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재호 프로필 사진

염재호

필진

태재대학교 총장·전 고려대 총장

고려대학교 행정학과 명예교수
SK(주) 이사회 의장
서울평화상문화재단 이사장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행정학과 졸업
미국 스탠포드 대학교 정치학박사
고려대학교 정경대학 행정학과 교수
고려대학교 제 19대 총장 (2015-2019)
외교부 정책자문위원장
우정사업운영위원회 위원장
공공기관경영평가단장
한국고등교육재단 이사
한국정책학회 회장

  • [염재호 칼럼] 법조인 정치와 국가 어젠다

    염재호 태재대학교 총장·전 고려대 총장 22대 총선의 주제는 비전이나 정책보다 상대를 정죄하기 위한 심판이었다. 총선의 주역은 모두 법조인들이었다. 대통령과 양당 대표 모두 법조인 출신이고, 조국혁신당 대표도 법대 교수 출신이다.   선거 결과 61명의 법조인이 당선되었다. 지난 21대 총선보다 15명이 늘어나 국회의석 20.3%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것도 전문성을 대표하는 비례대표가 아니라 지역구 의원만 55명이다. 이명박 정부 이후 7명의 총리 가운데 5명이 법대 출신이다. 양김 시대 이후 대통령이 되겠다고 도전한 사람들 대다수가 법대 출신이고 최근 정권 문재인, 윤석열 대통령 모두 법조인 출신이다.     ■  「 과잉 대표된 법조인 출신 국회의원 연역적 정답만 찾는 법조정치 우려 라이벌도 품는 포용의 리더십 절실 정쟁 멈추고 미래 어젠다 몰두해야 」    외국 의회의 경우를 보면 법조인 출신은 제한적이다. 영국은 2019년 총선에서 650명 의원 중 7.2%인 47명, 프랑스는 2022~27년 임기의 하원의원 577명 중 4.8%인 28명, 일본은 2021년 465명 중의원 중 3%인 14명에 불과하다. 미국도 2023년 하원의원 9.4%가 판검사 출신이라고 한다.   법조인은 다른 직업 출신보다 논리적으로 현상을 분석하고 법안 입안과 심의과정에서 전문성을 보인다. 법조인은 형식논리로 상대의 약점을 파고들어 굴복시키는 능력을 갖고 있다. 객관적 증거와 논리적 분석을 바탕으로 상대를 평가하고 판단하는 훈련을 오래 받아왔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영미법 전통과 달리 독일과 일본의 대륙법 전통을 갖고 있어 법체계가 연역적이다. 미국처럼 피고가 유죄를 인정하거나 검찰에게 유리한 증언을 통해 형을 낮추는 플리바게닝(plea bargaining)제도가 우리나라에는 없다. 정해진 법 규정에 따라 연역적 추론으로 피고의 죄를 판단하고 구체적 형량으로 심판하기 때문이다. 영미법은 판례 중심의 귀납적 체계이기에 절대적 판단보다는 상대적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미국에서 배심원제도가 발달한 이유도 판사의 절대적 판단이 아니라 일반 시민들의 상대적 판단도 고려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필자도 학부가 법대 행정학과라서 수업이 마치 수학에서 정답을 찾듯 연역적 추론 교육을 배우는 법학 중심이었다. 하지만 대학원에서는 정치학의 분과로 행정학을 공부해서 대안 탐색의 귀납적 방식을 익혀야 했다. 스탠퍼드 대학원 시절 은사였던 제임스 마치(James March) 교수는 정책 결정을 ‘정답 찾기’가 아니라 ‘통나무 굴리기(log rolling)’로 비유했다. 여러 명이 통나무를 굴려 움직일 때 모두 적절하게 힘을 배분하여 이동시켜야지, 한두 명이 조급하게 밀면 통나무가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법조인 정치가들은 마치 형량을 정하듯 R&D 예산 30% 삭감, 의대 2000명 증원 등 모든 이슈에서 정답을 제시하곤 한다. 또는 자신의 잘못을 형식논리로 호도하여 남의 탓과 팬덤 현상으로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곤 한다. 좌우 모두 독선적 정치로 국민을 피폐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들이 국가 어젠다를 왜곡할 때 우리에게 닥친 국가적 위기는 심각하다. 인공지능 혁명의 혼돈 속에서 미·중 갈등을 위시한 국제질서의 재편, 북한 핵미사일 위협, 글로벌 밸류체인 변화, 수명연장과 저출생, 인공지능이 몰고 올 직업·노동·교육 등의 전방위적 사회 패러다임 변화는 지각변동 수준이 될 것이다.   우리 정치 지도자들에게는 이런 격랑이 보이지 않는지? 우리 모두가 힘들게 이뤄낸 고도 경제성장과 민주화의 성취를 더 발전시킬 생각은 하지 않고 적폐 청산, 일제 잔재 청산, 좌파 카르텔 청산, 검찰 독재 심판 등 과거 시시비비만을 따지는 싸움만이 그들의 역할이라고 생각하는지?   퓰리처상 작가인 도리스 컨스 굿윈(Doris Kearns Goodwin)의 『권력의 조건』을 보면 자신의 정적이었던 라이벌까지 끌어안은 링컨의 포용 리더십을 잘 그리고 있다. 독학으로 변호사가 된 링컨은 대선 경선과정에서 경쟁한 라이벌들을 국무장관, 재무장관, 법무장관에 임명했고, 야당인 민주당 출신 세 사람도 장관으로 임명했다. 막강한 경쟁자들도 처음에는 링컨을 경험도 없고 무식하다고 멸시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존경심과 함께 완벽에 가까운 사람이라는 평을 하게 되었다. 남북전쟁과 노예해방 등 중대한 국가 어젠다를 풀기 위해서는 모두 힘을 합쳐야 한다는 링컨의 뛰어난 정치 리더십이 돋보인다.   이제 국가 지도자가 되겠다고 나서는 정치인들은 미래의 국가 어젠다를 우선적으로 이야기해야 한다. 더 이상 민변 출신들과 검찰 출신들처럼 법조인들이 중심이 되어 벌이는 복수의 대혈투극에 국민을 끌어들이지 말기 바란다. 혼돈과 변화의 시대에는 정죄하고 심판하는 판단의 리더십보다 국가 미래 어젠다에 대해 상대를 설득하고 합의를 끌어내는 포용의 리더십이 절실하다. 이제라도 대통령이 국가 미래 어젠다를 최우선 통치 과제로 삼아 정쟁 종식을 선언하고 함께 지혜를 모으는 포용의 리더십을 펼치길 기대한다.   염재호 태재대학교 총장·전 고려대 총장    

    2024.04.17 00:36

  • [염재호 칼럼] 누가 유권자인가?

    염재호 태재대학교 총장·전 고려대 총장 22대 국회의원선거의 사전투표까지 20여 일도 채 남지 않았다. 다음 주말부터 선거운동이 본격화되면 지하철역마다 허리를 굽혀 표를 구걸하는 후보들의 모습을 열흘 정도는 지켜봐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투표권을 가진 사람을 유권자라고 한다. 하지만 일반 국민은 정치에서 진정 무슨 권한을 가진 것일까?   유권자인 국민은 총선이 끝나면 국회의 이전투구를 바라보며 맥없이 정치혐오에 빠지게 된다. 역대 최악의 국회라고 평가받는 21대 국회보다 22대 국회가 더 나을 것 같지도 않다. 양대 정당은 시스템 공천이라고 하지만, 국가를 위해 봉사할 유능한 인물들을 유권자인 국민에게 공천한 것인지 의문이다. 게다가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위성정당제로 어처구니없이 탈바꿈해 유권자를 농락하는 비상식적 제도로 전락했다.     ■  「 입법권 남용과 과잉특권 빈축 국회 정당 후보 공천 시스템도 비합리적 국회의원 소명의식과 정치력 절실 AI 활용한 후보 검증 시스템 갖춰야 」    국회의원 후보들은 본 선거보다 정당 공천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후보 개인의 능력이나 비전보다 정당 중심 투표 경향 때문이다. 하지만 공천과정에서 국민 참여를 보장한다는 여론조사는 왜곡되기 쉽고 극렬 지지당원들의 영향력은 압도적이다. 형식은 시스템 공천이지만, 실질은 당 대표나 지도부의 뜻에 좌우되어 사천이라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민주화 이후 국정운영에서 국회의 영향력은 점점 비대해지고 있다. 17대 국회에서 정부의 입법발의는 1102건, 의원발의는 5728건이던 것이 점점 늘어나 21대 국회에서 정부발의는 831건으로 축소되고 의원발의는 2만3584건으로 증가했다. 국회의원들은 자신들이 국정을 책임지는 헌법기관이라고 주장한다. 심지어 자신들만이 선출된 권력이라고 행정부 공무원들을 폄하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예산심의 과정에서 쪽지예산으로 지역구 챙기기에 급급하고, 예산안이 통과되면 플래카드를 내걸고 자신이 따온 지역구 예산 자랑에 여념이 없다. 지역의원인지 국정을 담당한 국회의원인지 모를 정도다.   국회의원은 임기 동안 막강한 권력을 행사한다.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을 이끌던 장기표 특권폐지국민운동본부 상임대표는 국회의원 특권을 없애야 바른 정치가 가능해진다고 주장한다.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의 특권은 180여 개나 되고 연봉은 세계에서 네 번째로 많은 1억5500만원인데, 우리나라 정치인 신뢰도는 167개국 중 114위라고 한다. 우리 국회의원 보좌관은 6명인 반면에 스웨덴은 보좌관 한 명을 국회의원 두 명이 공유하고, 출퇴근에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봉급은 국민 전체 근로자 평균임금만 받는다고 한다.   막스 베버가 강의를 책으로 엮은 『직업으로서 정치』는 정치가의 역할을 잘 알려주는 불후의 명작이다. 영어에서 직업(vocation)은 하늘로부터 부름 받은 소명이나 사명감을 뜻한다. 단순히 일의 대가로 보수를 받는 직업의 의미를 넘어선다는 것이다. 그래서 원로 정치학자 최장집 교수는 막스 베버 정치철학을 강의하고 책으로 펴낼 때 직업 대신 『소명으로서의 정치』라고 제목을 정했다.   베버는 정치가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세 가지 자질이 열정, 책임감, 그리고 균형적 판단이라고 했다. 단지 열정만으로는 정치가가 되기에 충분하지 않고 냉철한 균형적 판단이 중요하다. 정치가가 냉철한 균형적 판단을 갖기 위해서는 ‘신념의 윤리’보다 ‘책임의 윤리’를 고민해야 한다. 도덕적 근본주의와 같은 신념의 윤리만 갖고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척결해야 한다는 오류에서 벗어나야 한다. 정치는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미래의 문제를 설득과 합의를 통해 풀어나가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정치가는 국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봉사하는 소명감으로 일해야 한다. 정치를 월급 받고 특권 누리는 직업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개인의 이익을 위해 금품을 받거나 공천을 얻기 위해 아첨, 거짓말, 막말을 일삼지 않아야 한다. 자신에게 불리해도 바른말을 하고 국가의 미래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이번 공천 과정에서도 과거 발언 문제나 금품수수 증거로 공천이 취소되는 사례가 나왔다. 이제 인공지능(AI)의 도입으로 국회의원 후보 자질을 철저하게 평가하는 시스템 구축이 가능하다. 대체 불가능한 토큰(NFT) 방식을 활용하여 과거 모든 언행을 낱낱이 분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학회, 정당학회, 정책학회 등 전문가 단체들이 나서서 정당과 정치인에 대한 철저한 평가 시스템을 만들어 유권자들이 정치인들을 제대로 식별할 수 있는 권리를 되찾게 해주어야 한다.   유권자는 후보의 정치적 식견과 품격을 판단할 수 있는 정보를 가질 권리가 있다. AI 시대를 맞아 이제부터는 막말과 거짓 선동, 국회 질의 내용과 수준, 국가 미래를 위한 정책대안 제시, 지역구를 넘어선 국정 관련 활동, 정치적 설득과 통합 능력, 품격 있는 언행 등을 전문가 집단이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시스템을 마련해서 그 결과를 공개해야 한다. 그래야만 유권자가 선거에서 후보와 정당에 대해 준엄한 심판을 할 수 있는 진정한 권력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염재호 태재대학교 총장·전 고려대 총장

    2024.03.19 00:42

  • [염재호 칼럼] 인구절벽과 우수 유학생 유치정책

    염재호 태재대학교 총장·전 고려대 총장 예일대학교 로스쿨 에이미 추아(Amy Chua) 교수의 책 『제국의 미래』를 보면 역사상 강대국으로 부상한 제국의 특징은 외부 세력에 대한 관용과 포용에 있었다. 당나라 제국의 발흥도 많은 외국인을 유입시켜 포용한 정책에 기인했다고 책에서 설명한다. 수도 장안(長安)에는 당시 지구상 도시 중에서 가장 많은 인구가 있었고 인종의 다양성도 뛰어났다.   당 태종은 신라인 7만 명을 받아들였고 신라의 귀족과 관리들을 관직에 등용했다. 신라 후기에는 매년 100여 명의 6두품 이하 자제들이 당나라로 건너가 10년 정도의 유학생활을 했다. 840년 한 해에 105명 유학생이 동시에 신라로 귀국했다는 기록까지 있다. 당나라 홍로사(鴻臚寺)에서는 외국 유학생을 위해 숙식과 의복을 제공하는 장학제도를 운용했다. 당나라 과거시험에 906년까지 58명, 이후 925년까지 22명의 신라인이 급제했다.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 알려진 최치원도 당나라 진사 시험에 합격하여 감찰과 문한을 맡는 도통순관과 관역순관이라는 직책으로 복무하다가 17년 만에 고국 신라로 귀국했다.     ■  「 제국의 강점은 다양성과 포용력 국가경쟁력 핵심은 인력시스템 해외인력으로 인구절벽 극복해야 우수 유학생 유치 위한 전략 시급 」    미국은 아메리칸 드림을 품고 찾아온 이민자들의 천국이었다. 2차 세계대전 전후 1933년부터 1950년 사이에 13만 명에 달하는 유럽 지식인들이 미국으로 망명했다. 1945년 이후 아시아계 미국 이민자 숫자는 약 2200만 명에 달해 인구의 6.8%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전체 인구 3억3000만 명 가운데 백인 57.8%, 히스패닉 18.7%, 흑인 12.4% 다음으로 많은 숫자다.   미국, 캐나다, 브라질은 건국한 연도와 국토면적은 비슷하지만 이민을 적극 수용한 미국만 강대국이 되었다. 미국은 1776년, 브라질은 1822년, 캐나다는 1867년 건국했다. 국토 면적은 미국 983만㎢, 캐나다 998만㎢, 브라질 851만㎢로 비슷하다. 하지만 인구는 미국이 3억3000만 명인 데 비해 브라질은 2억1000만 명, 캐나다는 3400만 명에 불과하다. 인종 분포도 캐나다는 73%가 유럽계이고, 브라질도 유럽계 백인 47.7%에 백인과 흑인 혼혈 물라토 43.1%로 다양하지 않다.   지금 미국 경제에서 지식노동은 한국, 인도, 중국 등 아시아계 인력에 의존하고 육체노동의 대부분은 히스패닉이 담당하고 있다. 첨단산업의 메카 실리콘 밸리의 인구 비중에서 소프트웨어 개발자의 36.2%, 컴퓨터 엔지니어의 29.6%가 아시아계이다. 미국 건설현장 노동자의 60%는 히스패닉이 담당한다. 히스패닉 인구가 42.1%를 차지하는 뉴멕시코, 32%가 넘는 캘리포니아와 텍사스에서는 이들이 없으면 경제가 돌아가지 않는다고 한다.   인구절벽을 맞은 우리나라의 미래는 심각하다. 2016년 생산가능인구는 3763만 명으로 정점을 찍고 하락하고 있으며, 2022년 합계출산율은 0.78명까지 내려갔고, 총인구도 2020년 5184만 명을 정점으로 감소하고 있다. 이런 추세로 가면 2100년에 인구가 2000만 명대가 된다고 한다. 이제 저출생 문제를 심도 있게 검토하고 다각도로 미래 인구전략을 강구해야 한다.   홍콩과기대 김현철 교수의 홍콩 가사도우미 경제학은 흥미롭다. 홍콩이 1974년 외국인 가사도우미 제도를 도입한 이후 대졸 여성 노동시장 참여율이 평균 25% 상승했다고 한다. 2022년 홍콩에는 약 34만 명, 싱가포르에는 약 27만 명의 외국인 가사도우미가 있다. 다음 달부터 고용노동부와 서울시의 시범사업으로 필리핀에서 100명의 가사도우미가 입국하게 된다. 가사도우미 외국인 노동인력 유입이 본격화되면 출생률 변화도 기대해볼 만하다.   외국인 유치에서 단순 노동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우수 인재 영입이다. 학령인구가 줄어들고 대학등록금 억제정책 때문에 사립대학들이 자발적으로 추진해온 외국유학생 유치 활동을 넘어서 정부가 체계적으로 우수 유학생 유치를 위한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 초중고 12년간의 교육비용을 자국에서 부담한 우수 인력들이 대학과 대학원에 유학생으로 들어와서 우리의 고급인력으로 정착하면 국가적으로 큰 도움을 얻게 된다. 현재 미국에는 약 95만 명, 일본은 약 35만 명의 외국인 유학생이 있다. 우리는 약 16만 명의 유학생이 있는데 정부는 2027년까지 30만 명까지 늘리겠다고 한다. 단순한 숫자보다 질적으로 우수한 유학생을 확보할 전략이 필요하다. 우수 유학생 유치정책으로 일본 정부는 일본학생지원기구(JASSO)를 통해 도쿄 오다이바에 국제연구교류대학촌 시설을 유치하고, 도쿄국제교류관에 외국인 유학생과 연구자를 위한 주거시설을 건립했다.   앞으로 지구촌 노동력은 더욱 활발하게 이동할 것이다. 선진국으로 가는 지름길은 우수 인력 확보를 위한 시스템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구축하는 데 달려있다. 이제 단일 민족의 차원을 넘어 다양성과 다문화를 끌어안아야 한다. 제국의 역사에서 보았듯이 포용의 힘이 국가경쟁력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염재호 태재대학교 총장·전 고려대 총장

    2024.02.21 00:48

  • [염재호 칼럼] 인본주의 시대에서 물본주의 시대로

    염재호 태재대학교 총장·전 고려대 총장 새해가 밝았다. 이제 인류는 본격적으로 문명사의 대전환기를 맞고 있다. 인간이 만든 데이터 시스템에 의해 인공지능이 우리의 삶을 바꿔놓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이후 인간 중심의 인류 문명사가 사물이 중심이 되는 새로운 문명사로 서서히 전환되고 있는 순간이다.   천 년 이상의 중세 암흑기에 유럽인들은 하나님이 삶의 중심이 되는 신본주의(神本主義) 시대를 살았다. 인간의 삶은 오로지 신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삶이었다. 유럽 전역을 지배하던 로마가 서기 313년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의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 국가로 변화하면서 중세 유럽은 신이 중심이 된 사회로 바뀌었다. 하나님을 위해 대규모 성당을 건축하고 교황의 권위는 황제의 세속적 권위를 능가하곤 했다. 신이 모든 삶의 중심인 신본주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  「 디지털 사회로 인류문명 대전환 사물이 인간을 규율하는 시대로 인본주의 쇠퇴와 인공지능 확산 인간 주체성과 존엄성은 지켜야 」    이런 신본주의가 인간이 발명한 금속활자와 인쇄술의 발전으로 종교개혁, 르네상스, 시민혁명을 거치면서 인간이 세상의 중심이 되는 인본주의(人本主義) 사회로 바뀌었다. 삶의 중심이 신이 아니라 인간으로 돌아왔고 인간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천부적 인권을 갖게 되었다. 인본주의는 인간이 자연을 정복하고 지배할 수 있는 정당성의 논리도 제공해주었다. 산업혁명으로 인간의 과학지식이 발전하고 20세기 들어서 대량생산체제가 확립되면서 풍요로운 대량소비의 시대가 가능하게 되었다.   하지만 인간이 세상의 중심이 되는 인본주의는 인간 탐욕을 부추겨 지구 생태계가 위협받게 되었다는 비판에 직면하게 되었다. 화석연료 남용으로 기후위기가 나타나고 넘쳐나는 쓰레기로 환경이 파괴되었다. 매년 약 600억 마리의 닭, 26억 마리의 오리, 15억 마리의 돼지, 5억 마리의 양, 4억 마리의 소가 식량으로 도축된다.   이제 다른 동물이나 물체를 객체로 지배하던 인간 중심의 삶에 변화가 일고 있다. 애완견(愛玩犬)이 반려견(伴侶犬)의 지위에 올라섰다. 한 온라인 쇼핑몰에서 지난해 반려견의 유모차인 소위 개모차가 어린아이 유모차 구매량을 57% 대 43%로 추월했다고 한다. 동물보호 차원에서 육식을 거부하는 채식주의가 늘어나고 동물학대는 아동학대 못지않은 심각한 범죄행위로 여겨진다.   언어 표현에서도 객체인 사물이나 현상에 대해 이들을 주체로 대접하여 능동태 서술어를 활용하도록 강요하고 있다. 신문이나 TV의 편집 지침에서도 모든 객체의 “된다”라는 표현을 “한다”로 바꾸게 한다. 자연현상인 “폭풍이 확산된다”를 “폭풍이 확산한다”로, “문제가 악화되면”을 “문제가 악화하면”으로, “금리인하가 지속된다”를 “금리인하가 지속한다”로 바꿔 쓰도록 한다. 객체도 주체로 인식해야 한다는 주장이 알게 모르게 인간중심 인본주의를 서서히 침몰시키고 있는 것이다.   2023년은 인류가 인공지능(AI)으로 새로운 문명사를 써내려가는 출발점이 되었다. 2022년 생성형 인공지능인 챗GPT 3.5 출현 5개월 만에 GPT 4가 등장하여 본격적인 인공지능 시대에 돌입하게 된 것을 인류는 깨닫기 시작했다. 올해 CES나 다보스 포럼에서도 인공지능이 모든 주제를 석권했다.   이제 스마트폰이 없으면 일상생활이 거의 불가능해진다. 인간이 주체적인 삶보다 사물에  의해 지배받는 삶을 살고 있다. 먹고 마시고 물품을 구매하는 행위가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를 매개로 한 정보에 의해 이루어진다. 보고 싶은 책이나 영화도 우리의 이전 행위를 분석한 자료에 의해 추천되고 유도된다. 건전한 상식을 가진 사람도 가짜뉴스로 유포되는 정보를 그럴듯하다고 판단한다. 유튜브나 SNS로 보고 싶고 듣고 싶은 내용만 반복적으로 보고 듣다 보면 인간은 자신의 판단능력이 상실된 채 자기도 모르게 세뇌되어 확증편향에 빠져버리게 된다.   올해 미국 대통령 선거나 우리나라 총선에서도 이런 현상에 크게 영향을 받을 것이 틀림없다. 이제 인공지능이 모든 것을 판단하고 인간의 삶을 지배하게 될 때 인간 본연의 주체적 삶은 점점 상실될 것이다. 마치 객관적 진실처럼 보이는 여론조사, 뉴스, 다른 사람들의 행동양식, 상업주의 광고 등과 같은 객체들에 의해 주체인 인류의 삶이 지배되는 물본주의(物本主義)로 서서히 빠져들고 있는 것이다.   신본주의 시대의 정치체제인 군주제가 인본주의 시대가 되면서 투표선거제에 의한 민주주의로 바뀌었다면, 빠른 미래에 물체인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정치체제가 등장할지 모른다. 인간의 주체적 판단보다 객체인 인공지능의 판단이 더 뛰어나고 효율적이라고 믿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동물이나 객관적 현상에게 주체의 자리를 내어주는 것을 넘어서 이제는 인공지능에게 주체의 자리를 내어주는 물본주의 현상이 가속화될 것 같아 씁쓰름한 한 해의 시작이다. 하지만 인본주의 시대에도 신을 믿는 믿음이 사라지지 않았던 것처럼 물본주의 시대가 되어도 인간의 주체성과 존엄성은 유지되면 좋겠다.   염재호 태재대학교 총장·전 고려대 총장

    2024.01.24 00:30

  • [염재호 칼럼] 국격과 외교부총리

    염재호 태재대학교 총장·전 고려대 총장 2023년 한 해가 저물어간다. 올 한 해 국민의 많은 관심을 모으며 윤석열 정부가 혼신의 힘을 기울인 일은 아마 부산엑스포 유치였을 것이다. 대통령, 국무총리, 부산시장뿐 아니라 4대 그룹 총수와 CEO들이 총동원되어 182개 회원국을 대상으로 부산엑스포 유치활동에 전력을 기울였다. 엑스포 민관합동 유치위원회 위원들의 활동을 합치면 지구를 496바퀴 돌 정도였다고 한다. 재계 리더와 경영진이 175개국 3000여 명의 정상과 장관을 만나기 위해 이동한 거리만도 지구를 197바퀴 돌 정도라고 한다.     ■  「 엑스포 유치 실패, 외교력 부족 탓 국격 걸맞게 외교 역량 강화해야 피크 코리아 늪 탈피 위해서라도 부총리급 세계 전략 사령탑 필요 」    아라비아 반도와 걸프만 지역 종주국인 사우디아라비아는 아랍에미리트(UAE)의 2020엑스포 유치와 카타르의 2022월드컵 유치로 자존심이 상해 2030 엑스포 유치에 필사적이었다.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는 막강한 오일머니의 자금력을 앞세워 엑스포 유치에 전력을 기울였다. 늦게 출발했지만 우리도 약 60개국에서 지지 약속을 받아냈다면서 마치 서울올림픽과 한일월드컵 유치와 같은 성공신화를 믿었는지 모르겠다. 결과는 165개국이 참가한 1차 투표에서 사우디 리야드 119표, 대한민국 부산 29표, 이탈리아 로마 17표로 참패를 당했다.    K팝, K드라마의 인기를 앞세워 최종 프레젠테이션도 해 보았지만 외교력에서 사우디의 벽을 넘지 못한 것이다. 단순히 자금력 때문이라고 보기에는 외교적 역량이 떨어진 부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세계 3대 메가 이벤트 중에서 스포츠 중심인 올림픽과 월드컵과 달리 경제와 문화 올림픽이라고 할 수 있는 엑스포는 외교력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외교현장에서 우리의 국격은 경제력만큼 높지 않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미국, 중국, 일본 등 강대국의 외교 전략에 수동적으로 대응하면서 우리 나름의 외교 역량을 키우지 못했다. 사회주의국가 출신 주한 대사들이 종종 한국말을 유창하게 하는 것을 보고 놀라곤 한다. 우리 외교관은 영어만 주로 하고 주재국 언어를 못하는 경우도 많다. 중국이나 일본 같은 주요국에서 정치권 인물이 대사로 임명되면 중국어나 일본어를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우리나라는 수출주도형 경제로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이 되었다. 하지만 외교력은 10위권에 한참 못 미친다. 2022년 우리나라는 GDP 1조 6732억 달러로 세계 13위에 올랐다. 네덜란드는 9919억 달러로 18위를 차지했다. 제국의 경험이 있는 네덜란드는 강소국 외교를 잘 보여준다. 우리나라 해외공관은 116개이지만 네덜란드는 129개의 공관을 갖고 있다. 공적 원조인 ODA 예산도 2022년 네덜란드는 65억 달러지만 우리나라는 29억 달러로 절반에도 못 미친다.   미·중 갈등 심화로 글로벌 밸류 체인이 붕괴하고 국제질서가 새롭게 태어나려 한다. 중국과 러시아가 힘을 합치고, 이들의 아프리카에 대한 원조와 투자는 매우 적극적이다. 우리도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중남미, 중동, 동유럽 국가들에 대한 전략적 접근이 필요한 시점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외교부의 지위와 역량은 매우 초라하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국가 경제를 총지휘하던 경제기획원의 전통이 이어져 기획재정부장관이 경제부총리의 역할을 맡고 있다. 교육부 장관도 사회부총리를 겸하고 있다. 통일부와 과학기술부의 장관도 부총리를 겸직했다. 하지만 우리 경제의 핵심이 수출이고 강대국에 둘러싸여 외교가 무엇보다 중요한데도 외교부는 부총리 자리를 겸직해보지 못했다. 대통령 다음 의전 서열에서도 미국은 부통령(상원의장 겸임), 하원의장, 연방 대법원장에 이어 국무부 장관이 5번째인데, 우리나라 외교부 장관의 의전 서열은 국회의장, 총리 등에 이어 18번째인 대통령 비서실장 바로 다음인 19번째다.   윤석열 정부가 포용외교를 위해 내년도 ODA 예산안을 올해 4조5000억원에서 44% 비약적으로 늘어난 6조5000억원으로 편성했다. 비록 국회 예산심의 과정에서 2000억원 이상 감액되었지만 전무후무한 예산 증액이다. OECD 개발원조위원회는 28개 회원국에 각국 GDP의 0.3%를 ODA 예산으로 지출하도록 권고하고 있는데 2022년 우리나라 ODA 예산은 GDP의 0.17%에 불과했다.   국격을 높이기 위해서는 경제력에 걸맞은 외교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국가의 소프트파워인 문화, 외교 등의 격이 올라야 경제도 살아날 수 있다. 국내 정치의 많은 문제로 인해서 한국이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하고 여기가 정상이라고 ‘피크 코리아’를 말하니 걱정이다. 신자유주의 글로벌 경제 질서가 요동치는데 국내 정치는 정쟁에 여념이 없다. 이제 세계 전략을 설계하지 않으면 우리의 미래는 없다. 외교부 장관이 부총리급 세계전략 사령탑이 되어서 국제사회에서 우리 외교력을 강화하고 국격과 경제력을 더욱 높여야 한다. 우리 국민의 피땀으로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여기가 정상이니 내려가라는 말은 받아들이기 어렵기 때문이다.   염재호 태재대학교 총장·전 고려대 총장

    2023.12.27 00:44

  • [염재호 칼럼] AI 시대의 상상력

    염재호 태재대학교 총장·전 고려대 총장 지난해 11월 챗GPT 3.5가 전격적으로 출시된 지 불과 5개월 만에 GPT4가 나왔다. 드디어 인공지능이 인류 문명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킬 것이라는 예측이 실감 나게 다가오고 있다. 수퍼 컴퓨터로 24시간 쉴 새 없이 기계학습을 하는 인공지능은 인간 행동과 언어의 모든 패턴을 분석하여 스스로 생성한 정보로 자신의 판단을 우리에게 제공해주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20세기에는 기계화 도입으로 인간의 육체적 능력을 대체하는 변화가 나타났다면 21세기에는 인공지능 도입으로 인간의 지적 능력을 대체하는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마침내 직업 대전환에 대한 미래학자들의 예측이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세계경제포럼(WEF)의 ‘일자리의 미래 2023’ 보고서에 따르면 2027년까지 전 세계에서 8300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지고 6900만개의 일자리가 새로 생길 것으로 전망된다. 챗GPT의 등장으로 향후 5년 이내에 기존 일자리의 23%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인공지능 기술 도입으로 사무, 행정 분야뿐 아니라 법률, 의료, 연구 등 전문분야까지 변화의 바람은 거세게 불 것이다.     ■  「 반복적 일보다 창의력 중요해져 호모 파베르에서 호모 루덴스로 수도권 교통 주거도 상상력 필요 상상력으로 미래 국정 설계해야 」    제러미 리프킨이 예견한 ‘노동의 종말’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인간은 주 3일 정도 일하거나 일없이 기본소득만 받으며 평생을 살지도 모른다. 옛날 귀족들은 일하지 않고 평생을 살았다. 노동은 하인들에게 시키고 자신들은 문학, 예술 등과 같은 도락을 일삼으며 평생을 살았다. 이제 인간은 도구를 사용하여 노동하던 인간인 ‘호모 파베르(Homo Faber)’에서 네덜란드의 철학자 요한 하위징아(Johan Huizinga)의 개념인 놀이하는 인간 ‘호모 루덴스(Homo Ludens)’로 대전환하여 살게 될지 모른다.   1940년대 미국에서는 주 70시간 정도 일했다. 이제 유럽에서는 주 30시간 정도 일한다. 생산성을 높이는 것은 인간의 노동시간이 아니라 기술혁신이기 때문이다. 문화나 예술도 고부가가치를 생산해낸다. 이전엔 놀이라고 치부하던 연예인이나 스포츠 선수의 활동이 일반인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수입을 올리고 있다. 먹는 것이나 여행 등 취미 생활로 돈 버는 유튜버들도 늘고 있다.   아인슈타인은 지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상상력이라고 했다. 자신을 과학자가 아니라 상상력을 자유롭게 끌어내는 예술가라고 했다. 21세기 미래를 주도하는 것은 노동의 힘이 아니라 상상력의 힘이 될 것이다. 노동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관료제적 특성들은 이제 20세기 역사적 유물로 사라지게 될 것이다.   서울의 주택난이 심각해도 이를 풀어내는 상상력은 초라하다. 서울은 지구단위 계획 때문에 도심은 상업지구로 만들고 주거는 외곽이나 신도시로 내몰았다. 그래서 직장 출퇴근에 한 시간 이상 걸린다. 기존 사대문 안에 있는 초등학교는 주민이 없어서 전교생 100명을 겨우 유지할 정도다. 명동의 땅값이 평당 수억원이 넘지만 사오층 정도 상가건물이 즐비하다. 반면에 뉴욕 맨해튼에는 수십층짜리 주상 아파트들로 가득 차 있다. 서울이 U자형 스카이라인인데 반해 맨해튼은 역 U자형으로 도심에 초고층 건물과 주거공간이 많다. 이처럼 명동 등 도심과 용산역에서 서울역까지 철로 위에 60~70층 임대아파트를 건설하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100여만원의 월세를 내고도 24시간 어린이집, 병원, 공유 주방, 피트니스 센터, 스카이라운지 등의 시설을 갖춘 도심 고층 임대아파트에서 젊은이들이 살게 해야 한다.   김포 골드라인 초과밀 문제로 김포를 서울시에 편입하려는 정치권 논의가 뜨겁다. 일본 도쿄에는 출퇴근 시간에 많은 특급 전철이 일반 전철의 절반 정도 시간에 목적지에 도착한다. 우리는 특급열차가 통과할 대기 공간이 정차 역에 없어서 대부분 전철이 모든 역에 정차한다. 주거공간이 수도권 외곽이기에 긴 시간 출퇴근 교통지옥에 시달린다. 현재 1호선은 10량, 경전철은 4량, 대부분 지하철은 8량으로 운행한다. 출퇴근 과밀 시간에 몇 개의 차량을 더 연결하여 운행하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지하철 8량에 4량 정도를 추가하면 수송인력이 50% 늘고 이곳을 카페나 레스토랑처럼 운영할 수도 있다. 지정 좌석에 추가 요금을 지불하고 탑승하여 커피 마시고 토스트 먹으며, 일도 하고 음악이나 영화를 감상하며 출퇴근할 수 있다. 승하차는 차량 연결문을 통해 8량이 있는 곳을 통해 하면 된다. 스위스 산악열차도 스타벅스 카페 차량을 객차에 연결하여 운행한다.   인공지능(AI) 시대에선 평범한 생각이나 반복적 일은 컴퓨터, 인공지능, 로봇이 인간보다 훨씬 잘할 수 있다. 우리가 이들보다 더 잘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가진 상상력과 창의력뿐이다. 20세기 관료제의 꽉 막힌 사고에서 벗어나 다양한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만이 21세기에 AI를 뛰어넘어 인류가 잘살 수 있는 길이다. 국정을 맡은 정치지도자들과 관료들도 과거에 얽매인 정치와 규제가 아니라 상상력으로 미래의 문제를 푸는 국정운영을 해야 한다.   염재호 태재대학교 총장·전 고려대 총장

    2023.11.29 01:06

  • [염재호 칼럼] 분노의 정치와 공감의 정치

    염재호 태재대학교 총장·전 고려대 총장 영화감독 제임스 스턴의 다큐멘터리 영화 ‘아메리칸 카오스’를 최근에 보았다. 오바마 대통령을 좋아하고 로버트 케네디를 최고의 정치가로 존경하는 스턴 감독은 2016년 미국 대선에서 공화당 주류도 아닌 정치 신인 트럼프가 약진하는 것을 보고 미국사회를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왜 트럼프 열풍이 미국 사회를 휩쓸고, 심지어 민주당 성향 유권자들조차도 트럼프 지지로 쏠리는지 스턴에게는 의문투성이였다.   선거 6개월 전부터 아무런 편견 없이 트럼프 지지자들을 만나 그들의 의견을 들어보기로 했다. 그 결과 자신은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던 유권자 집단의 분노가 트럼프 지지로 몰린 것을 확인했다. 1960~70년대 최고의 부와 행복을 구가하던 시절의 미국은 막을 내렸다. 빈부격차는 심화하고 전통적 가치는 훼손되고 가족의 행복은 파괴되는 현실에서 미국 중산층의 정치적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탄광에서 일하던 광부의 삶은 힘들었지만 경제적 부를 가정에 안겨줄 수 있었다. 하지만 기후위기로 석탄소비를 억제하는 바람에 탄광이 문을 닫고 가정과 마을이 붕괴하는 현실에 정치권이나 정부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았다. 민주당의 환경 정책, 이민 정책, 성소수자 정책 등 진보적 정책들이 자신들의 삶을 파괴했다고 믿기 시작한 백인 중산층이 분노하여 트럼프의 열렬한 지지자가 된 것이다. 트럼프가 거침없이 이들의 분노를 대변하고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겠다고 포퓰리즘 정치 캠페인을 하자 자신들의 아픔을 기성 정치인이 아니라 트럼프만이 공감하고 있다고 굳게 믿은 것이다.     ■  「 삶의 피폐로 고통 받는 소외집단 공감 못하는 정치권에 분노 표출 분노 정치로 극단 정치세력 득세 공감의 정치로 분노 집단 품어야 」    스턴 감독의 생각에는 오바마 대통령의 환경 정책은 우리가 당연히 감내해야 할 합리적 정책이다. 그리고 많은 허드렛일을 담당하는 남미 이민자들이 이민 국가인 미국에 정착하는 것이 왜 문제인지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트럼프 지지자들을 인터뷰하는 과정에서 백인 중산층이 소멸하는 것을 방관한 정치권에 대한 분노 감정이 축적된 사실을 깨달았다. 민주당의 인권, 환경, 세계화, 민주화 등은 이들의 삶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공허한 헛소리에 불과했다. 엘리트 힐러리는 기득권 정치인으로서 트럼프를 비합리적이고 신뢰할 수 없는 인물이라고 비난만 했지 자신들의 분노를 이해 못 했다. 합리적 이념이나 가치의 정당성을 아무리 설파해봤자 삶이 파괴된 집단의 분노는 사그라지지 않는다.   우리도 세월호 참사로 분노한 가족들의 마음을 박근혜 정부는 공감하지 못했다. 이에 반해 야당과 운동권 정치세력은 이런 분노집단과 젊은 세대의 아픔을 간파하고 이를 정치화하는 데 성공했다. 청년들의 소득불균형 문제를 자극한 『왜 분노해야 하는가』라는 책이 나왔고, 청년실업은 늘고 고령화 사회에 노년층 부양의무까지 짊어져야 하는 청년들의 분노를 자극하여 ‘헬조선’을 입에 올리게 했다. 결국 분노의 정서가 모여 소위 촛불혁명까지 일어난 것이다.   분노의 정치는 또 다른 분노의 정치를 생산해낸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정치 양극화 현상이 바로 그것이다. 국회에서 정치인들의 논쟁을 보면 서로 분노를 자극하는 말싸움으로 일관되어 있다. 그리스 철학자 손병석 교수의 저서 『고대 희랍·로마의 분노론』을 보면 분노는 상대편에게 모욕을 당했을 때 강화된다. 소크라테스의 죽음도 법정 변론에서 보여준 ‘메갈레고리아’라는 수사학적 말하기 방식 때문이라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불경건죄와 아테네 청년 타락죄로 기소된 법정에서 청중을 경멸하는 모욕적인 말하기 태도로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했지만, 결국 이것이 아테네 배심원단의 분노를 야기하는 ‘실패한 설득술’이 되었다는 것이다.   정권이 바뀌면서 극단적 정치세력이 득세하고 있다. 이들은 분노를 자극하여 또 다른 분노를 일으키는 정치판을 만들고 있다. 손병석 교수는 “고대 희랍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분노를 제거하거나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분노를 적합하게 표출하고 분노를 순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가의 여부”라고 설명한다. 결국 분노한 집단들의 마음을 읽어내고 이들과 공감할 수 있는 정치 역량과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원로 석학 김우창 교수의 집담회 때 일이다. 리더가 조직을 위해 구조조정이 필요할 때 희생당할 조직원들을 고려해 이를 하지 말아야 하는가 하고 질문했다. 잠시 생각에 잠긴 후 김우창 교수는 조직의 생존과 발전을 위해 구조조정이 필요하다면 해야 되겠지만, 리더는 구조조정 당한 사람의 아픈 마음도 읽을 줄 아는 공감 능력이 필요하다고 담담히 답을 했다.   소득 양극화가 심화되고 불확실한 미래를 사는 우리는 작은 이익이나 권리의 침해에도 불공정하다고 쉽게 분노한다. 정치권은 이 분노의 마음을 자극하여 정치적 이익을 얻을 것이 아니라 분노의 마음에 공감할 줄 아는 정치를 해야 한다. 내년 총선에서도 중도층의 마음은 분노의 정치보다는 공감의 정치를 하는 정당으로 기울어질 것으로 기대한다.   염재호 태재대학교 총장·전 고려대 총장

    2023.11.01 00:37

  • [염재호 칼럼] 냉정과 열정 사이:귀납의 스캔들

    염재호 태재대학교 총장·전 고려대 총장 영화로도 유명한 『냉정과 열정 사이』는 일본 작가 에쿠니 가오리(江國香織)와 츠지 히토나리(辻仁成)가 연인 사이의 감정을 서로 다른 시각에서 집필한 연작소설이다. 스무 살 대학에서 만나 연인이 된 두 사람이 우연한 오해로 헤어져 이탈리아 피렌체와 밀라노에서 각자 생활하다가 십년 전 여주인공의 서른 살 생일에 피렌체 두오모 성당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떠올려 재회하게 된다. 하지만 사랑의 열정과 합리적 냉정 사이에서 방황하는 두 연인의 애틋한 사랑은 결국 결실을 보지 못하고 막을 내린다.     ■  「 거짓 정보와 주장으로 오염된 정치 귀납적 증명조차 잠재적 참에 불과 정치 오류 가능성 깨닫고 겸손해야 유권자들 이성적 판단 능력 키워야 」    작가 에쿠니 가오리는 작품 후기에서 “어떤 사랑도 한 사람이 가진 분량은 절반에 불과하다”라고 적었다. 두 사람의 사랑하는 열정을 보면 반드시 맺어져야 하는 귀납적 결론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냉정함은 이를 거부하는 운명을 택한다. 한 사람의 마음속에도 열정과 냉정이 언제나 교차하기에 인생의 길은 어느 한 쪽으로만 귀결되지는 않는다. 기네스 펠트로가 주연한 ‘슬라이딩 도어즈’라는 영화에서도 한순간 지하철을 타지만 않았다면 인생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바뀌게 되는 모습을 대조적으로 그리고 있다. 그렇기에 우연과 선택의 다양성 때문에 인생의 모습은 다채롭기 그지없고 수많은 소설이나 영화가 이를 감동적으로 묘사하게 된다.   인생에서 정답은 없다. 하지만 과학에서는 정답이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과학에서는 기존에 존재하는 많은 경험치를 바탕으로 가설을 세우고 실험을 통해 객관적 증거들을 분석하여 그 가설이 증명되면 이를 진실로 받아들이는 귀납적 방법을 택한다. 귀납적 방법으로 증명되면 정답으로 여긴다. 하지만 이것에도 한계는 있다. 흰 백조만 보다가 우연히 검은 백조가 나타나면 이 진실은 바뀌게 된다. 이처럼 귀납적 논리로 증명된 진실도 틀릴 가능성을 언제나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과학철학자 카를 포퍼(Karl Popper)는 ‘오류가능성(falsifiability)’이 존재해야만 과학이라고 했다. 과학은 새로운 발견이나 증명이 나타날 때까지만 잠정적 참이 된다. 언제나 변함없이 진실인 것은 믿음이고 종교의 영역에 속한다. 철학자 데이비드 흄(David Hume)도 “우리는 이성이 완벽하지 않다는 전제하에서 이성을 사용해야 한다”고 했다.   이처럼 과학에서조차 틀릴 수 있는 가능성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데, 정치에서는 마치 자신의 주장이 진실인 것처럼 교만한 주장만을 내세운다. 종종 과학적 논쟁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도 한다. 개인 방송이나 SNS는 거짓 정보에 기인한 주장들을 확대재생산하고 정치가들은 이를 이용하여 우리를 맹목적 추종으로 이끈다. 우리 정치만의 문제는 아니다. 트럼프, 시진핑, 푸틴 등 전 세계의 정치지도자들도 자신의 이익과 이념을 위해 여론을 호도하고 냉정한 판단을 흐리게 한다.   최근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사태도 과학적 판단보다는 정치적 논리가 지배하고 있다. 과학자들도 둘로 갈라져서 객관적 사실을 다르게 해석한다. 과학적 근거에 기초한 확률적 판단보다는 정치적 신념을 우선한다. 하지만 이런 판단은 해석의 영역이지 진실의 영역은 아니다. 흄은 귀납의 스캔들을 이야기하며, 틀릴 수 있는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있지만 맞을 수 있는 확률이 더 높으면 이를 받아들이는 것이 이성적 판단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유권자들은 이성적 냉정함을 갖고 판단해야지 정치권의 감성적 열정의 부추김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   포퍼는 그의 책 『열린 사회와 그 적들』에서 “우리는 짐승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인간으로 남고자 한다면 오직 하나의 길 열린 사회의 길이 있을 뿐이다”라고 주장했다. 전체주의를 넘어 자신도 틀릴 수 있다는 열린 사회를 이해할 때 정치 선진화는 가능해진다. 심리학자 조던 피터슨(Jordan B. Peterson)은 최근 저서 『질서 너머』에서 이렇게 조언한다. “복잡한 일을 제대로 해내기 위해서는 권력에 굶주려 이기적으로 현 상태를 옹호하는 사람과 진정한 보수주의자를 구별하고, 철학도 없이 자기기만에 빠져 무책임하게 반란을 꾀하는 사람과 진실로 창의적인 사람을 구별할 줄 아는 냉정한 눈이 필요하다.”   완벽한 증거를 가진 것 같은 귀납적 주장도 한계는 있다. 상대가 있는 사랑의 경우에도 한 사람은 절반의 분량만 갖고 있는데, 정치권은 자신이 전부를 갖고 있고 언제나 진리의 편인 것처럼 행동한다. 이제 여야 정치지도자는 겸손해야 한다. 자신들이 믿는 귀납적 진리의 오류가능성을 받아들여 상호 소통과 화합의 장으로 나가야 한다. 유권자들도 정치권의 일방적 주장에 동조하기보다는 객관적 설명력이 높은 주장을 잠정적 참으로 선택할 수 있는 안목을 갖추어야 한다. 과학의 냉정함과 정치의 열정 사이에서 보다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길거리마다 흩날리는 정치 현수막처럼 정보는 범람하고, 왜곡된 거짓 주장의 깃발이 나부끼는 혼돈의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염재호 태재대학교 총장·전 고려대 총장

    2023.09.06 00:35

  • [염재호 칼럼] 의대 열풍과 다양성 실종의 위험

    염재호 태재대학교 총장·전 고려대 총장 의대 진학 열풍이 불고 있다. 초등학생 네 명 중 한 명이 의대 진학을 희망한다고 한다. 학원가에서는 초중등 학생을 대상으로 한 의대입시반이 성행 중이다. 지역대학이 위기라고 하지만 의대만은 예외다. 정시모집에서 부산의 한 의대는 지난해 33 대 1, 대구의 한 의대는 29 대 1로 이삼년 사이에 지원율이 세 배 이상 높아졌다.   디지털 혁명으로 빅 데이터나 인공지능, 반도체나 컴퓨터공학을 전공하는 것이 미래를 주도할 것으로 전망되지만, 이른바 ‘SKY대학’(서울대, 고려대, 연세대)과 카이스트 등의 공학계열을 제치고 지방 의대가 더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심지어 SKY 대학을 자퇴하고 재수해서 지방 의대를 가려는 학생들이 줄을 잇는다. 지난해 서울대는 341명, 고려대는 855명, 연세대는 678명이 자퇴했다. 서울대의 경우 자퇴생 80% 이상이 이과생이어서 이들이 의학계열 진학을 위해 자퇴를 한 것으로 파악된다.     ■  「 급변하는 사회, 인기 직업도 변화 미래 읽지 못하는 자녀 교육 열풍 디지털 혁명으로 의료체계 변화 다양성으로 미래 사회 준비해야 」    과연 미래에도 의사가 되는 것이 최고의 보수와 직업안정을 보장해줄 것인가? 초등학생부터 의대 입시를 준비시키는 학부모들은 미래에도 현명한 선택을 했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 이처럼 다양성이 실종되어 어린 시절부터 한 가지 직업을 위해 아이들을 몰아치는 것이 우리 사회 미래에 바람직할까?   이른바 ‘VUCA’(변동하고, 불확실하며, 복잡하고, 모호한 사회) 시대를 맞아 오늘은 맞지만 내일은 틀릴 수 있는 일들이 너무 많다. 직업도 마찬가지다. IMF 외환위기 이후 안정적 직업에 대한 열망으로 교사나 공무원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한때 교직은 좋은 대우에 존경받고, 직업의 안정성과 정년 후 연금까지 보장되는 최상의 직업이었다. 그러던 교사직이 학령인구 감소, 학생과 학부모의 교권침해, 행정업무 과중, 교원 처우 하락 등으로 서이초등학교 젊은 교사의 자살에서 보듯 지금은 최악의 상태에 이르렀다.   교사노조가 교사 1만1377명을 대상으로 최근 조사를 했다. 그 결과 지난 일 년 간 교사 87%가 이직이나 사직을 고민했고 68.4%의 교사가 교사직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5년 사이에 교권 침해로 정신과 치료나 상담을 받은 교사도 26.6%나 된다고 한다. 10대 1을 넘던 교대 입시 경쟁률도 이제는 1대 1을 조금 넘는 데 그친다. 공무원도 작년 한국행정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재직기간 5년 이하인 대졸 하위직 공무원 65.3%가 이직할 의향을 갖고 있다고 한다. 이처럼 인기 있던 직업이 하루아침에 기피 직업이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 의사의 연봉이 OECD 최고수준이라고 한다. 게다가 의사면허는 자격증이기에 정년 없이 일할 수 있는 전문직에 속한다. 따라서 의사가 되기 위한 힘든 수련의 과정을 거치고 나면 평생 전문가로서 대접을 받고 안정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기에 선호되는 직업일 수 있다.   하지만 의료의 개념과 의사의 역할이 획기적으로 바뀌게 되면 오늘 누리는 의사라는 직업의 사회적 가치도 빠르게 바뀔 수 있다. 지금까지는 의사가 되기 위해서 의대에서 엄청나게 많은 의학지식을 외우고 익혀야 했다.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직업이기에 그처럼 많은 지식의 습득이 필요했고, 그런 전문성을 가진 의사의 진료와 처방을 환자들은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많은 의학지식이 의사의 전문영역에 머무르지 않고 누구나 접할 수 있는 보편지식으로 바뀌게 되면 이야기는 많이 달라진다.   미국 최고의 심장병 전문의 에릭 토폴(Eric Topol)이 쓴 『청진기가 사라진 이후』를 보면 의료의 미래는 빠르게 바뀐다. 이 책의 영어 원제목은 ‘이제 환자가 당신을 볼 것이다(The Patient Will See You Now)’다. 디지털 혁명으로 의료지식의 독점성이 사라지면서 의사의 절대 권위가 급속히 붕괴하여 의료민주화가 일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게다가 인공지능이 의료영역에 들어와 디지털 헬스케어가 확산하고 원격진료가 보편화하면 의사의 역할도 변화할 수밖에 없다. 더 이상 개업의 중심의 의료체계가 아니라 인공지능을 활용한 고도화된 의료서비스가 주를 이루게 된다.   인류의 수명연장에 따른 의료보건 서비스의 수요가 폭증하면서 의료계라는 좁은 영역의 울타리도 서서히 붕괴하고 있다. 이미 기계공학과나 전자공학과에서 의료기기 개발을 주도하고 있다. 기계공학과 교수 중 상당수가 의료 관련 연구를 하고 의료기기 스타트업 회사를 창업한다. 지식을 전달하던 교사의 역할이 디지털 학습과 원격강의로 급격히 변하듯 디지털 헬스케어가 확산하면 개업의의 역할은 한계에 부딪히게 될 것이다.   미래사회 변화 속에서 오늘 인기 있는 직업이 내일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모른다. 히포크라테스 선서에서 보듯 의사는 인간의 생명을 구하는 숭고한 성직이다. 의대 열풍이 단순히 직업의 안정성과 경제적 보상만을 추구하기 위한 현상이라면 미래의 개인도 사회도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 다양성이 실종된 사회의 미래는 암울할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염재호 태재대학교 총장·전 고려대 총장

    2023.08.09 00:58

  • [염재호 칼럼] 건국의 의미와 제헌의 가치

    염재호 태재대학교 총장·전 고려대 총장 한 나라의 건국은 새로운 통치 시스템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것이 혁명에 의해 이루어지건, 식민지로부터 독립하여 이루어지건, 건국의 기초는 헌법이다. 이전 왕정 시대에는 그러한 국민적 합의 없이 절대 권력을 가진 왕이 세습하며 지배하는 사회였지만 근대국가가 형성되면서 국가는 헌법적 기초하에서 새롭게 탄생한다.   미국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다음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이 대통령제와 삼권분립의 정치체제를 헌법에 기초하여 창조해냈다. 왕이 독점해왔던 국가의 권력을 입법, 행정, 사법 세 개의 권력으로 나누고 국가의 최고책임자도 왕이 아닌 대통령으로, 국민 선택에 의해 일정 기간 국가권력을 위임받아 국가를 다스리는 형태로 설계한 것이다.     ■  「 헌법은 국가 정체성의 근원 가치 제헌절은 대한민국 출범의 상징 공휴일서 제외한 정부의 몰이해 제1공화국과 제헌 의미 되새겨야 」    우리나라는 1945년 일제 강점기에서 해방되어 미군정 3년을 거친 후 1948년 5월 31일 초대 국회가 제헌국회로 출범하여 대한민국의 헌법을 제정했다. 헌법 초안은 유진오 고려대 교수에 의해 작성되었는데, 임시정부의 법통과 정신을 계승하여 임시정부 헌장에 명시된 민주공화제를 헌법 1조로 삼았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헌법 1조에 이어 헌법 2조는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하여 오늘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의 기본 틀을 세웠다.   초대 국회에서 마련된 헌법은 1948년 7월 12일 국회를 통과하여 17일에 서명, 공포, 발효되어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을 탄생시켰다. 민족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 태조 이성계가 조선의 초대 왕으로 즉위한 날인 7월 17일을 제헌절로 삼았다고도 한다.   이런 제헌절이 3·1절, 광복절, 한글날, 개천절과 함께 5대 국경일임에도 불구하고 공휴일은 아니다. 노무현 정부에서 주 5일 근무제를 추진하면서 쉬는 날이 늘어나게 되었다는 이유로 이날을 공휴일에서 제외했고, 이명박 정부가 이를 시행했다. 하지만 국가의 탄생을 알리는 제헌의 가치가 이처럼 소홀하게 취급될 수는 없다. 우리나라에 국가 종교가 없는데도 석가탄신일, 개천절, 성탄절은 공휴일인데, 제1공화국으로 시작된 우리나라 국체의 근간인 제헌절이 노는 날들이 많다는 이유로 공휴일에서 제외한 정부의 판단은 이해하기 어렵다. 유치원, 초중고에 이르기까지 요즘 아이들은 공휴일이 아니기 때문에 제헌절이 무슨 날인지 잘 모른다고 한다.   노르웨이는 5월 17일 헌법제정일에 마을마다 퍼레이드를 하며 대축제로 기념한다. 인도, 폴란드, 덴마크, 스페인, 우크라이나 등 수십 개 국가에서도 헌법제정일을 공휴일로 지정하여 그 의미를 기리고 있다. 일본도 5월 3일을 헌법기념일로 제정하여 평화헌법 수호를 외치고 있다. 대통령은 취임식에서 헌법 준수를 골자로 한 취임선서를 한다. 국회의원들도 자신들이 헌법기관임을 내세우며 헌법을 준수할 것을 선서한다.   우파정부에서 기업 이익을 위해 공휴일을 줄이려고 제헌절을 공휴일에서 제외했다면 헌법의 가치를 무시한 것이다. 혹시 좌파정부에서 대한민국 제1공화국 출범의 정통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 근거가 되는 헌법적 가치를 훼손하는 일에서 기인한 것이라면 우려할 만한 일이다. 다행히 보수진영뿐 아니라 더불어민주당 김해영, 한정애 의원이 20대 국회에서, 윤호중 의원이 21대 국회에서 제헌절을 다시 공휴일로 지정하는 법률안을 발의해 기대를 해본다.   최근 김황식 전 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 건립 추진위원회’가 발족하였다. 김홍업 김대중평화센터이사장을 비롯한 전직 대통령 아들 다섯 명이 모두 고문으로 위촉되었다. 한화갑 한반도평화재단 총재를 비롯한 진보, 보수진영의 많은 원로가 기념관 건립 추진에 뜻을 같이했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대통령의 기념관이 논란 속에서 아직도 추진되지 못하고 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영화인 신영균 회장은 서울 한강 변 개인 부지 4000평을 기념관 건립을 위해 기부하겠다고 했다.   영국 기자가 1952년 한국의 개헌과정을 지켜보면서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하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피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다”라고 비아냥거렸지만, 우리는 군사독재정권의 개헌시도에 반대하고 헌법의 기본 가치를 지켜내면서 오늘의 민주주의와 세계 10위권의 경제발전을 이루어냈다. 그 출발선이 제헌이고 제1공화국이다. 그런데 ‘헬조선’을 젊은 세대에게 전파하며 건국의 의미와 제헌의 가치를 폄훼하는 세력이 있다면 이는 막아야 한다. 건국 초기의 혼란이나 전직 대통령들의 공과는 오랜 기간에 걸친 역사적 평가에 맡겨 두어야 한다. 학창시절 읽었던 수필가 김소운의 목근통신에 나오는 ‘나병 환자의 조국’이라는 대목이 잊히지 않는다. “내 어머니는 ‘레프라(나병 환자)’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우리 어머니를 클레오파트라와 바꾸지 않겠습니다.” 오늘 민주화와 경제 선진화를 이룬 출발점은 대한민국 건국이고 그 근간은 제헌임을 명심해야 한다.   염재호 태재대학교 총장·전 고려대 총장 

    2023.07.12 00:58

  • [염재호 칼럼] 검은 백조의 위기

    염재호 태재대학교 총장·전 고려대 총장 영어 블랙 스완(Black Swan)의 우리말 번역 ‘검은 백조(白鳥)’는 모순에 가깝다. 그래서 존재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역사상 획기적 사건들은 이처럼 말도 안 되는 일에서 시작된다. 일본의 하와이 진주만 기습, 미국의 9·11 테러,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건으로 촉발된 세계 금융위기, 코로나 팬데믹까지 예기치 못한 사건은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린다.   예견할 수 없었고 당연히 존재 가능성이 없을 것이라고 믿었던 사건들을 검은 백조, 즉 블랙 스완이라고 한다. 월가에서 일하다 철학 에세이스트로 전향한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Nassim Nicholas Taleb)는 2008년 월가의 위기를 예견한 것으로 유명하다. 탈레브는 그의 저서 『블랙 스완』을 통해 우리가 합리적이라고 믿는 정규분포상의 현상들보다 기준에서 크게 벗어난 아웃라이어가 더 중요하다고 한다. 매년 조금씩 수익을 쌓아가던 기업도 CEO의 사소한 실수, 회계부정의 발각, 시장 상황의 급변으로 하루아침에 망하곤 한다. 그래서 기업에서는 최근 위기관리(Risk Management)를 일상적인 경영관리보다 훨씬 중요하게 취급한다.     ■  「 예견 못한 검은 백조 출현 가능성 전쟁, 전염병, 핵 등 곳곳에 위험   세계화 붕괴와 각자도생의 시대 검은 백조 출현 전조에 대비해야 」    역사의 변곡점은 합리적 예측을 거부한다. 우연히 발생한 일이 역사의 큰 흐름을 바꾸는 경우가 흔하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검은 백조의 등장도 자세히 보면 전조가 있게 마련이다. 단지 이런 전조를 무시하기 때문에 검은 백조의 출현으로 충격을 받고, 그 폐해도 심각한 것이다.   검은 백조의 등장으로 참혹한 전쟁의 폐해를 우리는 겪었다. 1949년 7월 신성모 국방장관은 명령만 있으면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을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다. 하지만 그해 말 국민당 정부는 공산당에 의해 타이완으로 쫓겨 갔다. 1946년 국민당 장제스(張介石) 군대와 공산당 마오쩌둥(毛澤東) 군대의 내전이 시작되었을 때만 해도 당연히 장제스의 군대가 마오쩌둥의 군대를 압도할 것으로 예상했다. 미군의 군사지원을 받고 있던 국민당 군대는 430만명이었고 공산당 군대는 128만명에 불과했지만 결국 마오쩌둥이 장제스를 1949년 12월 타이완 망명의 길로 내몰았다. 이걸 보고도 공산당 김일성의 침략의도를 간과했다가 이듬해 6·25라는 검은 백조의 출현을 맞게 된 것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도 또 하나의 검은 백조의 출현이다. 구소련에서 독립한 우크라이나는 독립 당시 핵탄두 1804개, 대륙 간 탄도 미사일 176기, 전략 핵 폭격기 40대를 보유한 세계 3대 핵보유국이었다. 미국과 러시아의 해빙 무드에 따라 소련의 일부였던 우크라이나, 카자흐스탄, 벨라루스 등이 1994년 부다페스트 협약을 통해 1996년까지 보유하고 있던 핵무기를 모두 러시아로 넘겨주어 폐기하는 데 서명했다. 하지만 세계 최대의 곡창지대인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의 야욕은 크림반도의 일부를 점령하더니 결국 우크라이나 본토를 침략하는 대규모 전쟁으로 이어졌다. 당시 부다페스트 협약을 주도했던 클린턴 대통령은 최근 인터뷰에서 자신이 우크라이나에 핵무기를 포기하도록 설득한 것은 끔찍한 실수였다고 고백했다. 백조는 희다고만 생각하다가 검은 백조가 나타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코로나 사태 전에 빌 게이츠는 신종 바이러스의 전 세계 확산 위기를 경고했다. 하지만 누구도 그런 검은 백조의 출현을 믿지 않았다. 오히려 코로나 위기가 발생하자 빌 게이츠가 바이러스를 확산시킨 게 아니냐고 음모론을 제기하는 어처구니없는 일까지 벌어졌다. 유아사망률 추세를 보고 소련의 붕괴를 예견했던 프랑스의 인구역사학자 에마뉴엘 토드(Emmanuel Todd)가 최근 일본 학자들과 대담한 내용을 일본에서 출간한 『노인지배국가 일본의 위기(老人支配國家 日本の危機)』를 보면, 그는 코로나 사태로 세계화의 물결이 패배를 선언했다고 주장한다. 경제선진국인 프랑스조차 세계화로 마스크 공장 같은 단순한 제조업 기반이 붕괴하여 코로나 사태가 일어나자 마크롱 정부가 우왕좌왕한 것을 비판한 것이다. 글로벌 밸류 체인에서 보호주의 현상이 나타나면 경제선진국도 꼼짝없이 위기 대응을 못 해 쩔쩔매게 만든다. 그러면서 토드는 미국을 어디까지 신뢰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과 함께 일본은 핵을 보유해야 한다고 권고한다.   세계질서가 요동치고 트럼프 이후 새로운 미국이 등장하면서 세계화보다 각자도생이 현실화되고 있다. 백조는 모두 희다고 생각하며 북한도 따뜻한 햇볕을 쬐면 문을 활짝 열 것이라고 기대했던 우리도 핵보유국이 된 북한이라는 검은 백조의 출현을 어떻게 맞을 것인지? 시진핑 주석 3연임 이후 친강(秦剛) 중국 외교부장이 등장하면서 최근 싱하이밍 주한 중국대사뿐 아니라 주일, 주프랑스, 주필리핀 등 많은 나라 중국대사들의 거친 언사는 또 하나의 검은 백조 출현의 전조는 아닌지? 심각한 지정학적 위기가 검은 백조가 되어 다가오고 있을 때 모두 긴장하고 깨어 있어야 한다.   염재호 태재대학교 총장·전 고려대 총장

    2023.06.14 00:58

  • [염재호 칼럼] 네오 르네상스와 새로운 사회문화 질서

    염재호 태재대학교 총장·전 고려대학교 총장 요즘 신문이나 TV뉴스에서 피동으로 표현되어야 할 말을 모두 능동으로 표현한다. 예를 들어 “태풍이 확산되는” 것이 아니고 “태풍이 확산하고”, “고물가로 소비심리가 약화되는” 것이 아니고 “고물가로 소비심리가 약화하고”, “논란이 확산되자” 대신 “논란이 확산하자”라고 표현한다. 사람이 주체가 되어 사람의 관점에서 현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객체인 현상이 주체가 되는 표현이 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아니라 사물이 대접을 받기도 한다. 고객을 존대하기 위해 카페에서 “커피가 나오시고”, “빈자리가 있으시고”라는 표현을 종종 쓴다. 회의에서도 “의견이 있으면”이 아니라 “의견이 있으시면”이라고 한다. 존칭을 사용하려면 “의견을 갖고 계시면”이라고 해야 하는데 객체를 주체로 만들어 존칭을 쓴다.     ■  「 디지털 혁명으로 기존 질서 재편 무시됐던 객체 주체화되며 혼란 새로운 주체의 권력남용 우려도 네오 르네상스 신질서 만들어야 」    그동안 객체를 너무 무시했던 것도 문제였다. 지구에서 주체였던 인류가 20세기에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하면서 우리가 아끼고 가꾸면서 활용해야 할 객체인 지구가 몸살을 앓게 되어 공해, 쓰레기, 기후위기 등 인류의 지속가능성이 위협을 받게 되었다. 객체를 홀대하고 착취하게 되면 결국 주체도 피해를 보게 되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주인을 즐겁게 해주기 위한 개와 고양이도 객체였던 애완견의 자리에서 벗어나 인간의 반쪽이라는 반려(伴侶)의 대접을 받으며 주체로 등장했다. 어릴 때 읽었던 이솝우화 “팔려가는 당나귀”가 떠오른다. 당나귀를 몰고 가다가 힘이 들어 아들을 태우고 가니까 자식이 버릇없다고 해서 아버지가 타고 가니 어린 자식이 불쌍하다고 한다. 결국 두 사람이 함께 타고 가니까 당나귀를 학대한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두 부자가 당나귀를 메고 간다는 이야기다.   애완견을 유모차에 태우고 다니는 풍경도 종종 보게 된다. 말 못하는 애완견에게 자신을 엄마, 아빠로 칭하는 주인도 흔하다. 며칠 전 프란치스코 교황이 “내 아기를 축복해주세요”라고 강아지를 갖고 온 여성을 나무라며 많은 어린이들이 굶주리는데 나에게 작은 개를 가져왔느냐고 비판했다고 한다. 이전에도 교황은 일부 가정이 아이를 낳기보다 애완동물을 기르고 있는 현실을 이기적인 행동이라고 비난했다. 심지어 동물과의 관계 맺음이 아이들보다 더 쉬워, 자녀보다 동물을 우선시하는 ‘문화적 퇴보’ 현상이 나타났다고 교황은 한 인터뷰에서 한탄했다.   르네상스는 14세기에서 16세기에 하나님이 사회질서의 중심이었던 중세시대를 벗어나 인간 중심으로 사회질서가 재편된 문화혁명이었다. 이는 인쇄술이라는 새로운 미디어의 등장과 성서번역으로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확산되었다. 지금 다시 인류문명사에 네오 르네상스의 시대가 새롭게 펼쳐지고 있다. 디지털 혁명에 의한 SNS, 유튜브 등 개인 미디어의 발달로 다양한 의견이 손쉽게 일반대중에게 전달되기 시작했다. 기존의 사회시스템에서는 잘 들리지 않던 목소리가 가감 없이 대중에게 전달되면서 기득권 세력이 도전을 받게 되었다. 객체의 주체화뿐 아니라 소외되었던 다양한 주체들의 영향력이 증대되고 있다. 이런 현상을 모이제스 나임(Moises Naim)은 『권력의 종말』시대가 왔다고 설명한다.   학생과 교사, 고용인과 피고용인, 주인과 고객, 장애인과 비장애인, 노인과 청소년 등 다양한 사회관계에서 영향력이 변하면서 기존 질서가 재편되고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에서는 2017년부터 성소수자들을 위해 모든 공공건물에 성중립 화장실을 설치하는 것을 의무화했다. 하지만 남녀 구별 없는 화장실 때문에 많은 여성은 불편함을 느낀다고 한다. 미국의 많은 대학에서는 이름 뒤에 자신의 사회적 성인 젠더(gender) 표시를 해야 한다. 생물학적 성(sex)보다 사회적 성인 젠더가 사회관계에서 우선시된 것이다.   권력이 적은 위치에 있던 개인이나 집단이 새로운 권력을 갖고 남용할 때 갈등이 유발된다. 일본 아키타현의 한 관광버스 회사는 고객들의 지나친 갑질에 대해 “손님은 신이 아니다”라는 신문광고를 게재했다. 고객에 의해 회사나 종업원이 지나치게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더 이상 참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최근 우리나라 교육계의 한 조사에 의하면 지난 1년간 교사 이직이나 사직을 고민한 적이 있다고 답한 교사가 87%에 달하고, 교직 생활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답이 68%에 이른다고 한다. 지난 5년간 교사 26.6%가 교권침해로 정신과 치료나 상담을 받은 적이 있다고 한다. 학생이나 학부모가 교사를 희롱하고, 폭행하고, 고발하는 것을 뉴스에서 보는 것은 흔한 일이 되었다.   이제 객체의 존재도 인정하고 기존에 소외되었던 개인과 집단의 목소리도 존중해야 하지만 이로 인해 또 다른 권력관계가 발생하고 혼란이 야기되는 것은 막아야 한다. 네오 르네상스 시대에 객체와 주체, 소수와 다수가 서로의 위치를 지키며 상호 존중하고 조화를 이루는 사회적 질서를 지혜롭게 만들어내야 한다. 이것이 21세기 우리가 풀어야 할 필수과제이다.   염재호 태재대학교 총장·전 고려대학교 총장 

    2023.05.17 00:58

  • [염재호 칼럼] 사회문제 해결과 국가재정

    염재호 고려대 명예교수·전 총장 십여년 전의 일이다. 이탈리아 밀라노의 한 호텔 카페에서 『노동의 종말』, 『수소혁명』, 『소유의 종말』, 『공감의 시대』 등으로 유명한 미래학자 제러미 리프킨(Jeremy Rifkin)을 만났다. 만나자마자 자신을 미래학자로 부르지 말고 사회혁신가로 불러달라고 했다. 미래를 보다 나은 사회로 만들기 위한 대안을 찾다가 미래에 대한 관심이 생기게 되었을 뿐이라고 했다. 이야기에 빠져들다 보니 한 시간 예정 인터뷰가 세 시간으로 늘어났다.   리프킨은 대학 졸업 후 취업보다 사회혁신가가 되는 길을 택했다. 대학 시절 월남전 참전반대 운동을 치열하게 벌였던 운동권 학생이었기 때문이다. 사회 문제들을 하나하나 객관적으로 분석하여 사회를 바꾸고 싶었다고 한다.     ■  「 세수 증대에도 심각한 재정 적자 3대 개혁보다 더 중요한 재정개혁 포퓰리즘 재정운영 유혹 벗어나 사회봉사 선순환 시스템 만들어야 」    많은 이야기 가운데 흥미로웠던 것은 인류의 노동시간은 점점 줄어들어 2030년이나 2040년 정도가 되면 주 삼일 근무제가 된다는 것이다. 1940년대 미국도 주 70시간 노동을 했지만 이제 40시간 이하가 되었고 북유럽은 주 30시간 정도 일을 한다. 주 삼일 근무가 되면 나머지 이틀 정도는 자신의 취미활동을 하고 이틀 정도는 사회봉사나 종교활동을 하게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산업사회가 지나가고 디지털 지식사회가 되면 시간으로 일하기보다는 머리로 일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 정치권이 아직도 노동시간을 갖고 정쟁을 벌이는 것을 보면 미래에 대한 안목이 부족해 안타까울 뿐이다.   운동권 출신이지만 사회문제 해결에 국가재정이 투입되는 것에 대해서는 소극적이었다. 사회가 선진화하면 국가가 나서서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기보다는 건전한 상식을 가진 개인들이 사회문제 해결에 앞장서야 한다는 것이다. 노블리스 오블리쥬는 부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일상생활에서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시민단체들은 뜻을 같이하는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로 운영되어야지 정부의 지원금을 받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입장이다.   심각한 사회문제인 저출산에 대해서도 국가재정으로 해결할 것이 아니라 아이를 사회가 같이 키워낼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현재 영유아를 돌보아주는 어린이집은 기본 보육이 아침 9시부터 오후 4시까지지만 연장보육을 신청하면 아침 7시 반부터 저녁 7시 반까지 가능하다. 하지만 바쁘게 사회활동을 하는 젊은 부부들은 이 시간도 부족한 경우가 많아서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손주 등하원을 부탁할 수밖에 없다.   혹시 돌봄 서비스를 24시간 가능하게 하면 안 될까? 리프킨의 아이디어를 빌리면 이렇게 하면 된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자기 손주만을 돌보는 것이 아니라 저녁에도 보육원에서 여러 아이를 함께 돌보아 주는 보육 봉사활동을 하고, 마치 헌혈한 것처럼 그 봉사시간을 인정받는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자신이 나이 들어 요양 서비스를 받을 때가 되면 그 시간만큼 간병인 서비스를 무료로 받을 수 있는 사회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다. 헌혈증서처럼 대체 불가능한 토큰(NFT)에 기록해서 평생 다양한 봉사시간을 축적해 필요할 때 활용하면 된다. 하지만 지금은 보육지원도 노인 요양도 국가재정으로 지원한다.   대공황 이후 케인스주의의 사고가 아직도 넘쳐나고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선진국이라는 나라들이 국가재정을 투여하는 방식으로 사회문제를 해결해왔기 때문에 이들 국가는 적자재정에 시달리고 있다. 심지어 정부예산의 삼 분의 일을 빚 갚는 데 쓰기도 한다. 정치인들은 국가재정으로 표를 얻는 데 혈안이 되어 포퓰리즘 정치를 하고 관료들은 무사안일로 국가재정을 방만하게 운영한다. 자기 돈 같으면 아껴서 쓸 것을 세금으로 걷은 돈은 인심 쓰듯이 함부로 나누어준다.   지난 정부에서 한 젊은 사무관이 재정적자의 심각성을 지적하고 기재부를 떠났다. 정치권의 공격은 이 젊은 사무관이 극단적 선택을 고민할 정도로 매서웠다. 세계경제의 불황으로 올해 2월 벌써 우리나라 재정적자가 30조원을 넘었다. 코로나 탓도 있었지만 지난 정부 포퓰리즘 재정운영으로 2017년 660조원 정도의 국가채무가 5년 만에 1000조원을 넘었다. GDP대비 국가 순채무비율이 미국과 프랑스에서는 낮아지고 있는데 지난해 우리나라는 2019년 대비 두배 이상으로 증가했다.   우리나라 세금수입은 부동산 폭등, 법인세 증가 등으로 2018년 283조원에서 2022년 384조원으로 지난 정부 4년 사이에 35% 이상 증가해 100조원 이상 늘어났다. 그런데 국가채무는 같은 기간 400조원 가까이 늘어났다. 이처럼 늘어난 세금 수입에도 채무가 증가한 것은 국가의 포퓰리즘 재정운영 때문이다.   이제 기획재정부는 세수확보에만 혈안이 되기보다는 재정지출을 줄이는 데 온 힘을 기울여야 한다. 돈은 많이 버는 것보다 절약하며 쓰는 것이 더 중요하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지금 정부도 표를 의식해서 포퓰리즘 재정운영의 유혹을 벗어버리지 못할 것 같아 걱정이다. 윤석열 정부에서 노동·연금·교육 3대 개혁과제보다 더 시급한 것은 재정개혁이다.   염재호 고려대 명예교수·전 총장

    2023.04.19 00:45

  • [염재호 칼럼] 완전히 새로 짜야 할 저출생 정책설계

    염재호 고려대 명예교수·전 총장 막강한 군사력을 자랑하던 스파르타는 기원전 371년 마케도니아의 침공으로 멸망했다. 강력한 군인만 키워내는 국가의 인구정책이 전쟁에서 용맹성은 낳았지만, 미약한 영아는 살해하고 결혼도 건강한 남아를 낳는 수단으로만 인식하는 바람에 결국 국가소멸을 초래한 것이다. 노동력은 노예로 충당하면서 엄격한 금욕주의로 길들었던 스파르타는 정복한 도시의 부가 편입되기 시작하면서 사치와 향락에 빠졌다. 이런 과정에서 가정과 출산을 소홀히 한 스파르타는 100년 만에 인구가 8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들며 군대를 충원할 인구마저 부족해 결국 멸망했다. 금욕주의와 강인한 남아선호 정책이 일시적으로는 용맹한 군사력을 키울 수 있었지만, 장기적으로는 국가 존망에 치명적 약점이 된 것이다.     ■  「 인구 줄어 멸망한 스파르타처럼 국가위기 된 세계 최하위 출생률 저출생 예산 획기적 개편 통해 사교육과 보육 시스템 손봐야 」    세계 최하위의 출생률을 보이는 우리나라의 미래가 심각하다. 지난 50년간 세계 경제가 약 6배 성장하는 동안 우리 경제는 400배 이상 초고속 성장을 이루었다. 경제성장과 민주화의 두 마리 토끼를 잡아 선진국이 되었지만, 풍요로움과 개인주의의 결과로 비혼과 저출산이 확산하고 있다.   우리나라 못지않게 유교적 전통이 강하고 빠른 경제성장을 이룬 다른 아시아 국가들도 비슷하다. 우리나라의 2022년 출생아 수는 24만9000명이고 출생률은 0.78로 OECD 국가 중 최하위를 나타냈다. 1960년 5.95명에 달했던 합계출산률은 2023년에는 0.88명으로 떨어질 전망이다. 같은 기간 대만도 5.80명에서 1.15명, 홍콩도 5.07에서 0.77명, 싱가포르도 5.76명에서 1.04명으로 하락해 세계 최하위 수준의 합계출산률을 보인다. 유교적 가족주의 전통으로 자신들이 받은 부모의 헌신을 자녀들에게 해줄 자신이 없는 데다 여성의 사회참여는 늘어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우리 정부는 저출생 대책 예산으로 작년 46조원을 포함해 2006년부터 총 271조원을 사용했다. 작년 예산을 출생아 수로 나누어보면 1인당 1억8000만원이 넘는 액수다. 하지만 이처럼 많은 예산 투입에도 불구하고 출생률이 끝없이 하락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국책사업이 지정되면 각 부처는 앞 다투어 자신들의 이익에 맞는 사업 예산을 이곳에 끼워 넣곤 한다. 국회의원들은 지역구를 위해 예산을 챙긴다. 그러다 보면 원래 취지와는 동떨어진 예산 집행이 일어난다. 미국에서도 이런 예산 챙기기 현상을 두고 마치 돼지들이 여물통에 몰려들어 먹이를 탐하는 것과 같다고 해서 ‘돼지 여물통(pork barrel)’이라는 표현을 쓴다.   한 해 수십조 원에 달하는 저출생 대책 사업 예산도 이처럼 엉뚱한 곳에 쓰였다. 중소벤처기업부의 고성장기업 수출 역량 강화 사업, 국방부의 군인력 구조개편 사업, 노동고용부의 청년취업진로 지원 사업 등 저출생과 직접 관련이 없는 다양한 사업에 활용되었다. 이런 나눠먹기식 예산이 저출생 대책 예산의 60%에 달한다고 한다.   젊은 부부들에게 아이 낳기를 꺼리는 이유를 물어보면 사교육비와 보육의 문제가 제일 심각하다고 한다. 2022년 약 26조원에 달하는 우리나라의 사교육비는 청년 부부의 가계에 너무 큰 부담이 된다. 2021년 OECD 교육통계에 의하면 교육비 전체에서 사교육비가 차지하는 비율은 OECD 국가 평균이 16%인데 우리는 그 두 배가 넘는 36%에 달한다. 보육도 마찬가지다. 맞벌이 부부의 경우 어린이집과 유치원 방과 이후에도 아이들을 돌봐줄 수 있는 제도가 미흡해 양가 부모에게 의존한다. 아이들을 돌봐줄 입주 도우미를 구하려면 한 달 300여만 원 가깝게 든다고 한다. 이러니까 맞벌이 부부가 아이를 갖는 것은 엄두를 내기 어렵다.   이제 저출생 대책을 위한 정책 설계는 완전히 새롭게 짜여야 한다. 공교육 정상화를 통한 사교육비 절감과 24시간 보육이 가능한 육아 시스템이 갖추어져야 한다. 에듀테크의 발전으로 다양한 디지털 매체를 활용한 학교 밖 교육이 사교육 시장을 대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칸 아카데미’(글로벌 비영리 교육 서비스) 같은 무료 과외 교습이 활성화되어 제공되어야 하고, 이를 위해 자원봉사자들이 디지털화된 과외 교습 프로그램을 지원해주어야 한다. 또한 게임화한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어 개인 맞춤형 디지털 학습이 가능하게 해야 한다. 영유아 보육의 종합적 지원책으로 유보통합을 통해 교육과 돌봄 서비스가 함께 제공될 수 있게 해야 한다. 맞벌이 부부가 저녁에도 걱정 없이 아이를 맡길 수 있는 보육 시스템이 만들어져야 저출생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다.   기획재정부도 저출생 대책 예산이 직접 지원에만 활용되도록 엄격히 관리하고 직접 지원도 퍼주기식 포퓰리즘 지원이 아니라 선택과 집중으로 효과성을 높여야 한다. 세계 최하위 출생률은 국가위기라는 인식하에 종합적인 정책설계가 새롭게 구축되지 않으면 우리나라는 결국 존망의 위기를 맞게 될 것이다.   염재호 고려대 명예교수·전 총장 

    2023.03.22 01:02

  • [염재호 칼럼] 문명의 대전환과 기업의 역할

    염재호 고려대 명예교수·전 총장 우리나라 각 사회기관의 역할수행평가에 대한 한국리서치의 작년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정부를 비롯한 공공기관보다 대기업에 대한 긍정평가가 월등히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각 기관이 자신의 역할을 잘하고 있는지 물은 결과, 10개 대상기관 가운데 코로나 등의 영향으로 의료기관이 72%로 가장 높았고, 다음으로 대기업이 52%로 2위였다. 대학교는 36%, 시민사회단체가 29%, 정부 및 공공기관이 26%, 종교기관이 21%, 언론사가 16%였으며, 정당은 5%에 불과한 신뢰도 수준을 보였다.   지난해 삼성전자 매출액은 300조원으로 우리나라 국내총생산(GDP)의 14.5% 규모다. 현대자동차는 142조원, SK㈜는 134조원, 기아는 86조원, LG전자가 83조원의 매출을 기록한 것만 보아도 우리나라 GDP 총액 2057조원과 비교하면 대기업의 역할이 지대한 것을 알 수 있다.     ■  「 문명전환기 기업의 끊임없는 혁신 경제 기여에 ESG 더하며 신뢰 상승 공적연금 대신 기업연금제 강화 등 사회문제 해결 앞장서는 기업 기대 」    최근 기업들은 회사와 주주의 이익만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책임도 강조하는 ESG(환경·사회·거버넌스) 경영으로 획기적인 혁신을 하고 있다. 대한상공회의소는 신기업가정신을 선포하고, 포스코는 기업시민 활동을 통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한다. 이제 기업은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지 않고는 장기적인 경제 이익을 보장받을 수 없게 되었다. 변화하지 않으면 생존하기 어렵기에 기업은 다른 어느 사회조직보다 빠르게 혁신한다. 반면 대학, 정부, 언론, 종교기관, 노동조합, 정당 등은 21세기 문명의 대전환기를 맞아도 변화에 무디고 혁신하려는 의지도 약하다. 문명 대전환의 해일이 몰려와 엄청난 변화를 요구하는데도 기득권에 안주해 20세기 틀에서 조금도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최근 기업의 변화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세기 관료제적 운영방식을 버리고 21세기형 유연한 근무환경을 조성하는 기업들이 늘고 있다. 판교의 정보·통신(IT)기업들뿐만 아니라 다양한 회사에서 피트니스, 사우나, 수면실, 음악감상실, 실내골프연습장, 무료 식음료 코너를 갖추는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자기 자리도 없고 출퇴근 시간 제약도 없는 자율근무를 하는 회사도 늘고 있다. 재택근무가 가능하고 유연한 휴가제를 채택하기도 한다. 배달의 민족으로 유명한 우아한 형제들에서는 근무지 자율선택제를 통해 온라인으로 협업이 가능하면 전 세계 어디에서나 근무할 수 있다고 한다. 직원들이 해외에서 한 달 살기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태국 치앙마이, 일본 도쿄, 호주 퍼스에서 현지생활을 즐기고 체험하며 일을 한다. 심지어 일 년 살기를 제주에서 하는 직원도 있다. 이제 디지털 혁명으로 근무환경의 제약 없이 일과 삶이 일체가 되어 어디에서든 일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비혼, 저출산, 높은 실업률, 잦은 이직 등과 같은 사회적 이슈에 기업들도 팔을 걷어붙여야 할지 모른다. 최근 우리나라뿐 아니라 프랑스에서도 연금개혁이 최대 정치이슈가 되었다. 정부가 주도하는 국민연금제도에 심각한 재정적자가 예상되자 미래 세대에게 더 많은 부담을 주고 더 적은 연금을 받게 제도를 개편하려 한다. 이에 젊은이들이 부당하다고 저항하는 것은 당연하다.   노인복지를 정부의 공적연금으로만 해결할 이유는 없다. 독일 기업들은 일찍이 직원들의 노인복지를 앞장서서 풀어나갔다. 티센크루프 엘리베이터로 유명한 독일의 철강회사 크루프는 이미 1858년에 기업 연금제도를 채택했다. 근속 5년이면 최종연봉의 15%, 35년 근속하면 75%, 사망하면 부인에게 50%, 자녀에게 5%가 지급된다. 랜덤하우스, 펭귄북스, BMG음반, RTL방송 등을 소유한 유럽 최대의 복합미디어 기업인 독일의 베텔스만도 기업연금제도를 통해 30년 근속한 직원에게 급여 42%를 평생 지불한다. 더 나아가 회사이익참여제도를 통해 기업의 세전 이익 전액을 종업원들에 나누어주고, 이를 다시 회사에 연 2%의 금리로 대출하되 25년간 출금할 수 없게 한다. 이를 통해 회사는 법인세 부담을 줄이고 안정적 자금을 확보할 수 있다.   이제 국민연금에서 사학연금처럼 직원과 회사가 공동으로 부담하는 기업연금으로 갈아타는 방안도 고려해볼 수 있다. 중소기업은 연합회 차원에서 기업연금제도를 만들 수도 있다. 일시적으로 회사의 이익이 늘어날 때마다 보너스 잔치를 하기보다는 회사가 연금이나 이익참여제도 등을 통해 미래를 위한 저축을 해두면 직원들은 노후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회사는 어려울 때 자금을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다.   요즘 기업의 이직률도 심각하다. 능력 있는 다른 회사 직원을 스카우트하기 위해 연봉은 끊임없이 상승해 일본기업의 평균연봉을 추월한 지 오래다. 보너스와 연봉의 상승은 인플레이션과 노동생산성의 경쟁력 약화를 초래한다. 일과 삶이 일체가 되어 직원들이 회사를 가정처럼 공동체 의식을 갖고 장기간 일할 수 있는 터전이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제 국가가 풀지 못하는 미래의 문제를 기업이 앞장서서 풀어서 다른 사회 집단에게도 혁신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해주면 좋겠다.   염재호 고려대 명예교수·전 총장 

    2023.02.22 00:53

  • [염재호 칼럼] ‘뷰카 시대’의 사회시스템

    염재호 고려대 명예교수·전 총장 설날도 지나 2023년도 벌써 한 달이 지나가고 있다. 올해는 윤석열 정부 2년 차를 맞아 우리나라가 새로운 도약을 할 기회다. 문명사의 대전환을 맞이한 요즘을 ‘뷰카 시대’라고 한다. 사회가 급변하고(volatile), 불확실하고(uncertain), 복잡하고(complex), 모호한(ambiguous) 상태라는 영어 첫 글자를 따서 뷰카(VUCA)라는 것이다. 21세기 사회는 확실히 20세기 사회와 다르다. 마치 금속 인쇄술의 등장으로 종교개혁과 르네상스가 촉발됐던 것처럼 디지털 전환은 인류의 문명을 급속히 바꿔나가고 있다. 20세기 사회시스템 안에 머물러 있으면 사회가 급변하고, 불확실하고, 복잡하고, 모호해서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 이런 뷰카의 시대를 어떻게 맞아야 하나?   윤석열 정부는 노동, 교육, 연금개혁을 3대 국정과제로 내세웠다. 국회에서도 선거제 개편을 위시한 정치 개혁을 위한 초당적 모임이 출범했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87년 민주화 체제를 넘어 새로운 정치시스템을 만들 절호의 기회를 맞았다. 이념을 앞세운 이전투구의 이익 정치, 승자독식의 일방적 정치로 원칙과 절제의 정치 미학이 실종된 지 오래다. 삼권분립의 견제와 균형도 사라지고 편 가르기와 극단적 팬덤 정치만 남았다. 이제 정치개혁 없이는 우리나라 미래가 암담할 뿐이다.   사회시스템 개혁은 뷰카 시대에 살아남기 위한 필수 과제다. 새로운 사회시스템 구축이 미래를 위해 가야 할 길이라면 기득권의 저항을 넘어서는 사회적 합의를 반드시 이끌어내야 한다.     ■  「 급변·불확실·복잡·모호 시대 도래 문명사적 전환이자 비가역적 변화 기존 사회시스템 획기적 개편해야 정치·노동·교육·연금 개혁 필수적 」    18세기 말 산업혁명 이후 과학기술의 급속한 발전은 20세기 사회시스템도 과학적으로 체계화했다. 일을 세부 전문화하는 미시적 공법이 발달했고, 이를 과학적으로 관리하는 대량생산 시스템이 발전했다. 삶의 터전이 집에서 공장으로 바뀌었고, 제조업 노동직뿐 아니라 이를 관리하는 사무직도 늘어났다. 노동은 시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임금은 일한 시간을 기준으로 지불됐다. 노동자와 사용자의 비대칭적 권력관계 때문에 노동조합이 등장했고 20세기 노동시스템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21세기를 맞아 일의 특성은 급속히 변화하기 시작했고, 정규직·호봉제·연공서열·종신고용 같은 경직된 노동시스템의 효율성은 심각한 도전을 받게 됐다.   교육도 마찬가지다. 20세기에는 대량생산 체제에 걸맞은 교육의 효율성이 강조됐다. 현상을 보고 깨닫는 격물치지(格物致知)의 교육보다 대형 강의실에서 전공지식을 앵무새처럼 외우면서 배웠다. 배운 지식을 회사에서 30년 정도 써먹고 은퇴하는 것이 20세기 교육과 직업의 사회시스템이었다. 그러나 이제 단순 지식을 반복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컴퓨터의 몫이 됐다. 심지어 20세기 직업의 85%가 소멸한다는 전망까지 나온다. 더 이상 형식지를 일방적으로 전수하는 교육방식은 유효하지 않다.   연금도 직장 은퇴 후의 삶을 보장해주기 위한 20세기 사회시스템이다. 하지만 저출산이 만연하고, 평균수명 70세에서 100세 시대로 생애주기가 획기적으로 바뀌면서 20세기식 연금제도는 부정합의 사회시스템이 되었다. 연금재정 고갈문제는 독일식 기업연금 제도와 같은 새로운 시스템으로 해결해야 한다.   회사에서는 창의적 아이디어와 협업이 더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20세기 직무관리의 규칙과 기준은 더는 유효하지 않다. 글로벌 기업들은 직원들의 업무 시간보다는 업무의 질을 평가한다. 재택근무나 자율근무가 보편적 시스템이 되었다. 넷플릭스의 CEO 리드 헤이스팅스(Reed Hastings)와 글로벌 경영전문대학원 인시아드(INSEAD)의 에린 마이어(Erin Meyer) 교수의 저서 『규칙 없음』을 보면 넷플릭스에서는 대량생산 체제에서 효율적으로 직원을 관리하던 관료제화된 규정을 모두 없애고 자율적으로 일하게 한다. 출퇴근뿐만 아니라 심지어 휴가 시기나 기간도 직원들이 마음대로 정할 수 있다. 많은 인력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보다 인재 밀도를 강조하는 헤이스팅스는 직원들을 모두 프로페셔널로 인정해서 근무 장소나 시간보다는 창의적 아이디어와 일의 결과만 평가한다. 이처럼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뷰카 시대를 성공적으로 맞을 수 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재택근무를 권장하던 기업들이 다시 직원들을 출근시킨다고 한다. 이는 아직도 관리자들이 시간을 중심으로 일을 관리하고 대면으로 업무를 아무 때나 지시하는 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관리자들이 더 많은 연봉을 받으면서도 아직도 20세기형 관리자의 역할에 머물러 있는 것은 문제다. 21세기는 시키는 일만 하는 노동이 아니라, 즐길 수 있는 일을 자율적으로 하고 업무 성과로 평가받는 프로의 시대로 바뀌고 있다.   이제 선진사회로 도약하기 위해 20세기 사회시스템을 획기적으로 바꾸어야 할 때가 됐다. 비가역적 변화의 흐름에 저항하면 뷰카의 시대에 살아남기 어렵다. 새해에는 정부와 기업 모두 21세기 뷰카시대에 걸맞은 사회시스템을 구축하고 우리는 모두 이를 받아들이기 위한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   염재호 고려대 명예교수·전 총장 

    2023.01.25 00:54

  • [염재호 칼럼] 은유가 지배하는 세상

    염재호 고려대 명예교수·전 총장 한 해가 또 저물어간다. 세계화의 물결이 도전을 받으며 곳곳에서 지각변동이 일어난 한 해였다. 미·중갈등으로 세계시장 질서에 균열이 생겨 글로벌 밸류 체인이 붕괴하고 새로운 판짜기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다. 미국은 기술패권을 앞세워 중국을 견제하며 쿼드·나토 등 동맹세력을 결집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항해 중국과 러시아는 군사협력으로 서방세력을 견제하고 있다.   러시아 국민 보호를 명분으로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푸틴의 침략 전쟁은 일 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정부가 신나치에 의해 운영되고 있기 때문에 탈나치화하는 것이 전쟁의 목적이라고 주장하며 탱크와 장갑차에 Z 표식을 하고 전쟁을 치른다. 침략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한 은유의 활용이다.     ■  「 은유가 지배하는 반지성적 사회 본질 성찰보다는 느낌대로 판단 촛불·태극기 등 넘쳐나는 은유들 정치적 선동 수단 오용은 막아야 」    인스타그램·틱톡 등 사진이나 영상, 그리고 간결한 메시지로 소통하는 이 시대의 특징은 은유가 지배하는 세상이다. 오랜 시간 깊게 성찰하는 대신에 순간적으로 느끼는 대로 판단해버리는 감성적 사회가 되었다. 쉽게 가짜뉴스를 믿고 엉터리 주장에 동조한다. 객관적 사실에 대한 판단은 유보하고 감성에 호소하여 즉각적인 반응을 끌어낸 다음, 진실은 묻어둔 채 은유의 이미지만 남기고 빠르게 사라져버리는 반지성적 사회가 되고 있다.   미국의 대표적 지성 수전 손택(Susan Sontag)은 『은유로서의 질병』에서 우리는 질병의 본질보다 질병이 가진 상징과 은유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고 간파했다. 19세기에 만연했던 결핵은 예민하고 비쩍 마른 사람들에게 나타나서 동정심의 감성을 유발하는 질병의 은유를 갖고 있다. 그래서 20세기 말 결핵이 사라지는 바람에 문학과 예술이 쇠퇴하고 있다는 어느 비평가의 말을 손택은 인용한다. 반면에 암은 결핵처럼 낭만적이라기보다는 투쟁과 전투의 은유를 가진 음울한 질병이다. 암적인 존재라는 은유처럼 암은 흉포한 에너지를 가진 질병으로 사회에서 제거되어야 하는 악을 지칭할 때 종종 쓰인다. 20세기 후반에 나타난 에이즈에 대한 은유는 에이즈를 바이러스로 보지 않고 타락한 성적 문란으로 야기된 저주의 질병으로만 인식했다. 이처럼 질병을 은유로 이해하기 때문에 질병을 치료보다는 불안·공포·원망의 대상으로 본다.   은유는 이성적 판단능력을 흐리게 만든다. 중세 종교재판의 마녀사냥처럼 집단적 광기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19세기 말 프랑스 유대인 장교 드레퓌스의 스파이 혐의에 대한 재판에선 유대인에 대한 은유가 드레퓌스로 하여금 종신유배형을 받게 했다. 소설가 에밀 졸라는 “나는 고발한다!”라는 공개서한으로 반발했다. 이 일로 프랑스 사회는 드레퓌스파와 반드레퓌스파로 양분되어 극심한 갈등을 겪게 되고, 드레퓌스 사건은 프랑스 사회 분열의 상징이 되었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의 ‘타이틀 42’는 코로나 위험을 명분으로 불법 이민자를 즉각 추방하는 정책이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중국 우한에서 시작됐다는 사실을 근거로 정치적 은유가 증폭돼 동양인에 대한 혐오범죄에 그치지 않고 남미 불법 이민자 추방으로까지 확산됐다. 실업과 구조조정도 이민자들로 인한 피해라는 이미지로 중하층으로 전락한 백인 위주 경제적 약자들을 부추기곤 한다. 프랑스의 인류학자 엠마뉘엘 토드(Emmanuel Todd)는 『샤를리는 누구인가?』에서 2015년 1월 프랑스 전역에서 일어난 시위를 분석했다. 프랑스의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에 실린 무슬림 풍자만화에 대한 테러에 “내가 샤를리다”라는 피켓을 들고 수백만 명이 이슬람의 비문명성을 비난하며 시위를 벌인 것이다. 하지만 토드는 샤를리의 은유가 사실은 사회경제적으로 위기를 느끼는 프랑스의 중간계층이 이슬람 혐오로 결집한 것으로 분석했다. 단순히 표현 자유의 문제가 아니라 신공화주의, 좀비 가톨릭 중간계층이 뭉친 것이라는 주장이다.   우리에게도 은유의 망령들이 현실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군사독재 시절 간첩·반공·반체제·새마을·유신 등의 은유가 있었다면 지금은 더 많은 은유가 세상에 떠돈다. 광우병·세월호·탈원전·적폐청산·토착왜구·촛불·태극기·이태원 등 본질보다 은유가 우리의 판단을 지배한다.   정치인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은유로 유권자들을 현혹하는 데 여념이 없다. 나타난 현상의 본질에 천착하기보다는 은유를 만들어내고 이를 확대재생산하여 증폭시킨다. 대중은 객관적 판단은 유보하고 편 가르기에 내몰려 은유 구조에 함몰되어 버린다. 사회를 객관적이고 보수적으로 지켜주어야 할 언론인과 법조인들이 정치에 감염되어 사실 확인보다는 은유를 양산해낸다. 그리고 지식인이 어느 편에도 서지 않고 객관적으로 양쪽을 비판하면 양비론의 처세술이라고 비난한다.   우리 사회뿐 아니라 전 세계에 은유의 깃발이 나부끼고 있다. 일차세계대전 이후 혼란기에 반유대주의 은유를 앞세워 나치즘으로 독일민족을 선동한 히틀러의 망령이 되살아나는 것 같다. 은유는 시적 언어의 아름다움으로만 활용되어야 한다. 은유가 정치적 선동과 구호로 남용되는 현상은 지식인들이 앞장서서 막아야 한다.   염재호 고려대 명예교수·전 총장 

    2022.12.28 00:56

  • [염재호 칼럼] 다양성 모순의 시대

    염재호 고려대 명예교수·전 총장 지금 우리는 다양화된 사회에 살고 있다. 20세기에 인류는 경제성장만이 유일한 목표인 것처럼 달려왔다. 세분화된 전문성과 과학적 관리법을 통해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이루어냈다. 하지만 20세기에 정답이라고 생각했던 발전가치는 인류 전체에 심각한 폐해를 끼쳤다. 대량소비로 쓰레기, 공해, 지구온난화 등 지구생존까지 위협하는 문제를 21세기 인류에게 남겨준 것이다.   인류 문명이 디지털화로 재편되면서 산업시스템이 바뀌었다. 20세기 소품종 대량생산에서 21세기 다품종 소량생산의 시대로 변화되었다. 획일적이고 소수가 지배하던 사회가 개별화되고 다양한 사회로 바뀌었다. 지상파 3사가 방송 채널을 독점하던 시대에서 이제는 종편을 비롯하여 100개가 넘는 채널이 열려 있다. 신문도 한두 가지 종이신문을 구독하던 시대에서 여러 개 신문의 다양한 뉴스를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 선별해 볼 수 있는 시대로 바뀌었다. 다문화가정도 크게 늘어 더는 단일민족이라는 이야기를 하기 어렵게 되었다. 상품도 백화점이나 상점이 아니라 다양한 홈쇼핑이나 온라인 쇼핑을 통해 구매한다. 차이와 다름을 강조하는 다양성의 시대가 된 것이다.     ■  「 다양성 증가와 편향된 팬덤현상 공감능력 상실한 다양성의 모순 다양성 정치화로 부족주의 심화 공감능력 결여로 공동체 몰락 」    가치의 다양성도 확대되고 있다. 원래 사람의 반쪽이라는 의미에서 사용되던 반려(伴侶)의 개념이 이제는 사랑스러운 놀이의 대상이었던 애완(愛玩)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애완견이라 불리던 것이 반려견이 되어 강아지가 가족의 일원이 되고 있다. 배우자나 자녀 대신 반려견과 반려묘와 생활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결혼 축의금을 받을 수 없는 비혼주의자들이 비혼을 선언하면 비혼 축의금을 주는 문화도 생겼다.   성에 대한 개념도 빠르게 변화하고 다양해지고 있다. 태어날 때 타고나는 남녀 두 가지밖에 없던 생물학적 성별 섹스(sex)에서 사회적으로 규정하는 성별인 젠더(gender)가 더 중요한 가치로 여겨진다. 미국에서는 이제 자신의 이름 뒤에 젠더로 성별을 구별하는 he, his, him과 she, her, hers를 적어야 한다.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립대학 병원 소아과 의사였다가 보건부 차관보가 된 레이첼 레빈은 두 명의 자녀를 두고 있는 아버지이지만 자신을 여성으로 성 정체성을 밝힌 최초의 고위관료가 되었다. 언론에서도 그를 지칭할 때 she라고 부른다. 성 소수자의 정체성은 레즈비언, 게이뿐 아니라 양성애, 트랜스젠더 등 다양하게 분류되어 최근에는 9개 정도까지 구별된다.   이처럼 기존에는 무시되거나 묻혀 왔던 다양한 가치들이 인정받는 다양성의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다양성이 확대되고 개별적 가치가 존중받는 뉴노멀이 등장하는 반면 다양성을 인정하는 공감 능력은 퇴보하는 다양성 모순의 시대에 접어들고 있다. 다양성 가운데 한 가지만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여 다른 다양성에 대해 적대적인 감정을 드러내는 현상이 두드러진다. 젠더갈등, 세대갈등, 계층갈등, 지역갈등에서 보듯 상대를 이해하는 공감 능력은 심각하게 퇴화하고 있다. 특히 다양성이 정치화될 때 사회는 비판적 판단능력을 상실하고 일방적으로 비난하고 매도하는 부족정치가 부활하는 것을 보게 된다.   민주주의는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전제로 공동체의 발전을 도모한다. 특정 이념이나 가치에 함몰된 개인이나 집단이 SNS 등을 통해 사고의 편향적 확대 재생산을 할 때 민주주의는 위기를 맞는다. 팬덤 현상으로 비판의식을 상실하고 무조건적인 지지와 환호를 외칠 때 다양성의 가치는 훼손된다. 야수처럼 다른 집단에 대한 적대감과 공격본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다양성이 우리를 덕후와 같이 좁은 영역의 가치에 몰입할 수 있는 자유도 보장해 주지만 다른 다양성에 대한 무관심과 적대의식을 키우는 동굴 속의 존재로 만들기도 한다.   진화생물학자 프란스 드 발(Frans De Waal)은 『공감의 시대』에서 영장류가 다른 동물에 비해 진화할 수 있었던 것은 고도의 상호의존성 때문이라고 한다. 인간은 원래 이기주의의 본성을 갖고 태어났지만 사회 전체를 생각하는 ‘계몽된 이기주의’를 통해 공동체 사회를 발전시켜 왔다. 다름을 인정하는 공감 능력 없이는 공동체는 성장·발전할 수 없다. 상대주의 가치를 강조한 카를 포퍼도 선민사상에 기반을 둔 일방향성 역사주의가 비타협적 급진주의와 전체주의를 야기했다고 한다. 포퍼는 말한다. “우리는 짐승으로 돌아갈 수 있다. 하지만 만약 인간으로 남기를 원한다면 오직 하나의 길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열린 사회로의 길이다.” 소수가 즐기는 다양성의 가치뿐 아니라 다수가 유지하는 기존의 가치도 존중받아야 하는 것이 다양성의 긍정적인 면이다.   민주주의 위기는 승자독식의 다수결 정치 시스템에 기인한다. 소수 극렬지지층을 동원하여 정치권력을 잡으려는 포퓰리스트의 야심은 공동체를 파멸로 이끌 수밖에 없다. 다양성에 대한 공감 능력이 결여되어 포용과 양보 없이 경쟁과 승자독식에 빠질 때 그 공동체는 몰락하게 된다. 지금 여야 정치지도자들이 반드시 새겨들어야 할 대목이다.   염재호 고려대 명예교수·전 총장 

    2022.11.30 00:58

  • [염재호 칼럼] 미래의 문제를 푸는 방식

    염재호 고려대 명예교수·전 총장 어릴 적 방학 책에 9개의 점으로 이루어진 정사각형에서 점들을 잇는 선을 중복없이 한 번에 긋는 방법을 찾는 퍼즐이 있었다. 오랜 시간 이리저리 선을 그어 봐도 도저히 방법을 찾을 길이 없어서 끙끙대곤 했다. 답을 알고 나면 ‘아! 그런 방법도 있구나’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 정사각형 밖에 또 하나의 점을 만들어 그곳을 통과하게 해서 모든 선을 잇는 방법이다. 마치 콜럼버스가 계란을 깨서 세우는 방식처럼 상식의 틀을 벗어난 해결방안이다.   미래의 문제는 현재의 방식으로는 잘 풀리지 않는다. 무리해서 풀게 되면 많은 시행착오와 폐해를 일으키게 된다. 우리에게는 저출산해소 방안과 연금개혁이 대표적인 문제이다. 어느 정치인이 신생아 출산때 1억원씩 출산장려금을 주자는 포퓰리즘 공약을 내세웠다. 터무니없는 발상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지난 16년간 300조원 가까운 저출산 예산이 집행되었고 작년만 해도 46조 7천억원이 지출되었지만 신생아 출산은 26만명에 그쳤고 가임여성 합계출산율은 전 세계 최하위인 0.81명이 되었다. 거의 신생아 한 명당 2억원에 가까운 예산을 지출하고도 저출산율 하락을 막지 못한 셈이다. 이 정도면 정부는 더 이상 국민의 세금만 낭비하는 자신의 무능력을 자인하고 대책을 포기하는 것이 나을지 모른다.     ■  「 미래문제는 새 시각으로 풀어야 경제핵심은 인구가 아니라 혁신 AI 로봇세로 연금재정 충당해야 다차방정식의 창의적 해법 찾아야 」    일본도 고학력 직장여성들의 저출산 현상이 심각했다. 몇 년 전 기업들이 앞장서서 야근을 금지하고 잔업이 필요하면 아침 5시에서 8시까지 재택근무를 하도록 하고 오후 3시에서 6시 사이에 퇴근하게 하는 유연근무제를 실시했다. 그 결과 고학력 여성들의 출산율이 상승해 재작년 1.66명에서 작년에 1.74명으로 증가했다. 일본의 작년 합계출산율은 한국보다 훨씬 높은 1.30명이었다. 정부가 나서서 세금으로 풀 문제가 아니다.   안철수 국민의힘 의원이 최근 제주도 특강에서 지난 모든 정부에서 연금개혁을 해왔지만 5년 내내 연금개혁을 안 한 유일한 정부가 문재인 정부라고 하면서 국민들에게 욕먹기 싫어 심각한 연금개혁을 회피했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해결방안은 없는가?   일본의 거시경제학자 요시카와 히로시(吉川洋)는 『인구가 줄어들면 경제가 망할까(人口と日本經濟)』라는 저서에서 미래의 경제문제는 고령화와 인구 감소 때문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전통적 경제이론에서는 토지, 자본, 노동이 경제의 3대 요소였지만 이제는 혁신(innovation)이 경제의 핵심요소가 되었다. 인구와 같은 단순 노동력이 아니라 혁신기술로 10배 이상의 경제적 효율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고령화가 심화되면 한 명의 젊은이가 여러 명의 노인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암울한 전망은 저출산을 가속화시킨다. 연금개혁도 젊은이들이 더 많이 내고 더 적게 받아야 하는 구조로 개혁을 해야 한다는 일차방정식의 문제해결이기에 반발도 큰 것이다.   인구가 줄어도 AI나 로봇이 생산성을 10배 이상 증가시킬 수 있는 시대가 되고 있다. 유럽에서는 IT 다국적기업에 대해 디지털세를 부과하는 제도를 도입했다. 이는 디지털 혁명으로 산업구조가 급변하면서 과대이익을 보는 곳에 세금을 부여한다는 논리에 근거한다. 우리나라도 최근 네이버나 카카오 등 IT 기업이나 플랫폼 사업자들의 과도한 수익과 고임금에 대해 국민들의 시선이 곱지 않다.   예전에는 자연인에 대해서만 국가가 세금을 부과했다. 이것도 이름이 없으면 불가능해서 중국에서는 백 개의 성을 나누어주어서 모든 사람들이 성을 갖게 해서 세금을 거두었다. 백성(百姓)이라는 말도 이것에서 유래되었다. 산업혁명 이후 회사가 부를 창출하게 되니까 회사를 법적으로 사람인 법인으로 만들어 세금을 거두었다. 이제는 인공지능이나 로봇이 부가가치를 창출하게 되니까 이들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것이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그렇다면 연금재정이 줄어드는 것을 미래세대의 소득에서 충당할 것이 아니라 데이터로 부를 창출하는 곳에 세금을 부과하여 이를 연금재정에 충당하면 안될까?   국가가 연금을 제대로 운영할 수 없으면 독일처럼 기업연금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다. 요시모리 마사루(吉森賢) 교수의 『독일 100년 기업 이야기』를 보면 독일의 일류 기업들은 종업원들에게 퇴직후 연봉의 70%에 해당하는 연금을 종신 지급하는 제도를 마련하고 있다. 회사 수익을 연봉 인상에 반영하는 대신 근로자와 기업이 동시에 기업연금기금에 출연하여 퇴직 후에도 안정적인 연금수혜를 받을 수 있게 한다. 회사는 이 기금으로 필요한 투자에 활용할 수도 있고 국가 전체적으로는 임금인상으로 인한 인플레이션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   미래의 정책문제는 일차방정식이 아니라 다차방정식으로 풀어야 한다. 미래세대의 소득에서 연금을 과부담하게 하고 연금지급 규모를 줄이는 것은 일차방정식 해법이다. 미래변화를 읽고 창의적 발상을 통해 현재 당면한 난제를 풀어내야 한다. 정치 지도자들이 포퓰리즘에 빠져 여론 동향만 기웃거리지 말고 미래에 대한 안목과 혜안을 갖고 해결방안을 제시해야 할 시점이 되었다.   염재호 고려대 명예교수·전 총장 

    2022.11.02 00:46

  • [염재호 칼럼] 기술패권 시대의 국가전략

    염재호 고려대 명예교수·전 총장 기술패권을 둘러싼 미·중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 전통적 제조업에서 중국이 세계 생산기지가 되는 것은 참아주었지만 첨단산업만큼은 결단코 양보할 수 없다는 미국이다. 최근 중국계 미국대학 교수들이 기술유출 스파이 혐의로 구속되고 중국 유학생들에 대한 미국대학들의 우호적 태도도 사라지고 있다. 중국에 첨단기술과 제품이 유출되지 않게 우방국도 철저히 단속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기술패권을 향한 미국의 전략은 마치 “일본이 세계최고(Japan as No.1)”라며 승승장구하던 신흥세력 일본을 1985년 플라자 합의를 통해 단번에 기세를 꺾었던 것과 맥을 같이 한다. 물론 당시 일본과 지금 중국 상황은 전혀 다르고 그 효과도 동일할 것이라고 예견할 수는 없지만 미국에 도전하는 세력에 대해 사다리 걷어차기 전략임에는 틀림없다. 당시 일본 엔화를 일거에 두 배로 평가절상시켜 지난 30년간 일본을 장기침체의 늪에 빠지게 한 미국의 전략은 유효했다. 그것이 우리에게는 일본의 빈자리를 파고들어 비약적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는 기회도 되었다.     ■  「 미·중 기술패권 경쟁의 위기 심화 안보나 이념 넘어선 외교전략 필요 첨단기술 에코시스템과 인력 절실 혁명적 미래 국가전략 마련해야 」    하지만 오늘 우리에게 다가오는 미·중 기술패권 경쟁은 기회라기보다는 심각한 위기이다. 미·중 패권경쟁에서 우리만 새우등 터지는 형국이다. 최근 미국의 인플레이션방지법(IRA) 통과로 우리는 쉽게 유탄을 맞았다. 한국의 반도체 칩4 동맹 가입에도 중국의 견제가 만만치 않았다, 미군의 사드 배치에 대한 경제보복 전례만 보더라도 미·중 기술패권 경쟁에 대한 우리의 국가전략은 더욱 치밀하게 수립되어야만 한다.   강대국 사이에 낀 약소국은 딜레마 상황에서 어느 편을 들어도 안 된다. 좌파 정부가 중국 편을 들고 우파 정부가 미국 편에 서는 것도 위험하다. 안보나 이념의 관점에서 일방적 외교는 다른 한 쪽의 공격을 불러일으키기 쉽다. 중세유럽의 베네치아가 동서 로마제국의 갈등 사이에 오로지 상업적 이익만을 내세우고 정치적 편향성을 철저히 배제한 전략을 취했던 역사는 곱씹어 볼만한다. 셰익스피어가 ‘베니스의 상인’이라는 희곡을 통해 베니스를 장사꾼의 도시로 각인시킨 것처럼 당시 도시국가를 지키기 위한 베니스의 전략은 오로지 경제이익 우선이었다, 따라서 이제는 국가정체성 담론을 넘어 치밀하고 영리한 외교전략이 더욱 절실해진다.   초격차 첨단기술 확보를 위한 국가전략도 마련되어야 한다. 최근 요소수 사태나 일본의 소재, 부품, 장비 경제보복 사례를 교훈삼아 글로벌 밸류체인을 체계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산업기술 에코 시스템이 구축되어야 한다. 안보를 위해 국가정보원이 존재하듯 이제는 총합안보(total security)의 관점에서 국제적 산업정보를 통괄하는 국가기구의 설치가 절실하다. 희토류와 같은 소재, 최첨단 부품이나 장비, 에너지나 식량자원의 글로벌 체인이나 네트워크에 대해 마치 기상청의 태풍 예보시스템과 같은 총체적 정보시스템이 필요하다. 또한 AI시대를 맞아 국가 디지털 플랫폼을 구축하기 위해 다양한 빅 데이터를 관리하고 서비스를 제공하는 부처의 신설이 기술패권 시대에 필수적이다.   거시적 에코 시스템뿐 아니라 인적자원 확보를 위한 정책설계도 고민해야 한다. 먼저 미국이 중국의 우수 첨단기술 인력을 견제하는 틈새를 우리의 인재들이 파고 들어야 한다. 그동안 중국 유학생들의 대거 진출로 우리 학생들이 미국 명문대학교 대학원에서 입학허가서 받기가 쉽지 않았다. 이제는 적극적인 유학 지원정책으로 첨단기술을 전공하는 많은 학생들이 우수 대학원에서 배우고 연구네트워크를 확보하도록 해야 한다. 또한 실리콘밸리나 보스턴 등 미국의 최첨단 연구시설과 기업에 박사후 과정(post-doc) 파견지원. 기업의 기술연수 확대 등 다양한 첨단기술 네트워크를 구축하기 위한 전략이 필요하다.   싱가폴은 자체인력은 부족하지만 정부의 적극적인 외국 첨단기술 인력 확보 노력을 통해 국제적 기술강국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싱가폴국립대학이나 난양공대에는 국가의 엄청난 지원정책으로 세계의 석학들이 몰려들고 있다. 정부의 연구지원체계인 A*STAR가 만든 바이오폴리스는 초기 십여 년간 50개 중 45개 프로젝트가 외국연구자들에 의해 운영되었고 이를 통해 존슨앤존슨과 같은 최첨단 바이오 연구시설도 유치했다.   우리의 주요대학 주변이 수도권정비계획법 규제로 기업의 연구시설이 들어오지 못하고 고시촌이나 유흥음식점들로만 즐비한 현상은 개탄할 만 하다. 초중고는 교육비가 남아돌아 적립금이 수조원이 넘는데 대학재정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보다 30% 이상 낮은 현실을 타개하지 않으면 기술패권시대에 우리의 미래는 없다. 판교밸리 못지 않은 기술벤처타운이 대학가 주변에 연구기술특구로 즐비하게 설립되어 산학기술협력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기술패권 경쟁시대에 우리는 곧 경제후진국으로 전락하고 미·중 갈등으로 인한 전쟁 위험에 빠지게 될 것이다. 율곡의 십만양병설을 무시하고 다시 징비록을 쓰는 일을 피하기 위해서는 미·중 기술패권시대에 혁명적인 국가전략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염재호 고려대 명예교수·전 총장 

    2022.10.05 00:40

  • [염재호 칼럼] 지정학적 위기와 정치 지도자들

    염재호 고려대 명예교수·전 총장 우리나라가 이웃 나라의 침입으로 처참하게 황폐해진 대표적인 예가 임진왜란이다. 1592년 꼭 430년 전 일이다. 조선이 개국한지 정확히 200년 만에 맞은 왜적의 침입으로 조선 인구는 약 30%가 줄어들었고, 당시 인구의 약 1%에 해당하는 10만 명이 일본에 포로로 끌려가 거의 돌아오지 못했다.   또 한 번의 참사는 한국전쟁이다. 남북한 군인 70만 명, 미군 4만여 명과 중공군 20만여 명을 포함해 1백만 명 이상의 군인과 남북한 합쳐서 200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사망 실종으로 희생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의 전쟁이었다.     ■  「 국제전에 시달려온 한반도 역사 미중갈등에 낀 한국외교의 딜레마 지정학적 위기 무시하는 국내정치 외교전략 콘트롤 타워 구축해야 」    6·25가 동족상잔의 내전이라고 하지만 남한 측에는 미군을 비롯한 16개국으로 구성된 유엔군, 북한 측에는 중국, 소련 등이 참전한 국제전이었다. 임진왜란도 일본과 조선의 전쟁이 아니라 100년 만에 전국 시대를 끝내고 일본을 통일시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기울어가는 명나라를 침공하려는 침략 야욕으로 빚어진 국제전이었다.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에 둘러싸인 한반도의 지정학적 운명은 늘 이처럼 풍전등화와 같다. 구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전 세계의 생산기지가 될 수 있도록 중국을 지원하던 미국이 이제 중국을 다시 견제하는 전략적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지난 20여 년간 중국의 시장개방과 투자를 적극 지원하고 중국 유학생과 기술인력을 우대하던 기조가 급격히 변하고 있다. 미국, 일본, 호주, 인도가 참여하는 쿼드 군사동맹과 한국, 미국, 일본, 대만이 참여하는 반도체 기술 칩4 동맹을 결성하여 중국에 대한 견제를 공고히 하고 있다.   반면 중국은 최근 낸시 펠로시 미 하원의장의 대만 방문을 계기로 미국과 대만에 대해 격앙된 반응을 보이며 대만 상공을 가로지르는 미사일 위협까지 감행하고 있다. 지난 2일에는 동해북부 극동해역에서 러시아의 ‘보스토크(동방)-2022’에 참여해 중러 합동군사훈련을 감행했다. 한미일과 북중러가 신냉전 체제를 구축하는 형국이다.   그레이엄 앨리슨의 『예정된 전쟁(Destined for War)』에서 보듯이 신흥세력 중국과 기존세력 미국이 투키디데스 함정에 빠지면 전쟁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 경우 전쟁터는 미국이나 중국 본토가 아니라 대만을 비롯한 남중국해나 한반도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실제 전쟁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기술과 무역을 둘러싼 미국과 중국의 우리나라에 대한 압력은 전례 없이 강력해질 것이다. 특히 시진핑이 다음 달 제 20차 중국 공산당 전국대표대회에서 최초로 3연임에 성공해 마오쩌둥 이래 최고 권력자로 등극하면 중국몽을 앞세워 강성 정치를 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 미중 갈등은 심화되고 그 사이에 끼어 선택을 강요받는 우리나라는 심각한 외교 딜레마에 빠질 것이다.   지난 해 1월만 해도 우크라이나 외교장관은 러시아의 침공은 있을 수 없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지금은 참혹한 전쟁으로 우크라이나는 폐허가 되고 있다. 2차대전 후 지속된 세계평화가 무너지고 힘의 논리로 새로운 국제질서가 꿈틀대고 있는데 우리 정치지도자들은 지금 어떤 생각으로 정치를 하고 있는가? 여야 모두 다음 총선이나 차기 대선만을 생각할 때인가? 민생을 챙긴다는 명분으로 포퓰리즘 국내 정치만 하면서 지정학적 위기는 도외시해도 되는가? 언론은 왜 치졸한 국내 정치판의 이전투구만을 연일 주요 뉴스로 보도하는가? 왜 1700만 명이 관람한 영화 ‘명량’이 역대 관객 동원 1위이고 1400만 명의 ‘국제시장’이 4위이고, 최근 개봉된 ‘한산’에 벌써 700만 명 이상이 몰리는지 고민은 없는가?   미중 갈등 사이에서 지정학적 위기가 몰려오는 것은 초강력 태풍 힌남노에 비할 것이 못 된다. 율곡이 십만양병론을 주장하고 이순신이 거북선을 제조하는 전략과 지혜가 있어도 정치지도자들이 사색당파에 빠져 있으면 백성들은 처참한 전쟁의 참화를 피할 길이 없다. 100년 만에 일본으로 파견되었던 통신사 정사 황윤길과 부사 김성일의 선조 임금에 대한 상반된 보고도 서인과 동인으로 나뉘어진 당쟁의 결과였다. 서인 황윤길의 왜침론을 신랄하게 반박했던 동인 김성일도 류성룡에게는 왜침 가능성을 고백했다고 한다. 하지만 당파 싸움 관점에서 이런 위험을 발설하는 것이 국내 민심의 혼란을 막기 위해서라고 변명했다니 한심한 일이다.   이제라도 윤석열 정부는 국내 정치의 늪에서 빠져나와 우리의 미래를 살리는 거시적 안목으로 지정학적 위기에 대비해야 한다. 국제무역으로 세계 10위의 경제대국이 된 나라가 외교를 등한시해서는 안된다. 최소한 외교부는 부총리급 부처가 되어야 하고, 미중 국제문제 전문가를 중심으로 대통령은 총체적 국가외교전략의 콘트롤 타워를 구축해야 한다. 경제, 안보, 과학기술, 문화 등 모든 국가정책은 지정학적 위기에 대비한 전략으로 재편되어야 한다. 정치지도자의 무능과 안일의 폐해가 과거 역사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제 북한 핵 위협과 미중 갈등 사이에서 지정학적 위기 극복 전략이 윤석열 정부의 최우선 국정과제가 되어야 한다.   염재호 고려대 명예교수·전 총장 

    2022.09.07 01:00

  • [염재호 칼럼] 풍요 이후에 오는 나라

    염재호 고려대 명예교수·전 총장 미국의 경제학자 갤브레이스(John Kenneth Galbraith)는 1958년 『풍요로운 사회(The Affluent Society)』라는 명저를 통해 자본주의 발전의 모순을 예리하게 분석했다. 자본주의는 뛰어난 효율성과 생산성으로 인류를 풍요롭게 만들지만 수요보다 더 많은 생산 때문에 광고를 통해 과잉소비를 유도하게 된다. 반면에 저소득층은 구매력이 부족해 소비를 못한다. 이처럼 겉으로는 풍요로운 사회처럼 보이지만 생산과 소비의 불균형과 경제양극화가 심화되는 문제가 발생한다.   하버드 대학에서 경제학을 가르치고 조지 W. 부시 정부의 백악관 정책비서관을 지낸 부크홀츠(Todd G. Buchholz)도 『다시, 국가를 생각하다 (The Price of Prosperity)』에서 풍요로움의 패러독스를 세계사의 교훈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원제 ‘번영의 대가’에서 볼 수 있듯이 국가가 번영할수록 애국심은 사라지고 공동체 의식은 흐려진다.   ■  「 선진국 사회 풍요의 패러독스 무적 스파르타 저출산으로 소멸 풍요 이후 국가사회 붕괴 막아야 미래한국 설계에 온 힘 기울여야 」    로마 제국의 몰락은 귀족들의 사치와 환락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막강한 군사력을 지닌 스파르타는 어떻게 멸망했는가? 부크홀츠는 기원전 4세기 초반 스파르타의 몰락을 80퍼센트나 인구가 감소한 저출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천하무적 스파르타는 전쟁의 승리로 경제적 부를 얻고 노예를 거느리며 풍요롭게 되었다. 하지만 강인한 스파르타 군인들에게 풍요로운 생활은 출산의 필요성을 감소시켰다. 자녀가 많으면 여행이나 사치를 즐길 여유도 줄어들고 재산분할의 문제도 생기기 때문이다. 결국 스파르타는 기존의 군대도 유지하지 못할 정도로 인구가 줄어들어 역사에서 소멸한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세대 간 갈등은 심각하다. 흔히 60, 70대는 후진국, 40, 50대는 중진국, 20, 30대는 선진국에서 살았다고 한다. 60, 70대는 찢어지게 가난한 나라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과 전쟁의 폐허에서 죽도록 일해야 겨우 먹고 살 수 있는 헝그리 정신으로 공부하고 일했다. 이들은 오늘 세계 10대 경제대국을 만들었다는 자부심과 함께 20, 30대가 따라오기 어려운 개인적 부도 누리고 있다. 40, 50대는 중진국 정도의 생활수준을 누린 세대였지만 군사독재 치하에 자유와 평등을 목마르게 갈구하던 세대였다. 한편 IMF 경제위기를 생생하게 경험하면서 불확실한 미래에 위기의식을 느끼는 세대이다. 20, 30대 MZ세대는 부모들이 가꾼 경제적 풍요로움뿐 아니라 K-문화 등 선진국 국민으로 자신감 가득한 세대이다. 하지만 미래보다는 현재를 즐기는 욜로(YOLO: You Only Live Once)족의 세대이다.   세계에서 유래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빠르게 성장한 우리나라는 흔히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라는 용어처럼 어느 나라보다도 더 다른 세대가 한 나라에 공존하며 살고 있다. 이들이 서로를 이해하기는 어렵다. 이제 세대를 넘어 계층, 성별, 지역 등 다양하게 분열된 사회가 이익집단화된 정치에 의해 더욱 분열되고 있다. 어렵던 가정이 먹고 살만하니까 풍비박산이 나는 형국이다.   미국사회도 풍요 이후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붕괴되고 있다. 이민사회로 이루어진 미국이 트럼프 정부 이후 이민을 제한하고 인종차별적 행태가 만연한다. 탐욕적 자본주의는 디지털 전환과 맞물려 빈부격차를 심화시킨다. 애국심, 프로테스탄트 윤리, 직업의식, 공화주의가 소멸하고 있다. 하버드대 퍼트남(Robert D. Putnam)교수가 『나 홀로 볼링(Bowling Alone)』에서 분석한 것처럼 미국 사회의 커뮤니티가 붕괴되고 극단적 개인주의 셀피시대가 도래했다. 총기난사, 선거결과 불인정, 가짜뉴스 선동, 극단적 정치 팬덤현상 등이 민주주의 공동체 질서를 위협하고 있다.   일본사회도 1980년대 “Japan as No.1” 신화가 붕괴되고 잃어버린 30년을 넘어 계속 추락하고 있다. 풍요 이후 길을 잃고 헤매는 일본의 많은 젊은이들은 최저임금의 아르바이트 생활로 미래에 대한 희망을 접고 근근이 살아간다. 해외유학은 생각도 안 하고 직장인들은 해외근무를 기피한다. 우물안 개구리처럼 국내의 안일한 삶에 자족하며 살길 원한다. 정치인들은 파벌 중심 정권연장에만 매달려 사회시스템 혁신에는 관심이 없다.   풍요 이후의 사회, 우리나라는 미래를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 세계 10대 경제대국으로 세계 최장수 국가로 달려가지만 세계 최고의 노인빈곤율, 노인자살률, 저출산율에 직면한 우리나라. 과연 정치 지도자들은 국민들에게 그리고 젊은이들에게 어떤 미래를 꿈꾸게 해줄 것인가? 검수완박에 사활을 걸었던 문재인 정부나 경찰국 신설에 매달리는 윤석열 정부에 미래 한국의 비전을 기대할 수 있을까? 미국이나 일본처럼 선진국병은 어쩔 수 없다고 수수방관만 하기에는 유사 이래 최고의 풍요를 맛보게 만든 선조들의 피땀 어린 노력이 안타까울 뿐이다. 이제라도 윤석열 정부는 국민통합위원회 출범을 계기로 미래 한국을 위한 새로운 어젠다를 마련하여 풍요 이후의 나라 설계에 온 힘을 기울여야만 한다.   염재호 고려대 명예교수·전 총장

    2022.08.10 00:58

  • [염재호 칼럼] 정치의 공간과 기술의 공간

    염재호 고려대 명예교수·전 총장 우리나라 과학기술계에 기쁜 소식들이 몰려들고 있다. 지난 달 21일 2010년부터 2023년까지 1조 9572억원의 개발비가 들어가는 우리 자체기술의 인공위성 누리호가 마침내 발사에 성공했다. 세계 7대 우주강국에 진입한 감격적 순간이었다. 이는 항공우주연구원만의 쾌거뿐 아니라 참여한 많은 민간기술의 승리이기도 하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누리호에 탑재된 액체로켓 엔진기술을 개발하여 6개 엔진의 조립과 납품을 총괄했다고 한다. 한화 김승연 회장은 누리호의 성공을 보고 프로젝트 개발에 참여한 임직원들에게 “지난 십여년 세월 동안 여러분이 흘린 뜨거운 땀방울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고 편지를 보내 격려했다고 한다.   지난 주에는 프린스턴대학교의 허준이 교수가 노벨상보다도 받기 어렵다는 필즈상을 헬싱키에서 수상했다. 수학계의 노벨상이라는 필즈상은 사십세 이하 수학자에게만 사년에 한번 시상한다. 난제 ‘리드 추측’과 ‘로타 추측’ 문제를 허 교수가 풀어 기초과학에서도 한국인의 우수성을 증명한 셈이다.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 귀국해 서울에서 자라고 서울대에서 학사·석사를 마친 인재이기에 더욱 뿌듯하다.   ■  「 누리호, 필즈상 등 과학기술계 쾌거 초일류 기술만이 국가의 미래 보장 여의도~세종 하이퍼루프 시도하면 전국 1시간 생활권의 공간혁명 가능 」    이런 쾌거들을 보면 앞으로 노벨상 수상자들도 연이어 나오게 될 것을 기대해 볼만하다. 우리나라가 본격적으로 과학기술 연구를 시작한 것이 겨우 이삼십년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하버드 대학을 위시한 세계 주요 대학에서 활약하는 우리 과학자들이 즐비하다.   최근 이재용 삼성 부회장이 유럽을 순방하고 나서 첫째도 기술, 둘째도 기술, 셋째도 기술이라고 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부존자원도 없는 우리에게 경쟁력은 기술밖에 없다. 초일류기술은 우리의 안보까지 책임질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반도체 인력양성에 지나칠 정도로 집착하는 것도 이해할 만하다.   21세기 인류문명사를 바꿀 기술의 하나가 교통혁명이다. 미국 버진 하이퍼루프사의 조사에 의하면 세계 100여개 국가에서 2600여개 하이퍼루프 노선 건설을 타진하고 있다고 한다. 미국·캐나다·유럽·UAE·사우디·인도·중국·러시아 등에서 하이퍼루프 건설 추진이 논의되고 있다. 일본은 이미 초고속 자기부상열차를 도쿄~나고야~오사카 구간에 건설하기 시작했다.   하이퍼루프는 시속 1200㎞로 시속 800㎞인 비행기의 1.5배 속도를 낼 수 있다. 게다가 스웨덴의 청소년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처럼 비행기에서 나오는 탄소배출을 우려하여 비행기 탑승을 거부하게 되면 하이퍼루프는 비행기를 대체할 미래형 이동수단으로 매우 이상적이다. 안정성을 걱정하기도 하지만 우주를 날고 달나라를 가는데 튜브 안 자기부상열차 기술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세종시에 새로운 국회의사당을 건설하는데 국회 사무처에서는 1조 4263억원의 비용이 든다고 추산했다. 그 대신 2030년을 목표로 여의도~세종 하이퍼루프 시범 프로젝트를 시도해보면 어떨까? 만약 이 시도가 성공한다면 1970년대 경부고속도로 건설로 1일 생활권이 되었던 우리나라가 2030년대에는 1시간 생활권이 되는 공간 혁명이 일어나게 된다. 일론 머스크의 하이퍼루프 건설비용에 따르면 여의도에서 세종까지 130㎞ 정도의 직선형 하이퍼루프를 건설하는데 2조가 채 들지 않는다. 하이퍼루프가 건설되면 서울에서 부산까지 20분, 여의도에서 세종까지 5분이면 갈 수 있다. 그렇다면 굳이 세종시에 또 하나의 국회의사당 분원을 지어야 할까?   현재 우리나라 하이퍼루프 기술은 세계 최고수준이다. 한국철도기술연구원은 시속 1019㎞의 공력시험에 성공했고, 세계 최초로 냉동기 분리형 초전도 LSM추진형 자기부상장치의 기술도 확보했다. 현재 우리 기술로 건설비는 KTX의 절반, 운영비는 KTX의 45% 수준이다. 아진공상태에서 자기부상열차로 운행되기에 튜브위에 태양광 패널을 설치하면 전력비용은 크게 절감된다.   NASA가 달 탐험 아폴로 프로젝트를 추진했을 때 정치적 반대 여론이 드셌다. 하지만 미국은 이를 통해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 기술 선도력으로 세계 일등 국가가 되었다. NASA의 우주개발 기술은 에어쿠션 신발, 인스턴트 커피, 연료전지, 형상기억합금, 라식 수술에 쓰이는 레이저 기술, 고어텍스, 영상 기술 등 셀 수 없을 정도로 민간기술로 이전되었다. 하이퍼루프 기술개발을 우리가 선점하면 이를 통한 최첨단 민간기술 이전효과는 엄청날 것이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넘어 다음 세대가 살아갈 미래공간은 포퓰리즘에 좌우되는 정치의 공간이 아니라 기술의 공간이 되어야 한다. 캐나다의 전설적인 아이스하키 영웅 웨인 그레츠키는 이런 말을 했다. “훌륭한 아이스하키 선수는 퍽이 있는 곳을 향해 달려간다. 하지만 위대한 아이스하키 선수는 퍽이 날아올 곳을 향해 달려간다.” 위대한 나라와 위대한 지도자는 이삼십년 앞서서 미래를 볼 줄 아는 혜안을 가져야 한다. 정치의 공간이 아니라 기술의 공간만이 미래세대를 위한 희망이다.   염재호 고려대 명예교수·전 총장 

    2022.07.13 00:36

  • [염재호 칼럼] 27년 체제를 위한 제언

    염재호 고려대 명예교수·전 총장 미국은 영국의 식민지로부터 독립된지 200년도 안 되어 세계 1위의 국가로 부상했다. 미국이 비슷한 크기의 캐나다와 러시아, 그리고 브라질에서 이루지 못한 세계 초일류 강국이 된 이유는 무엇인가? 한마디로 그들은 미래의 문제를 위해 끊임없이 도전하고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미국의 지도자들은 식민지 지배를 받았던 영국과 과거사 문제로 갈등하지 않았고 미래의 미국을 위해 그동안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시스템을 창조해냈다.   미국이 독립하던 당시 전 세계는 왕정 국가였다. 미국은 절대 군주가 독점하고 있던 왕권을 서로 견제와 균형을 하는 행정, 입법, 사법으로 나누고 선거에 의한 대통령제를 만들어냈다.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4년 연임을 하고 나서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고 했을 때 부하들은 의아해했다고 한다. 어떻게 왕이 8년만 하고 물러나겠다는 것인지. 만약 물러난다고 하면 아들에게 물려주어야 하는지를 물었다는 일화가 있다. 왕정만 알고 있던 부하들은 자식이 아니라 선거를 통해 동료 제퍼슨이나 애덤스에게 국가운영을 맡겨야 한다는 워싱턴의 뜻을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대통령제를 미국은 창조했고 이제는 삼권분립과 함께 대통령제가 전 세계 민주주의의 대표적인 국가운영 체계가 되었다.   ■  「 미국의 힘은 새 시스템 창조 능력 갈등심화 양당 단원제 국회의 한계 2027년 새 정치시스템 만들어야 원로원 미래원 포함 삼원제 국회로 」    이뿐 아니라 미국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달 탐험을 위해 NASA를 창조했고, 이를 통해 20세기와 21세기 문명사를 이끈 신기술들을 창조해냈다. 지금도 미국 실리콘밸리는 세계의 기술과 산업을 주도하고 있다. 문화적 측면에서도 미국은 다양한 이민자들이 모여 만든 연합국가이지만 자유라는 보편적 가치로 국가통합을 이루었다. 이처럼 미국이 세계 1위 국가가 된 이유는 끊임없이 사회문제를 새롭게 해결하는 창조능력이었다.   1962년 제 3공화국으로 시작된 군사정부는 전두환 정부에 이르기까지 25년간 고도경제성장은 이루었지만 국민의 자유는 억압한 독재정권이었다. 이제 시민혁명으로 87년 체제를 탄생시킨지 35년이 되었다. 그동안 민주화는 이루었지만 사회적 갈등은 심화되고 정치는 이를 효과적으로 해결하지 못했다.   윤석열 정부뿐 아니라 앞선 모든 정부가 소통과 화합을 강조했지만 여야간 대립은 갈수록 극심해진다. 외국에서는 우리나라 여야 정권 교체가 빈번한 것을 보고 민주주의 발전을 이야기하지만 실제로 정권 교체는 매 정권마다 실망과 배신감의 결과에 불과하다.   정치인 출신이 아닌 윤석열 대통령의 지난 한달 간의 행보는 아직 평가는 이르지만 확실한 차별성은 보인다. 이런 윤 대통령이 성공한 지도자로 역사에 남으려면 우리 정치 시스템을 획기적으로 바꾸어야 한다. 지금과 같은 양당제 국회는 협치도 불가능하고 편가르기와 갈등조장만 더욱 격화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대안은 윤 대통령이 임기 초에 27년 체제를 위한 초석을 마련하고 다음 총선이 끝난 다음 개헌을 통해 우리의 정치체제를 바꾸는 것이다. 로마는 민주주의를 위해 시민대표인 민회뿐만 아니라 원로원을 두었다. 이처럼 많은 나라에서 양원제를 채택한다. 단원제 의회가 일방적이고 과격한 입법을 통해 독주하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 상원과 같은 원로원을 두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조약 비준 권한과 고위 공직자에 대한 청문회와 대통령의 임명 승인권을 상원만 갖고 있다. 하원의 세입법안에 대한 심의뿐 아니라 하원에서 의결된 안을 거부할 권한도 갖고 있다. 이제 우리도 갈등과 분열을 벗어나 협치를 하기 위해서는 개헌을 통해 새로운 27년 체제에서 양원제를 도입하는 것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 사회 각계를 대표하고 정치원로들이 참여하는 상원에서 하원의 양당제로 인한 치열한 다툼과 승자독식의 입법독재를 견제할 수 있는 시스템이 마련되어야 한다.   더 나아가 상원 하원 양원제(bicameral)를 넘어 미래원과 같이 미래문제는 미래세대가 결정권을 갖는 삼원제(tricameral) 국회도 생각해볼 수 있다. 지금 각국은 세대 간에 사회경제적 불균형으로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다. 재정적자와 정부부채, 연금, 의료보험 등 미래세대에 짐을 떠맡기는 법안들을 포퓰리즘 의회는 여과없이 통과시키고 있다. 작년에 신생아 출산이 27만명에 불과한 우리나라가 올해에도 43조원에 달하는 저출산 예산을 집행한다. 이 돈이면 신생아 1인당 거의 2억원에 가까운 지원을 해도 된다. 기성세대 국회의원들이 당리당략으로 무책임한 예산만 낭비하기보다 미래의 문제는 미래원의 국회의원이 푸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제 40세 이하에게만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주는 국회의 미래원이 저출산, 육아, 교육, 청년실업, 연금 및 건강보험 개혁 등 자신들의 미래 문제에 대해 법안을 발의하고 양당 중심 하원 의원들이 통과시킨 관련법안도 이들의 인준을 받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21세기 점점 복잡해지는 사회적 갈등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창조해낼 수 있을까? 100세 장수 시대에 세대를 뛰어넘는 사회문제를 삼원제 국회에서 해결해낼 수 있으면 좋겠다.   염재호 고려대 명예교수·전 총장

    2022.06.15 00: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