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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염재호 칼럼

다양성 모순의 시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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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염재호 고려대 명예교수·전 총장

염재호 고려대 명예교수·전 총장

지금 우리는 다양화된 사회에 살고 있다. 20세기에 인류는 경제성장만이 유일한 목표인 것처럼 달려왔다. 세분화된 전문성과 과학적 관리법을 통해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이루어냈다. 하지만 20세기에 정답이라고 생각했던 발전가치는 인류 전체에 심각한 폐해를 끼쳤다. 대량소비로 쓰레기, 공해, 지구온난화 등 지구생존까지 위협하는 문제를 21세기 인류에게 남겨준 것이다.

인류 문명이 디지털화로 재편되면서 산업시스템이 바뀌었다. 20세기 소품종 대량생산에서 21세기 다품종 소량생산의 시대로 변화되었다. 획일적이고 소수가 지배하던 사회가 개별화되고 다양한 사회로 바뀌었다. 지상파 3사가 방송 채널을 독점하던 시대에서 이제는 종편을 비롯하여 100개가 넘는 채널이 열려 있다. 신문도 한두 가지 종이신문을 구독하던 시대에서 여러 개 신문의 다양한 뉴스를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 선별해 볼 수 있는 시대로 바뀌었다. 다문화가정도 크게 늘어 더는 단일민족이라는 이야기를 하기 어렵게 되었다. 상품도 백화점이나 상점이 아니라 다양한 홈쇼핑이나 온라인 쇼핑을 통해 구매한다. 차이와 다름을 강조하는 다양성의 시대가 된 것이다.

다양성 증가와 편향된 팬덤현상
공감능력 상실한 다양성의 모순
다양성 정치화로 부족주의 심화
공감능력 결여로 공동체 몰락

가치의 다양성도 확대되고 있다. 원래 사람의 반쪽이라는 의미에서 사용되던 반려(伴侶)의 개념이 이제는 사랑스러운 놀이의 대상이었던 애완(愛玩)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애완견이라 불리던 것이 반려견이 되어 강아지가 가족의 일원이 되고 있다. 배우자나 자녀 대신 반려견과 반려묘와 생활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결혼 축의금을 받을 수 없는 비혼주의자들이 비혼을 선언하면 비혼 축의금을 주는 문화도 생겼다.

성에 대한 개념도 빠르게 변화하고 다양해지고 있다. 태어날 때 타고나는 남녀 두 가지밖에 없던 생물학적 성별 섹스(sex)에서 사회적으로 규정하는 성별인 젠더(gender)가 더 중요한 가치로 여겨진다. 미국에서는 이제 자신의 이름 뒤에 젠더로 성별을 구별하는 he, his, him과 she, her, hers를 적어야 한다.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립대학 병원 소아과 의사였다가 보건부 차관보가 된 레이첼 레빈은 두 명의 자녀를 두고 있는 아버지이지만 자신을 여성으로 성 정체성을 밝힌 최초의 고위관료가 되었다. 언론에서도 그를 지칭할 때 she라고 부른다. 성 소수자의 정체성은 레즈비언, 게이뿐 아니라 양성애, 트랜스젠더 등 다양하게 분류되어 최근에는 9개 정도까지 구별된다.

이처럼 기존에는 무시되거나 묻혀 왔던 다양한 가치들이 인정받는 다양성의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다양성이 확대되고 개별적 가치가 존중받는 뉴노멀이 등장하는 반면 다양성을 인정하는 공감 능력은 퇴보하는 다양성 모순의 시대에 접어들고 있다. 다양성 가운데 한 가지만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여 다른 다양성에 대해 적대적인 감정을 드러내는 현상이 두드러진다. 젠더갈등, 세대갈등, 계층갈등, 지역갈등에서 보듯 상대를 이해하는 공감 능력은 심각하게 퇴화하고 있다. 특히 다양성이 정치화될 때 사회는 비판적 판단능력을 상실하고 일방적으로 비난하고 매도하는 부족정치가 부활하는 것을 보게 된다.

민주주의는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전제로 공동체의 발전을 도모한다. 특정 이념이나 가치에 함몰된 개인이나 집단이 SNS 등을 통해 사고의 편향적 확대 재생산을 할 때 민주주의는 위기를 맞는다. 팬덤 현상으로 비판의식을 상실하고 무조건적인 지지와 환호를 외칠 때 다양성의 가치는 훼손된다. 야수처럼 다른 집단에 대한 적대감과 공격본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다양성이 우리를 덕후와 같이 좁은 영역의 가치에 몰입할 수 있는 자유도 보장해 주지만 다른 다양성에 대한 무관심과 적대의식을 키우는 동굴 속의 존재로 만들기도 한다.

진화생물학자 프란스 드 발(Frans De Waal)은 『공감의 시대』에서 영장류가 다른 동물에 비해 진화할 수 있었던 것은 고도의 상호의존성 때문이라고 한다. 인간은 원래 이기주의의 본성을 갖고 태어났지만 사회 전체를 생각하는 ‘계몽된 이기주의’를 통해 공동체 사회를 발전시켜 왔다. 다름을 인정하는 공감 능력 없이는 공동체는 성장·발전할 수 없다. 상대주의 가치를 강조한 카를 포퍼도 선민사상에 기반을 둔 일방향성 역사주의가 비타협적 급진주의와 전체주의를 야기했다고 한다. 포퍼는 말한다. “우리는 짐승으로 돌아갈 수 있다. 하지만 만약 인간으로 남기를 원한다면 오직 하나의 길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열린 사회로의 길이다.” 소수가 즐기는 다양성의 가치뿐 아니라 다수가 유지하는 기존의 가치도 존중받아야 하는 것이 다양성의 긍정적인 면이다.

민주주의 위기는 승자독식의 다수결 정치 시스템에 기인한다. 소수 극렬지지층을 동원하여 정치권력을 잡으려는 포퓰리스트의 야심은 공동체를 파멸로 이끌 수밖에 없다. 다양성에 대한 공감 능력이 결여되어 포용과 양보 없이 경쟁과 승자독식에 빠질 때 그 공동체는 몰락하게 된다. 지금 여야 정치지도자들이 반드시 새겨들어야 할 대목이다.

염재호 고려대 명예교수·전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