사설이 나오자 부인했다. 하지만 한 장관 스스로 총선 출마 의지를 보이고 본격적인 정치인의 길을 가봤으면 좋겠다. 장관 역할도 중요하지만, 윤석열 정부의 핵심 인사로서 정치의 본령을 경험했으면 한다. 그가 국회에서 접하는 의원들은 '민주주의의 꽃'인 선거를 거쳤다. 치열한 여야 경쟁 속에 민심을 마주하며 유권자가 국가의 주인임을 체득한 이들이다.    정치를 하겠다면 좋은 학벌과 권력이 큰 직업을 가졌던 이들일수록 서둘러 서민과 약자의 아픔이 깃든 현실 무대로 나가야 한다. 한 장관의 언어를 비꼬는 ‘편의점에 간 한동훈’ 만화가 회자하고 있다. 만화를 보며 상대방이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인 점에 눈길이 갔다. 실제 다음 손님 응대가 급하고 야간에도 근무해야 하는 MZ세대가 많다. 화려한 언변이 아니라 다양한 삶과 부대끼는 발걸음이어야 의미 있는 정치의 길이 보이지 않을까. 김성탁 논설위원

    2023.04.07 00:58

  • ‘주 69시간’ 논란이 알려주는 것 [김성탁의 시선]

    김성탁 논설위원 “‘5년만 버티면 된다’가 아니라 ‘1년만 버티면 된다’가 됐습니다.” 최근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주최 포럼에서 김진표 국회의장이 한 말이다. 대선이 5년마다 치러지니 패한 정당이나 지지자 사이에선 ‘버틴다’는 표현이 쓰이곤 했다. 그런데 여야 정치권이 요즘은 1년 가량 남은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저런 태도를 보인다는 것이다.    16일 국회에서 열린 근로시간 제도 개편 방향 토론회에 'MZ노조' 새로고침 노동자협의회 유준환 의장(왼쪽) 등이 참석해 있다. 연합뉴스  국민의힘이나 더불어민주당 모두 여론의 압도적 지지를 받아 총선에서 제1당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없는 상태인 것이 배경이라고 김 의장은 설명했다. 실제 여론조사에서 양대 정당의 지지율은 큰 차이가 없다. 여기에 지난 대선이 역대 최소 표차로 승부가 갈렸고 역대 최대 의석수 차이의 여소야대 국회인 상황이 더해져 있다. 여야가 죽기 살기로 싸우는 모습을 보게 되는 이유다.    예비후보자 등록 시작이 9개월도 안 남을 정도로 총선이 다가왔음을 실감한 건 ‘주 69시간 근무’ 논란에 대한 윤석열 대통령의 신속한 대응을 보면서다. 어제 윤 대통령이 한·일 정상회담을 위해 일본으로 출국하기 직전 대통령실 안상훈 사회수석이 현안브리핑에 나섰다. 그는 “연장 근로를 하더라도 주 60시간 이상은 무리”라는 윤 대통령의 입장을 전했다. 방일이라는 대형 이슈 속에서도 노동시간 개편안 보완 입장을 전하느라 애를 쓴 것이다.   ■  「 여야 "1년만 버티자" 분위기 MZ, 과거사보다 69시간 민감 유권자가 심판할 총선 임박   」     윤 대통령은 근무시간 유연화를 노동개혁 국정과제 중에서도 우선 순위에 뒀었다. 대통령실이 앞장서 신속히 재검토를 밝힌 것은 ‘MZ 세대’ 표심의 이탈을 막는 게 시급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지난 대선에선 세대별 지지 구도가 깨졌다. 과거 60대 이상은 보수 정당 지지세가 뚜렷한 반면 20~30대는 진보 정당 지지 경향이 강했었다. 하지만 지난 대선 출구조사에 따르면 MZ 세대 남성은 윤 대통령에게 많은 표를 줬다. 고령화로 60세 이상 유권자가 전체의 30%가량을 차지하고 투표율도 높긴 하지만, 40~50대에서 진보 성향이 더 높다는 걸 고려하면 젊은 세대의 표를 확보하지 못하고선 여권이 총선 승리를 기대하기 어렵다.    여론조사에서도 MZ 세대는 윤 대통령의 강제징용 보상 해법인 ‘제3자 변제’보다 노동시간 개편안에 더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한국갤럽의 지난 8~9일 1002명 조사에서 윤 대통령의 국정운영 지지율은 20대에서 19%, 30대에서 13%에 그쳐 다른 연령대보다 낮았다. 특히 전체 지지율은 2%포인트 떨어졌지만 20대는 5%포인트, 30대는 10%포인트나 하락했다. 이와 달리 제3자 변제 방안에 대해선 20대의 30%가 찬성 입장을 보였다. 젊은 세대에게 강제징용 이슈보다 주 69시간제 파급력이 크다고 볼 수 있다(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 참고).     내년 총선에서 과반을 못 얻으면 레임덕이 올 것(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란 전망이 나오는 여권만 급한 게 아니다. 대선과 지방선거에서 패하고 이재명 당 대표의 사법리스크에다 내분까지 겪는 민주당도 총선에 존망이 달려있다. 민주당은 주 69시간제 개편을 비판하면서 이 대표부터 청년층을 만나며 이슈화하려던 참이다. 근로시간 개편은 법 개정 사안이라 과반 의석을 가진 민주당의 동의 없이는 국회 통과가 어렵다. 정부의 보완책을 봐야겠지만, 민감한 MZ 세대 표심을 놓고 여야의 치열한 수 싸움이 예상된다.    정부·여당은 이참에 엉성한 국정과제 추진 체계를 이대로 두고선 민심의 지지를 얻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대선 때 윤 대통령은 “게임 하나 개발하려면 한 주에 52시간이 아니라 120시간이라도 일하고 이후 마음껏 쉴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가 논란을 낳았었다. 이번에 발표된 개편안도 ‘120시간’은 아니지만 필요할 때 연장 근무를 더 하고 원할 때 푹 쉴 수 있다는 논리가 바탕이었다. 하지만 고용노동부가 전문가들로만 꾸린 연구회가 내놓은 안은 여러 설명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연차를 다 못 쓰는데 가능하겠느냐”는 단순한 질문을 풀어내지 못했다. 문제가 터진 뒤에야 한덕수 국무총리가 고용노동부 장관 등을 질타했다는데, 정부가 입법예고까지 한 법안에 대해 대통령실이나 관련 부처, 여당 어디에서도 사전에 예상되는 문제를 걸러내지 못한 게 여권의 현 주소다.     주 69시간제 논란은 선거의 계절이 다가왔으며, 정치인들이 유권자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성별로도 지지 성향이 갈리고 이해가 걸린 사안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MZ 세대는 선거의 뚜렷한 변수로 부상했다. 대화와 양보에 관심 없고 진영별 강경론에 빠진 여야가 앞으로 다양한 이슈에서 어떤 생존법을 찾아낼지 지켜보고 평가할 일이다. 김성탁 논설위원

    2023.03.17 00:56

  • ‘윤 사단’ 검사들, 50억 클럽 수사 언제 하나 [김성탁의 시선]

    김성탁 논설위원 “과거 어떤 사건 수사할 때는 박수 치시고 잘하고 있다고 하시던 분들이 이젠 ‘정치 검찰’이라 하시니 마음이 안 좋습니다.” 김용 전 민주연구원 부원장의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와 관련한 압수수색을 위해 지난해 10월 민주당사에서 의원들과 대치하던 한 검사의 말이다. 이 검사는 윤석열 대통령이 수사팀장을 맡은 2016년 국정농단 사건 특검팀의 일원이었다. 한때 자신들을 ‘정의로운 검사’로 치켜세우던 민주당 의원들의 달라진 태도를 원망하는 반응이었다.   곽상도 전 국민의힘 의원이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뇌물) 등 혐의 관련 1심 선고공판을 마치고 취재진의 질문을 받고 있다. 뉴스1  한동훈 법무부 장관도 비슷한 말을 했다.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민주당 의원이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에 강한 적개심을 갖고 있다”고 하자 한 장관은 “제 검사 인생의 화양연화(인생에서 가장 찬란한 시절)는 문재인 정권 초반기 (박근혜 정부 관련) 수사들일 것”이라고 답했다. 이어 “당시에 저를 굉장히 응원하고 지지해 준 것으로 기억한다”며 “전 그때와 달라진 게 없다”고 밝혔다.    민주당이 한때 이른바 ‘윤석열 사단’ 검사들을 응원했던 게 사실이다. 최순실 국정농단 특검이 대표적이고 이후 윤 대통령은 검찰총장까지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윤 대통령이 검찰총장 시절 조국 전 법무부 장관 등 정부 핵심 인사들을 수사하고,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에 반대하면서 사이가 틀어졌다. 이후 윤 대통령은 국민의힘 후보로 대선에서 승리했고, 한직으로 쫓겨났던 측근 검사들도 정부와 검찰 요직에 포진했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에 대한 수사가 장기간 진행 중이라 이제 양측은 사사건건 갈등하고 있다.     ■  「 과거 '살아있는 권력' 수사 평가 박영수 등 '검찰식구' 수사 부진 '윤 정부 검사'로 남는 일 없어야   」   위례·대장동 개발 비리 의혹 관련해 검찰이 구속영장을 청구하자 이 대표는 “대선에서 패배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라고 반발했다. 한 장관은 “대선에서 이겼으면 권력을 동원해 사건을 못하게 뭉갰을 것이란 말로 들린다”고 맞받았다. 이 대표가 대선 승자였다면 수사가 지금 같은 속도와 규모로 진행되기 어려웠을 거라는 데 동의한다. 문 정부에서 관련 수사가 지지부진했고, 인사권을 통한 검찰 장악이 역대 정권에서 반복돼 오지 않았나. 이 대표와 민주당이 반발하더라도 제기된 의혹에 대한 수사는 피할 수 없고, 법정에서 판가름나게 돼 있다.    제1야당 대표와 관련된 여러 건의 수사는 윤석열 사단 검사들이 주도하고 있다. 주로 특수통인 이들을 이끌었던 윤 대통령은 ‘살아있는 권력’을 수사한 이력이 있다. 2003~2004년 노무현·이회창 캠프의 불법 대선 자금을 파헤쳤다. 2013년 당시엔 청와대가 원치 않던 ‘국정원 댓글 사건’을 수사했다. 국회 법사위 국감에서 상관인 서울중앙지검장의 ‘외압’이 있었다고 폭로했다가 징계를 받고 좌천됐었다. 윤 대통령과 측근 검사들에 대해선 진영에 따라 평가가 엇갈리지만, 이런 전력은 집권의 밑거름이었을 것이다.    검찰의 역할에 충실해 왔다고 강조하는 현 정부 요직 검사들에게는 이제 다른 숙제가 주어지고 있다. 대장동 의혹 관련 이른바 ‘50억 클럽’ 수사다. 이 의혹에는 김수남 전 검찰총장, 박영수 전 국정농단 특검, 곽상도·최재경 전 민정수석, 권순일 전 대법관 등 검찰과 사법부 고위직을 지낸 인사들이 등장한다. 윤 대통령과 측근 검사들이 과거 수사를 같이했거나, 친밀한 관계였던 이들이 많다. 최근 곽 전 의원에 대한 1심 무죄 판결에 비난이 쇄도하면서 검찰이 제대로 수사하지 않았다는 지적이 쏟아졌다.    JTBC가 최근 공개한 김만배씨 등의 육성에는 “곽상도는 고문료로는 안 되지” “다른 사람보다 아들한테”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50억 클럽으로 거론된 인사들의 이름을 일일이 거명하며 50억씩 줄 때 총액을 계산하는 육성도 있다. 사정이 이런데도 검찰이 이들을 어떻게 수사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지 않는다. 이 대표나 기업 관련 사건에선 압수수색 소식이 줄을 잇는데, 누가 들어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내용이 보도돼도 이들과 관련해선 어떤 수사가 진행되고 있는지 감감무소식이다.    살아있는 권력에 도전했던 검사들이라면 검찰 출신, 더욱이 인연이 있는 인사들에 대해선 더욱 엄밀한 잣대를 들이대야 한다. 윤 대통령은 과거 국회에서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고 했다. 지금은 국정 최고책임자 자리에 있다. 민주당사 압수수색에 나섰던 검사는 “과거 당사 압수수색이 무산된 적도 많다”는 주장에 “저희는 안 그러고 싶다. 선배들과는 다르고 싶다”고 대답했다. 현 정부 실세 검사들이 이 의혹의 실체를 밝히지 못한다면 그들이 비판하는 선배들처럼 ‘윤석열 정부에서 임명된 검사’로 기억될 것이다. 50억 클럽 관련해선 이미 특검법이 발의돼 있다. 김성탁 논설위원

    2023.02.24 00:54

  • MZ 다음 알파세대, 그들 세상은 행복할까 [김성탁의 시선]

     ━  '내가 주인공' 초등학생 세대   김성탁 논설위원 최근 출근길 라디오에서 새로운 세대 얘기를 들었다. MZ세대에 이은 알파(α)세대다. 1980~90년대 태어나 30~40대가 된 MZ세대의 자녀로, 요약하면 지금 초등학생들이다. 1970년대생 X세대에 이은 YZ세대를 '밀레니얼'의 영문 앞글자를 따 MZ세대로 불렀다. 알파벳이 끝났으니 처음으로 돌아갔는데, 새로운 출현을 강조하기 위해 알파를 쓴다고 한다.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학원가 모습. 연합뉴스  소비자 트렌드 전문가인 전미영 박사가 알파세대에 대해 들려준 내용은 흥미로웠다. 예전엔 전교 1등이면 스포츠를 못해도 친구들 사이에서 인정을 받았고 ‘엄친아’ 때문에 스트레스도 받곤 했지만, 알파세대는 자신을 주인공이라 여긴다고 한다. 모든 것을 잘하는 대신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설명이었다.    이 세대가 꼽는 ‘최고의 하루’도 이색적이다. 하교 후 친구들과 천원 샵 형태의 매장에서 소소한 구매를 하고 네 컷 사진을 찍은 뒤 마라탕으로 저녁을 먹고 버블티를 마시며 대화하는 것이다. 전 박사는 MZ세대 부모가 과거와 다른 교육도 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기존 국·영·수 위주 사교육 외에 코딩을 가르치고 특히 경제 교육에 신경을 쓴다는 것이다. 용돈을 준 뒤 가족 식사에서 더치페이를 하도록 하면서 돈에 대한 관념을 심어준다는 사례가 소개됐다.    간신히 X세대 분류에 걸쳤으면서 스스로 X세대의 특징을 가졌는지 확신하지 못한 세대로서, 새 세대의 등장이 반갑고 신기했다. 하지만 이내 그들이 사는 세상은 과연 행복할 것인지 의문이 생겼다. 알파세대의 선두가 막 중1에 입학한다는 대목에서부터 가슴이 답답해졌다.    ━  사교육, 집값…여건은 그대로    지역별 사정이 달랐을 수 있지만 X세대에겐 중학교 때부터 매일 학원에 다니던 기억은 많지 않다. 고교 평준화가 실시되고 본고사는 사라진 시대였다. 대입 학력고사가 암기 위주여서 창의성을 떨어뜨린다는 우려 속에 대학수학능력시험이 도입된 이후 사교육 시장은 팽창했다. 요즘 중학생들의 방과 후 일상은 대개 학원 가기일 것이다. 교육 당국이 무슨 말을 하든, 중학교 때 수학·과학 등 어려운 과목의 선행을 해 놓지 않으면 고교 내신 점수 따기가 힘들다고 학부모들은 여긴다.    알파세대가 이르면 중학교부터 시작되는 한국의 입시 전선에 발을 들여놓고도 네 컷 사진과 버블티 수다를 즐기는 ‘소확행’을 만끽할 수 있을까. 고등학생이 되면 수시와 정시로 나뉜 대입을 준비하려고 내신은 물론 수행평가 발표도 신경 써야 한다. 상대평가인 내신 경쟁은 치열하고 수능 준비 역시 빼놓을 수 없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은 학기 중엔 과목별 내신 학원을 돌고, 방학이면 수능 맞춤형 특강으로 바쁘다.    알파의 부모인 MZ의 생각이 이전 세대와 다르다면 변화가 올 수도 있을 것이다. MZ는 이런 대입 경쟁을 지나 취업 전쟁도 치른 세대다. 대기업 정규직 취업자라면 형편이 낫겠지만, 대다수는 맞벌이해도 남는 게 별로 없음을 경험 중일 것이다. MZ세대 중엔 집값 폭등에 불안해하다 ‘영끌’ 매수로 고금리 이자를 걱정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부동산은 꿈도 꿀 수 없어 코인과 주식에 투자했다가 손실이 언제 메꿔질지 한탄하는 경우도 많다.    양극화 속 계층 이동 사다리가 얼마나 오르기 어려운지 아는 이들이 자녀를 사교육에서 해방시키고 잘하고 좋아하는 것에 도전하라고 권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들이 강조하는 경제 교육 역시 자산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녀가 성인이 됐을 때 집값·전셋값을 마련하려면 수입을 잘 관리하고 투자하는 법을 일찍 알려줘야 해선 아닐까.    ━  기성세대가 시스템 바꿔줘야    알파세대가 사는 세상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하지만 우리 사회 시스템이 이대로라면 그렇지 못할 것 같아 걱정이다. 1타 강사들이 소유한 건물이 즐비한 서울 대치동이나 비슷한 각 지역 학원가에 모든 학생을 몰리게 하는 학교 교육과 대입 제도가 그대로라면. 학벌에 따라 취업의 질이 달라지고 대기업 정규직이 아닐 경우 임금과 처우가 열악하다면. 지방에 일자리가 없어 수도권에 살아야 하는데 거주 비용을 감당하기 힘들다면….    초기 X세대가 대입을 치르던 때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는 영화가 화제였다. 30년가량 지난 지금은 ‘반드시 성적순으로 행복한 건 아니다’ 정도 되지 않았을까 싶다. TV 프로그램에서 한국에 수학여행을 온 미국 10대들은 문화와 음식이 훌륭하고 정을 느꼈다고 좋아했다. 그러면서도 한 학생은 “한국 사람들이 일을 조금 덜 하면 좋겠다. 건강과 행복을 희생하는 것 같다”고 했다. 기성세대가 지금 할 일을 해야 아이들이 행복해질 수 있다. 베타(β)세대부터라도. 김성탁 논설위원

    2023.02.03 00:57

  • [김성탁의 시선] '하루이틀삼일사흘’ '하드캐리하길'

     ━  사흘이 4일? 또 번진 문해력 논란   김성탁 논설위원 ‘난 안 심심한데. 진심이라면서 '심심한 사과'라니….” 몇 달 전 마음이 간절하다는 표현을 지루하다는 단어와 헷갈린 이들이 많아 문해력 논란이 일었었다. 2020년엔 광복절이 토요일이어서 다음 월요일이 임시공휴일로 지정됐는데 ‘사흘 황금연휴’ 보도가 나가자 ‘3일인데 왜 4일로 계산하느냐’는 반론이 나왔다. 이런 일이 있었으니 사흘의 뜻은 전파됐을 줄 알았다. 하지만 최근 래퍼 노엘이 발표한 노래 가사 때문에 논란이 재점화했다. SNS에 공개된 가사에 ‘하루이틀삼일사흘’이란 표현이 담겼다. 실수일 수 있지만 사흘을 ‘4일’로 혼동한 게 아니냐는 반응이다.   사진 노엘 인스타그램  한자 교육이 급감하고 독서량이 줄면서 문해력 비상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학교 안내문에 ‘중식 제공’이라고 적자 젊은 학부모가 ‘우리 아이는 한식을 좋아한다’고 항의했다거나, 도서관 사서 선생님에게 반납하라는 문구를 보고 책을 사서 보냈다는 경우까지 전해졌다. ‘골이 따분한(고리타분한) 성격’처럼 잘못 쓰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이에 윤석열 대통령도 문해력 강화를 강조하고, 한자를 쓸지는 모르더라도 의미는 가르치자는 제언 등이 쏟아졌다.    하지만 요즘 의사소통에 쓰이는 말 가운데 무슨 뜻인지 헷갈리는 현상은 젊은 세대에서만 나타나는 건 아니다. 그룹 방탄소년단(BTS)의 맏형 진이 지난해 말 입대하면서 팬 커뮤니티에 ‘자, 이제 커튼콜 시간이다’는 문구를 올렸다. 커튼콜은 공연 후 출연진이 관객의 박수에 답해 다시 무대로 나오는 것을 뜻한다. 무슨 의미인지 알기 어려웠는데, 진이 ‘게임 캐릭터 진의 대사’라고 힌트를 남겼다. 찾아보니 온라인게임 캐릭터 진이 ‘공격 모드’에 쓰는 표현이었다.        ━   게임용어 낯선 기성세대들 당황    온라인 게임에 익숙한 세대가 일상에서 쓰는 생소한 표현은 이 밖에도 많다. ‘내가 하드캐리 할 테니 나를 믿고 따라와’에 등장하는 하드캐리는 팀워크가 중요한 게임에서 승리로 이끄는 역할을 한 플레이어나 행위를 가리킨다. 게임 캐릭터의 능력치를 순간적으로 올리는 스킬을 ‘버프’라고 하는데 ‘오늘 점심시간에 버프 받고 일했다’는 식으로 쓰인다고 한다. 중장년 세대에겐 대개 해석 불가다.          카타르 월드컵 16강에 진출한 대한민국 축구대표팀 선수들이 태극기에 적어 열풍을 일으킨 ‘중꺾마’(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 표현도 유래는 게임 관련이었다. ‘롤드컵’으로 불리는 리그오브레전드 2022 월드컵 챔피언십에서 우승한 프로게이머가 1라운드 패배 후 인터뷰에서 “저희끼리만 안 무너지면 이길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하자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는 제목이 달렸다고 한다.    문해력이 떨어지면 사회의 지적 기반이 허약해 지고, 학습 역량 저하 등 여러 문제를 일으킨다. 급속한 디지털화가 진행된 한국에서 문해력 저하는 젊은 세대와 기성세대 모두에게 문제다. 소통에 차질이 생겨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기 어려워질 뿐 아니라 무엇이 사실인지 판단이 힘들어지고 가짜 정보와 가짜 뉴스 구별에 구멍이 난다.    정치적 진영 논리가 팽배한 국내 상황에선 확증 편향에 쉽게 빠지는 현상도 뚜렷하다. 사회적 갈등의 접점을 찾기 어렵고, 다른 의견을 가진 이들에 대한 공격이 디지털 공간에 난무한다. 이런데도 좋은 학벌에 화려한 경력을 지녀 문해력 부족과는 거리가 멀 것 같은 정치인들마저 소통의 문을 닫은 채 상대를 밟고 넘어야 할 대상으로 여기고 있다.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직 사의를 표명한 나경원 전 국민의힘 의원이 11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국민의힘 중앙당사에서 열린 2023 서울시당 신년인사회에서 김기현 의원과 인사하고 있다. [공동취재단]  ━   해석 난감한 정치지도자들 언행    한자어나 게임 용어가 아닌데도 정치 주역들이 쏟아내는 언어는 해석하기 쉽지 않다. 윤 대통령은 “당무에 ‘이래라저래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었다. 하지만 국민의힘 당 대표 선출을 앞둔 ‘윤심’ 논란 속에 저출산고령사회위 부위원장인 나경원 전 의원과 대통령실이 보여주는 양상은 국민의 문해력을 시험한다. 나 전 의원은 사의를 보냈다는데 대통령실은 “들은 바 없다”고 했다. 친윤 측의 난타전에 이어 이제는 나 전 의원에 대한 애정이 커 사의를 수용할 뜻이 없다는 보도가 전해진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대선후보 시절 국회의원 불체포·면책 특권 폐지를 공약했다. 하지만 어제 회견에선 “경찰이 적법하게 권한을 행사하면 수용하겠지만, 경찰복을 입고 강도 행각을 벌인다면 판단은 다를 수 있다”고 말했다.    새 정부 출범 이후 8개월이 넘도록 윤 대통령과 제1야당 지도부는 만난 적이 없다. 올 신년인사회 때도 이 대표가 불참했는데, 정부가 e메일로 초대했다는 신경전만 시끄러웠다. 요새 표현대로 주문해본다. 하루이틀삼일사흘 ‘커튼콜 시간’이라며 서로 공격만 할 게 아니라 중꺾마 정신으로 대화를 하드캐리해달라. 김성탁 논설위원

    2023.01.13 00:52

  • [김성탁의 시선] 민주당에는 왜 '유승민'이 없나

     ━  '친윤' 주도 전대룰 논란 거세지만      ━  '반윤' 유승민, 중도층 묶는 효과도   김성탁 논설위원 최근 여러 여론조사 기관이 추가해 조사하는 항목이 있다. 국민의힘 차기 당 대표로 누가 적합하다고 보느냐는 질문이다. 정권 교체 후 내분을 겪은 여당이 비상대책위 체제를 끝내고 내후년 4월 총선을 이끌 대표를 뽑는다니 관심이 쏠리는 게 당연하다.   유승민 전 국민의힘 의원. 뉴스1  하지만 세간의 이목을 더 끄는 건 전당대회 룰 싸움이다. 당원 투표 70%와 일반 국민 여론조사 30%로 뽑던 방식을 당 지도부가 당원 투표 100%로 바꿨다. 가장 강하게 반발하는 이가 유승민 전 의원이다. “대통령 명령에 따라 유승민 하나를 죽이기 위한 폭거” 같은 거친 언사를 쏟아냈다. “공천권 때문에 도살해도 가만히 있다”면서 다른 의원들을 영화 ‘양들의 침묵’에 빗대기까지 했다.    여론조사를 보면 특이한 점이 있긴 하다. 뉴시스가 국민리서치그룹·에이스리서치에 의뢰해 지난 17~19일 1001명을 조사한 데 따르면, 차기 국민의힘 대표 적합도는 유승민 36.9%, 나경원 14%, 안철수 11.7%, 주호영 5.7%, 김기현 5.6% 등의 순이었다. 이와 달리 국민의힘 지지자만 놓고 보면 나경원 26.5%, 안철수 15.3%, 유승민 13.6%, 김기현 10.3% 등으로 순위가 바뀐다. 민심과 당심에 차이가 있다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다.    그렇지만 ‘친윤’ 인사들이 강조하듯 유 전 의원이 더불어민주당 지지층 등 '역선택성' 지지만 받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지지 정당이 없다고 밝힌 무당층에서도 41.2%를 얻어 2위인 안 의원(13.9%) 등을 크게 앞섰다. 또 정치 성향이 중도라고 밝힌 이들 중에서도 43.1%의 지지를 받아 타 후보를 압도했다. 유 전 의원이 “룰 개정은 수도권 선거를 포기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배경이다.    유 전 의원은 윤 대통령의 국정 수행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층(63.6%)에서 특히 지지가 높았다. 국정 수행 긍정 평가자는 나경원 27.6%, 안철수 17.9%, 김기현 11.9% 순이었다. 대선처럼 국회의원 선거는 당 지지층만 갖고 치를 수 없는데, 적어도 유 전 의원이 현 정부에 실망한 이들의 마음을 일정 수준 얻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와중에 거대 야당인 민주당의 지지율은 여당에 우세를 보이지 않고 있다. 한국갤럽이 19~20일 조사한 정당 지지도는 국민의힘 39.4%, 민주당 38.2%였지만, 서울에서는 오차범위 밖에서 국민의힘보다 낮다. 검찰이 이재명 대표에게 소환 통보를 하는 등 사법 리스크가 커져 가는 상황에서 여론의 지지는 야당으로 기울지 않고 있다.(자세한 여론조사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 참고)    노조에 대한 원칙적 대응 등으로 지지율이 오르고는 있지만, 윤석열 정부의 인사 등에서는 과거 회귀적 양상이 보인다. 최근 임명된 김광동 제2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장은 제주 4·3 사건과 5·18 광주민주화운동 폄훼 발언으로 논란을 낳았다. 이른바 ‘밀정 의혹’으로 사퇴 요구를 받은 김순호 행정안전부 경찰국 초대 국장이 6개월 만에 경찰청장 다음으로 높은 치안정감에 승진했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에 대한 막말도 여권에서 잇따랐다. 여권에 비판적인 이들이 민주당보다 여당 내부에서 "도로 한나라당은 안 된다”고 외치는 ‘반윤’ ‘비윤’을 주목하는지 모른다.  ━   혁신·이견 없는 민주, 고착 상태로    정당 내부 스펙트럼도 민주당보다 국민의힘이 더 다양해 보인다. 과거 김대중 정부 시절 ‘DJP 연합’으로 집권했듯 민주당 계열은 진보와 보수가 어우러진 때가 있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와 문재인 정부를 거치면서 ‘친노’ ‘친문’ 일색의 분위기가 강해졌다. 지난 대선을 거치면서는 ‘친명’을 빼면 민주당 내 정치인 중 뚜렷한 차별성을 찾기가 쉽지 않다. 일부 의원들이 이 대표의 사법 리스크에 대한 대처 등을 두고 다른 목소리를 가끔 낼 뿐이다.    대선과 지방선거 패배를 연이어 겪고도 민주당에서 뼈를 깎는 혁신의 움직임은 두드러지지 않았다. 그 결과 갤럽의 장래 정치 지도자 선호도 조사에서 민주당에선 이재명, 이낙연 두 명만 후보로 올랐다. 여권에선 한동훈, 홍준표, 유승민, 안철수, 오세훈, 원희룡, 이준석 등 7명이 포진했다.     예산안 대치 와중에 민주당은 법인세 인하를 놓고 자당 소속이었던 김진표 국회의장의 첫 번째 중재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권의 실책을 기다려봐야 유권자의 지지가 돌아온다는 보장이 없다. 지금이라도 과거처럼 보수까지 아우르려는 확장성을 추구해야 한다. 당 주류와 이견을 노출하며 야당의 역할과 책임, 정책 방향에 목청을 높이는 이가 왜 많지 않은가. 민주당에는 왜 ‘유승민’이 없나. 김성탁 논설위원

    2022.12.23 00:50

  • [김성탁의 시선] 여야만 바뀐 데칼코마니 대립

    김성탁 논설위원 “민생이 어려울 때 야당이 전혀 책임지지 않는 자세,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모습은 굉장히 국민에게 염치없고 무책임하다.” 이듬해 예산안 처리와 관련한 정치인의 발언이다. 누구일까. 윤석열 정부의 첫 예산안을 처리할 법정 기한이 도래했는데, 여당인 국민의힘과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이 충돌하고 있다. 그러니 현 여권에서 나왔을 법하다.   1일 국회에서 열린 행정안전위원회에서 의사진행 발언 허용 문제로 여야 의원들이 언쟁을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하지만 해당 발언은 2017년 12월 7일 문재인 정부의 첫 예산안이 국회를 통과한 직후 여당이던 민주당 추미애 대표가 했다. 당시 야당인 자유한국당은 이 예산안에 반대하며 표결에 불참했다. 여당이 국민의당과 손잡고 법정 처리 시한을 나흘 넘겨 처리했다. 민주당은 야당을 비난하고, 한국당은 ‘밀실 야합 예산 심판’ 피켓을 들고 여당을 성토하다 본회의장을 나왔었다.    “정권의 사냥개가 광견병까지 걸려 정권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닥치는 대로 물어뜯기 시작했다. 미친개는 몽둥이가 약이다.” 사법기관의 수사와 관련해 거칠게 비난하는 이 발언은 누가 했을까. 이재명 민주당 대표 주변과 문재인 정부 당시 사건 등에 대한 수사가 집중되고 있으니 현 야당인 민주당에서 나왔을 것 같겠지만 아니다.    2018년 3월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 등이 김포로 가는 항공기를 탑승하는 과정에서 보안 검색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며, 울산 경찰이 울산공항 직원들에 대해 수사에 나선 적이 있다. 문재인 정부의 이른바 ‘적폐 청산’이 진행되던 시기였는데, 장제원 당시 한국당 수석대변인이 ‘야당 탄압’이라며 반발한 내용이다.   ■  「 민주 여당 때 "민생 예산에 반대" 국힘 야당 때 "정권 사냥개 수사" 서로 입장 알 테니 타협 보여달라 」   정치권에서 자신들의 입장이 옳다면서 상대 정당을 비난하는 일은 다반사다. 그런데 여야가 바뀌면 언제 그랬냐는 듯 입장을 뒤집는 경우가 속출한다. 사안별로 대립하는 양상을 살펴보면 여당일 때와 야당일 때 서로를 대하는 태도가 마치 ‘데칼코마니’ 같다. 입장을 뒤집어 서로를 비판하는 논리나 표현조차 별로 다르지 않다.    경제 위기 경고음이 요란한데도 내년도 예산안 처리를 두고 여야 충돌이 이어지고 있다. 김진표 국회의장 주재로 어제 국민의힘과 민주당 원내대표가 회동했지만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예산결산위원회 양당 간사들이 견해차를 좁히고 '윤석열표'와 '이재명표' 예산의 규모 조정에 합의해야 법정 기한인 2일 처리가 가능하다. 정권교체 이후 첫 예산안을 두고 대립하는 양당은 과거를 돌아봤으면 한다.    민주당은 여당으로서 2020년도 예산안을 다룰 당시 단독 과반 의석을 갖고 있지 않았다. 당시 야당인 한국당이 예결위 예산 심사를 방해했다며 ‘국정 발목잡기’라고 비난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국가 예산은 경제와 국민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경기 회복에 속도를 높이기 위해서라도 신속한 예산안 처리에 국회가 힘을 모아달라”고 요청했었다. 윤 대통령이 국회에 신속한 예산안 처리를 당부한 취지도 이와 차이가 없다. 불과 얼마 전까지 국정의 책임을 지는 여당을 해봤으면서 거대 야당이 됐다고 힘만 과시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여권을 견제하더라도 관련 예산안을 통과시켜 새 정부가 일은 하게 해줘야 할 것 아닌가.    여당이 된 국민의힘은 과거 적폐청산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수사를 겪으며 극렬 반발했던 기억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과거 자신들이라면, 대선 후보였던 당 대표를 겨냥한 수사가 집중되고 있는데도 아무 일 없다는 듯 여권의 국정 운영에 순순히 협조했겠나. 진행되는 수사와 별개로 야당을 대화의 장으로 끌어들이려는 접촉을 강화하고, 예산안 역시 양보할 것과 지킬 것을 주고받는 전략도 선제적으로 펴야할 것 아닌가. 여소야대가 현실인데, 여권마저 강 대 강 대립을 하겠다면 돌파구를 찾기 어렵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에 대한 해임건의안 처리를 둘러싸고 여야가 갈등하고 있지만, 정치권이 예산안 합의를 마냥 미루기는 어렵다. 2024년 4월 22대 총선이 치러지기 때문이다. 여야를 불문하고 지역구 의원들은 내년도 예산에 관심이 클 것이다. 의원들은 지역구 관련 예산을 최대한 많이 끼워 넣어 치적이라고 광고해 왔다.     이번 대립 와중에도 결국 예산 심사는 예결위원장과 여야 간사만 참여하는 ‘소(小)소위’로 넘어갔다. 속기록도 없는 ‘밀실 심사’에서 민원성 ‘쪽지 예산’이 속출할 가능성이 크다. 싸우면서도 잇속 챙기기엔 한 몸일 것이다. 민주화 이후 여러 차례 정권 교체를 거치면서 거대 정당들은 여야를 모두 경험했다. 어떤 입장인지 서로 잘 알 테니 이제 적절한 협상과 타협의 선을 보여줄 때도 되지 않았나.  김성탁 논설위원

    2022.12.02 01:30

  • [김성탁의 시선] 진짜 웃기고 있다

    김성탁 논설위원 “장관 강령에 의회를 잘못 이끌면 사의를 표하게 돼 있는데, 본인에게도 적용되나.”(키어 스타머 영국 노동당 대표) “물론이다. 하지만 수사에 대한 질문이라면 답할 수 없다. 당신이 변호사라 잘 알지 않느냐.”(보리스 존슨 전 영국 총리)  “인정한 것 같다. 파티가 없었다고 말했으니 사임할 건가.”(스타머) “아니다. 노동당의 문제는 당 대표가 리더가 아니라 변호사라는 점이다.”(존슨)  “거짓말쟁이 리더보다 변호사가 이끄는 당이 낫다.”(로이드 러셀-모일 노동당 의원)   국회 운영위원회의 대통령실에 대한 국정감사가 8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렸다. 사진 이데일리  정치는 말로 하는 경쟁이다. 의회 정치가 시작된 영국도 그렇다. 매주 수요일 하원에서 열리는 ‘총리 현안 질의’(PMQ)가 생중계된다. 지난 1월 야당인 노동당 대표는 방역 수칙을 어기고 파티를 연 존슨 당시 총리를 몰아세웠다. 나중에 사임했지만, 존슨이 물러서지 않으면서 회의장은 시끌벅적했다. 발언이 나올 때마다 여야 의원들이 동의한다며 ‘hear’라고 소리쳐서다. 매주 공방이 불을 뿜지만 여야 의석 중간에 넘어서는 안 되는 붉은 선이 그려져 있다. 영국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토론장 모습이다.    이태원 참사 이후 국회에서 진상 규명을 위한 질의가 이어지고 있다. 현안 질의 등에서 공직자들에 대한 비판이 쏟아진다. 그런데 대통령실에 대한 국회 운영위 감사에서 김은혜 홍보수석이 ‘웃기고 있네’라고 적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강승규 시민사회수석과 사담을 나누다 적었다며 사과했지만, 150명 넘게 숨진 참사를 다루는 자리에서 나와선 안 될 표현이었다. 다른 공직자들도 웃는 듯한 모습을 보여 지적을 받았다니 국정 최고 책임기관에 있는 이들의 참사를 대하는 태도로 부적절했다. 이런 장면이 정말 국민을 웃기고 있다.   ■  「 이태원 질의 때 두 수석 부적절 행동 의원 자질도 문제지만 국회 무시 곤란 싸우더라도 해법 찾는 정치 복원해야 」     국회에서 의원들의 질의에 공직자들이 반론 제기를 넘어 반발하거나 비아냥대는 모습을 보는 게 낯설지 않다. 이렇게 된 데에는 의원들의 질의나 의혹 제기 수준이 떨어진 것이 한 원인이다. 이태원 참사 질의에서 일부 야당 의원은 여당 의원보다도 준비를 해오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거대 민주당보다 비례대표 한 명뿐인 기본소득당 의원이 참사 당일 용산구청장의 경북 사적 방문 의혹을 자료로 제시해 눈길을 끌었다.    김의겸 민주당 의원이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법무부 장관의 ‘청담동 술자리’ 의혹을 제기한 것도 함량 미달 사례다. 의혹이 있다면 장소나 정황 증거를 파악하는 등 최대한 검증 과정을 거쳤어야 할 텐데 제보라며 툭 던졌다. 한 장관은 “제가 직을 포함해 다 걸겠다. 의원님은 뭘 걸겠느냐”고 맞받았다. 이런 현상이 현 정부 들어 생긴 것도 아니다.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은 국회에서 아들의 특혜 휴가 관련 야당 의원들의 질의에 ‘소설을 쓰시네’라고 했었다.    의원들의 준비에 부족함이 있더라도 공직자들이 대놓고 국회를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행정부는 막대한 예산을 집행하며 국가 정책을 결정한다. 보좌관과 비서관 몇 명이 고작인 의원은 소속 상임위 부처 돌아가는 것도 파악하기 버겁다. 거대 관료조직이 쥔 정보에 비하면 의원 개인의 힘은 부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국회의 자료제출 요구에 정부 기관들이 응하지 않는 경우가 늘고 있다. 법률 제정과 함께 행정부 견제는 입법부의 중요한 기능이다. 임명직 공무원들이 선거를 통해 선출되는 헌법기관의 존재 이유를 망각해선 곤란하다.    국회의 권위 상실은 삼권분립 한 축의 기능 약화를 뜻하는 만큼 막아야 한다. 이러려면 당사자인 정치인들이 여야로 대립만 해선 곤란하다. 정치는 사라지고 정쟁만 남았다는 지적을 정치인들은 사형 선고처럼 받아들여야 한다. 여소야대 국회에서 야당의 협조를 전혀 받고 있지 못한 윤 대통령도 성과를 내려면 달라져야 한다. 미국 중간선거 다음 날 공화당이 하원 다수당이 될 것으로 예상되자 조 바이든 대통령의 일성은 “공화당 동료들과 함께 일할 준비가 돼 있다”였다. 8일 국회에서 열린 운영위원회 대통령실 국정감사 도중 '웃기고 있네'라는 필담을 주고 받은 김은혜 대통령실 홍보수석(오른쪽)과 강승규 시민사회수석이 사과 표명을 하는 모습. 국회방송 캡처    여야 정당의 가치 대립이 지금보다 심하던 시절에도 정치가 담론을 주도하던 문화가 있었다. 박희태 전 국회의장과 고 박상천 법무부 장관이 여야 대변인과 원내총무 등으로 맞수였던 시절이 대표적이다. 학력 등 공통점이 많았던 이들의 촌철살인 논평과 토론에는 논리와 비유가 담겨 있었다. 대립하되 품격을 잃지 않았고 막후에서 갈등을 조정해내기도 했다. 박 장관이 세상을 뜨자 박 전 의장은 “난 한 마리 짝 잃은 거위”라고 추모했다. ‘웃기고 있네’ 메모 논란을 일으킨 두 수석은 공교롭게 국회의원 출신이다. 더는 국민을 웃기지 말고 정치를 복원해 달라. 김성탁 논설위원

    2022.11.11 00:28

  • [김성탁의 시선] 노인 1인 가구 시대…걸을 수 있어야 산다

    김성탁 논설위원  ━  30년 후 가구 20% 노인 혼자 산다   통계청이 20일 발표한 ‘장례가구추계’ 자료는 2050년 국내 10가구 중 4가구가 1인 가구일 것으로 예측했다. 30년 후에는 17개 시·도 모두에서 혼자 사는 이들이 가장 주된 가구 형태가 될 것이라고 한다. 65세 이상 고령자 가구도 현재 22.4%에서 49.8%까지 올라간다. 특히 전체 가구의 20%가량이 노인이 혼자 사는 가구일 것으로 나왔다. 배우자와 사별하거나 이혼이 늘어 고령층에서 가구분화가 계속되고 있다는 설명이다.    지금도 노인 혼자 사는 가구가 꽤 있지만, 중년층이라도 늙어서 혼자 사는 삶에 대해 신중히 생각해본 경우는 많지 않을 것이다. 아직 건강한 경우가 많고, 자녀 교육 등에 경제력을 집중하기에도 빠듯하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 우리나라 기대수명은 꾸준히 늘고 있다. 지난 7월 발표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보건통계에 따르면 한국인의 기대수명은 남성 80.5세, 여성 86.5세로 예측됐다. 평균 83.5년으로, OECD 1위인 일본에 이어 2위다.   1인 가구가 예상보다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2010년 기대수명이 OECD 38개국 중 21위였던 것에 비하면 엄청난 상승이다. 양질의 의료 서비스와 경제발전, 높은 교육 수준 등이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전문가들은 머지않아 한국 여성의 경우 일본을 추월해 '장수 1위'가 될 것이라고 예상한다. 하지만 좋아하기만 할 게 아니다. 질병이나 부상 등으로 시달리는 ‘유병 기간’을 뺀 건강수명이 기대수명보다 훨씬 짧아서다.    2020년 통계청 자료에서 건강수명은 66.3년에 그쳤다. 오래 살긴 하는데 질병 등으로 고생하며 17년 가량을 보낸다는 의미다. 2020년 세계보건기구(WHO)가 낸 자료는 한국인의 건강수명을 73.1세로 보긴 했다. 그렇지만 한국 건강수명은 기대수명보다 10년 가량 짧은 반면 일본은 그 격차가 7년으로 적다. 일본은 과식을 피하고 운동으로 건강을 관리하는 게 일반적인 반면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1인 가구 증가세를 감안하면 고령층에 진입한 후 10년 이상 병치레를 하며 혼자 살게 된다. 독립적인 생활이 불가능해 활동에 제약이 따르고 당뇨나 고혈압, 심혈관 질환을 앓는데도 혼자 사니 즉시 도움을 받기 어렵다. 병수발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되면 본인은 물론 자녀까지 경제적·육체적 부담을 떠안게 된다. 수명 연장이 노인 1인 가구의 증가와 맞물리면서 ‘저주’가 될 수 있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그래서 나이가 들어서까지 스스로 걸을 수 있는 게 중요하다. 거동이 가능해야 집안에서 요리를 해 먹거나 가까운 곳에 나가 식사를 해결할 수 있다. 약 타러 병원에도 갈 수 있고, 동년배끼리 시간을 보내거나 취미를 공유하는 것도 가능해진다. 이를 위해 운동이 중요하다. 운동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해온 송욱 서울대 건강운동과학연구실 교수는 운동을 통해 할 수 있는 한 많은 저축을 해놓으라고 조언한다.    ━   매일 7000보, 중년부터 근력 운동     첫번째로 노화로 인한 근육량 감소를 막는 게 필요하다. 40세 중반부터 상체보다 하체의 근육량이 급격히 줄어든다. 송 교수는 매일 7000보만 걸어도 근 감소를 막을 수 있다고 했다. 이게 어려우면 일주일에 두 번정도 대퇴근육이나 허벅지 근육 등을 자극해도 효과가 난다. 집에서 스쿼트 자세로 앉았다 일어나기를 하거나,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아파트나 직장 계단을 걸어올라가면 좋다. 근감소는 당뇨병·고혈압·심혈관 질환 등을 낳고 낙상과 골절 등 부상을 부른다. 이러면 장기 입원이나 병수발을 필요로 해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잘 걷지 못하는 고령층이라면 집에서 의자를 잡고 다리를 앉았다 펴는 것만으로도 근력을 늘릴 수 있다고 한다. 스쿼트 운동 ①선 자세에서 무릎을 90도 이내로 구부렸다 편다. ②다리에 힘이 없다면 책상·의자를 잡고 실시한다. [사진 서울아산병원]    ━  주 150분 '숨 헐떡이거나 등 땀나게'    두번째로 필요한 것으로 유산소 운동이 꼽혔다. 송 교수는 ‘등에 땀이 나거나 숨을 헐떡거리는 정도’로 하는 게 유산소 운동이라고 설명했다. 일주일에 3차례 이상, 총 2시간 30분 이상하면 효과가 좋다. 반려동물과 산책하는 경우가 많은데, 너무 천천히 걸으면 강아지는 유산소 운동을 하지만 주인은 한 게 아니라고 송 교수는 설명했다. 제법 빨리 걷는 속보나 조깅, 무릎에 무리가 가지 않게 수영을 하거나, 야외 혹은 실내에서 자전거 타기 등이 추천됐다. [사진 pixabay]   WHO는 18일(현지시간) 194개국 자료를 분석해 ‘신체활동 부족’이 세계경제에 고비용을 치르게 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이로 인한 우울증, 치매, 고혈압으로 발생되는 비용만 70%를 차지했다. 코로나19 같은 전염병만 공포의 대상이 아니다. 오래 앉아있는 근무나 소파에 누워있는 일상, 아이들에게 성적만 올리라며 스포츠는 시키지 않는 교육 등이 우리의 생명과 노후를 위협하고 있다.  김성탁 논설위원

    2022.10.21 0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