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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차이나 염재호 칼럼

은유가 지배하는 세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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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염재호 고려대 명예교수·전 총장

염재호 고려대 명예교수·전 총장

한 해가 또 저물어간다. 세계화의 물결이 도전을 받으며 곳곳에서 지각변동이 일어난 한 해였다. 미·중갈등으로 세계시장 질서에 균열이 생겨 글로벌 밸류 체인이 붕괴하고 새로운 판짜기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다. 미국은 기술패권을 앞세워 중국을 견제하며 쿼드·나토 등 동맹세력을 결집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항해 중국과 러시아는 군사협력으로 서방세력을 견제하고 있다.

러시아 국민 보호를 명분으로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푸틴의 침략 전쟁은 일 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정부가 신나치에 의해 운영되고 있기 때문에 탈나치화하는 것이 전쟁의 목적이라고 주장하며 탱크와 장갑차에 Z 표식을 하고 전쟁을 치른다. 침략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한 은유의 활용이다.

은유가 지배하는 반지성적 사회
본질 성찰보다는 느낌대로 판단
촛불·태극기 등 넘쳐나는 은유들
정치적 선동 수단 오용은 막아야

인스타그램·틱톡 등 사진이나 영상, 그리고 간결한 메시지로 소통하는 이 시대의 특징은 은유가 지배하는 세상이다. 오랜 시간 깊게 성찰하는 대신에 순간적으로 느끼는 대로 판단해버리는 감성적 사회가 되었다. 쉽게 가짜뉴스를 믿고 엉터리 주장에 동조한다. 객관적 사실에 대한 판단은 유보하고 감성에 호소하여 즉각적인 반응을 끌어낸 다음, 진실은 묻어둔 채 은유의 이미지만 남기고 빠르게 사라져버리는 반지성적 사회가 되고 있다.

미국의 대표적 지성 수전 손택(Susan Sontag)은 『은유로서의 질병』에서 우리는 질병의 본질보다 질병이 가진 상징과 은유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고 간파했다. 19세기에 만연했던 결핵은 예민하고 비쩍 마른 사람들에게 나타나서 동정심의 감성을 유발하는 질병의 은유를 갖고 있다. 그래서 20세기 말 결핵이 사라지는 바람에 문학과 예술이 쇠퇴하고 있다는 어느 비평가의 말을 손택은 인용한다. 반면에 암은 결핵처럼 낭만적이라기보다는 투쟁과 전투의 은유를 가진 음울한 질병이다. 암적인 존재라는 은유처럼 암은 흉포한 에너지를 가진 질병으로 사회에서 제거되어야 하는 악을 지칭할 때 종종 쓰인다. 20세기 후반에 나타난 에이즈에 대한 은유는 에이즈를 바이러스로 보지 않고 타락한 성적 문란으로 야기된 저주의 질병으로만 인식했다. 이처럼 질병을 은유로 이해하기 때문에 질병을 치료보다는 불안·공포·원망의 대상으로 본다.

은유는 이성적 판단능력을 흐리게 만든다. 중세 종교재판의 마녀사냥처럼 집단적 광기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19세기 말 프랑스 유대인 장교 드레퓌스의 스파이 혐의에 대한 재판에선 유대인에 대한 은유가 드레퓌스로 하여금 종신유배형을 받게 했다. 소설가 에밀 졸라는 “나는 고발한다!”라는 공개서한으로 반발했다. 이 일로 프랑스 사회는 드레퓌스파와 반드레퓌스파로 양분되어 극심한 갈등을 겪게 되고, 드레퓌스 사건은 프랑스 사회 분열의 상징이 되었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의 ‘타이틀 42’는 코로나 위험을 명분으로 불법 이민자를 즉각 추방하는 정책이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중국 우한에서 시작됐다는 사실을 근거로 정치적 은유가 증폭돼 동양인에 대한 혐오범죄에 그치지 않고 남미 불법 이민자 추방으로까지 확산됐다. 실업과 구조조정도 이민자들로 인한 피해라는 이미지로 중하층으로 전락한 백인 위주 경제적 약자들을 부추기곤 한다. 프랑스의 인류학자 엠마뉘엘 토드(Emmanuel Todd)는 『샤를리는 누구인가?』에서 2015년 1월 프랑스 전역에서 일어난 시위를 분석했다. 프랑스의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에 실린 무슬림 풍자만화에 대한 테러에 “내가 샤를리다”라는 피켓을 들고 수백만 명이 이슬람의 비문명성을 비난하며 시위를 벌인 것이다. 하지만 토드는 샤를리의 은유가 사실은 사회경제적으로 위기를 느끼는 프랑스의 중간계층이 이슬람 혐오로 결집한 것으로 분석했다. 단순히 표현 자유의 문제가 아니라 신공화주의, 좀비 가톨릭 중간계층이 뭉친 것이라는 주장이다.

우리에게도 은유의 망령들이 현실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군사독재 시절 간첩·반공·반체제·새마을·유신 등의 은유가 있었다면 지금은 더 많은 은유가 세상에 떠돈다. 광우병·세월호·탈원전·적폐청산·토착왜구·촛불·태극기·이태원 등 본질보다 은유가 우리의 판단을 지배한다.

정치인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은유로 유권자들을 현혹하는 데 여념이 없다. 나타난 현상의 본질에 천착하기보다는 은유를 만들어내고 이를 확대재생산하여 증폭시킨다. 대중은 객관적 판단은 유보하고 편 가르기에 내몰려 은유 구조에 함몰되어 버린다. 사회를 객관적이고 보수적으로 지켜주어야 할 언론인과 법조인들이 정치에 감염되어 사실 확인보다는 은유를 양산해낸다. 그리고 지식인이 어느 편에도 서지 않고 객관적으로 양쪽을 비판하면 양비론의 처세술이라고 비난한다.

우리 사회뿐 아니라 전 세계에 은유의 깃발이 나부끼고 있다. 일차세계대전 이후 혼란기에 반유대주의 은유를 앞세워 나치즘으로 독일민족을 선동한 히틀러의 망령이 되살아나는 것 같다. 은유는 시적 언어의 아름다움으로만 활용되어야 한다. 은유가 정치적 선동과 구호로 남용되는 현상은 지식인들이 앞장서서 막아야 한다.

염재호 고려대 명예교수·전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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