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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염재호 칼럼

지정학적 위기와 정치 지도자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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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염재호 고려대 명예교수·전 총장

염재호 고려대 명예교수·전 총장

우리나라가 이웃 나라의 침입으로 처참하게 황폐해진 대표적인 예가 임진왜란이다. 1592년 꼭 430년 전 일이다. 조선이 개국한지 정확히 200년 만에 맞은 왜적의 침입으로 조선 인구는 약 30%가 줄어들었고, 당시 인구의 약 1%에 해당하는 10만 명이 일본에 포로로 끌려가 거의 돌아오지 못했다.

또 한 번의 참사는 한국전쟁이다. 남북한 군인 70만 명, 미군 4만여 명과 중공군 20만여 명을 포함해 1백만 명 이상의 군인과 남북한 합쳐서 200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사망 실종으로 희생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의 전쟁이었다.

국제전에 시달려온 한반도 역사
미중갈등에 낀 한국외교의 딜레마
지정학적 위기 무시하는 국내정치
외교전략 콘트롤 타워 구축해야

6·25가 동족상잔의 내전이라고 하지만 남한 측에는 미군을 비롯한 16개국으로 구성된 유엔군, 북한 측에는 중국, 소련 등이 참전한 국제전이었다. 임진왜란도 일본과 조선의 전쟁이 아니라 100년 만에 전국 시대를 끝내고 일본을 통일시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기울어가는 명나라를 침공하려는 침략 야욕으로 빚어진 국제전이었다.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에 둘러싸인 한반도의 지정학적 운명은 늘 이처럼 풍전등화와 같다. 구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전 세계의 생산기지가 될 수 있도록 중국을 지원하던 미국이 이제 중국을 다시 견제하는 전략적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지난 20여 년간 중국의 시장개방과 투자를 적극 지원하고 중국 유학생과 기술인력을 우대하던 기조가 급격히 변하고 있다. 미국, 일본, 호주, 인도가 참여하는 쿼드 군사동맹과 한국, 미국, 일본, 대만이 참여하는 반도체 기술 칩4 동맹을 결성하여 중국에 대한 견제를 공고히 하고 있다.

반면 중국은 최근 낸시 펠로시 미 하원의장의 대만 방문을 계기로 미국과 대만에 대해 격앙된 반응을 보이며 대만 상공을 가로지르는 미사일 위협까지 감행하고 있다. 지난 2일에는 동해북부 극동해역에서 러시아의 ‘보스토크(동방)-2022’에 참여해 중러 합동군사훈련을 감행했다. 한미일과 북중러가 신냉전 체제를 구축하는 형국이다.

그레이엄 앨리슨의 『예정된 전쟁(Destined for War)』에서 보듯이 신흥세력 중국과 기존세력 미국이 투키디데스 함정에 빠지면 전쟁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 경우 전쟁터는 미국이나 중국 본토가 아니라 대만을 비롯한 남중국해나 한반도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실제 전쟁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기술과 무역을 둘러싼 미국과 중국의 우리나라에 대한 압력은 전례 없이 강력해질 것이다. 특히 시진핑이 다음 달 제 20차 중국 공산당 전국대표대회에서 최초로 3연임에 성공해 마오쩌둥 이래 최고 권력자로 등극하면 중국몽을 앞세워 강성 정치를 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 미중 갈등은 심화되고 그 사이에 끼어 선택을 강요받는 우리나라는 심각한 외교 딜레마에 빠질 것이다.

지난 해 1월만 해도 우크라이나 외교장관은 러시아의 침공은 있을 수 없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지금은 참혹한 전쟁으로 우크라이나는 폐허가 되고 있다. 2차대전 후 지속된 세계평화가 무너지고 힘의 논리로 새로운 국제질서가 꿈틀대고 있는데 우리 정치지도자들은 지금 어떤 생각으로 정치를 하고 있는가? 여야 모두 다음 총선이나 차기 대선만을 생각할 때인가? 민생을 챙긴다는 명분으로 포퓰리즘 국내 정치만 하면서 지정학적 위기는 도외시해도 되는가? 언론은 왜 치졸한 국내 정치판의 이전투구만을 연일 주요 뉴스로 보도하는가? 왜 1700만 명이 관람한 영화 ‘명량’이 역대 관객 동원 1위이고 1400만 명의 ‘국제시장’이 4위이고, 최근 개봉된 ‘한산’에 벌써 700만 명 이상이 몰리는지 고민은 없는가?

미중 갈등 사이에서 지정학적 위기가 몰려오는 것은 초강력 태풍 힌남노에 비할 것이 못 된다. 율곡이 십만양병론을 주장하고 이순신이 거북선을 제조하는 전략과 지혜가 있어도 정치지도자들이 사색당파에 빠져 있으면 백성들은 처참한 전쟁의 참화를 피할 길이 없다. 100년 만에 일본으로 파견되었던 통신사 정사 황윤길과 부사 김성일의 선조 임금에 대한 상반된 보고도 서인과 동인으로 나뉘어진 당쟁의 결과였다. 서인 황윤길의 왜침론을 신랄하게 반박했던 동인 김성일도 류성룡에게는 왜침 가능성을 고백했다고 한다. 하지만 당파 싸움 관점에서 이런 위험을 발설하는 것이 국내 민심의 혼란을 막기 위해서라고 변명했다니 한심한 일이다.

이제라도 윤석열 정부는 국내 정치의 늪에서 빠져나와 우리의 미래를 살리는 거시적 안목으로 지정학적 위기에 대비해야 한다. 국제무역으로 세계 10위의 경제대국이 된 나라가 외교를 등한시해서는 안된다. 최소한 외교부는 부총리급 부처가 되어야 하고, 미중 국제문제 전문가를 중심으로 대통령은 총체적 국가외교전략의 콘트롤 타워를 구축해야 한다. 경제, 안보, 과학기술, 문화 등 모든 국가정책은 지정학적 위기에 대비한 전략으로 재편되어야 한다. 정치지도자의 무능과 안일의 폐해가 과거 역사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제 북한 핵 위협과 미중 갈등 사이에서 지정학적 위기 극복 전략이 윤석열 정부의 최우선 국정과제가 되어야 한다.

염재호 고려대 명예교수·전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