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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영의 독서칼럼] 노예여 반란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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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두 분의 목사가 생각나는데 실은 소주 한 잔을 나눈 사이가 아니다.

아이쿠, 무슨 망발을! 목사님과 소주라니? 하나는 조영남 목사로서, 그의 노래를 녹화까지 해둘 만큼 열성인 나는 근자에 그의 신학에 흥미를 느끼고 있다.

다른 하나는 미국에서 활동하는 김민웅 목사인데, 그의 노래 솜씨도, 신학 강의도 접할 기회가 없었으나 그가 애써 전하려는 경제학만은 다소 짐작한다.

국내 간행물에 기고한 여러 글을 통해서 나는 '목사의 경제학' 에 찬탄(讚歎) 과 차탄(嗟歎) 을 거듭하고 있다. 이번 책 『보이지 않는 식민지』(삼인.2001)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 노예 대신 자유의 고난을

식민지에는 노예가 있다. 한국이 외환 위기에 처했을 때 구명선을 보낸 자들이 사실은 우리 삶을 옥죄는 상전이었다면서, 저자는 우리 국민이 "자신의 땀과 수고로 일구어낸 것을 눈앞에서 고스란히 빼앗겨도 아무 항변도 하지 못하고,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기는…노예가 되기에 바쁘다" (7쪽) 고 탄식한다.

노예 처지에 안주하면서 '자유의 고난' 을 멸시하고 거기서 도피하려는 것은 "제국과 제국의 대리인들의 채찍을 두려워하기 때문이고, 제국의 추격을 감당할 길이 없다고 단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 (8쪽) 하늘 아래 둘도 없는 한국과 미국의 혈맹 관계를 감히 '노예와 제국' 에 비하는 무엄한 용기는 왕년의 화려한 - 지금은 거의 멸종된 - 운동권 함성에서나 대할 수 있었다. 노예여 반란하라!

이제 그 주장을 사실과 논리로 입증하는 일이 중요하다. 내가 보기에 저자의 설득은 '찬탄할' 만큼 성공하고 있다. "1997년 12월 국제통화기금(IMF) 의 한국 경제 접수는 한마디로 '빚의 덫' (debt trap) 에 걸린 나라를 헐값으로 낚아챈,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자본의 적대적 인수.합병이었다" (41쪽) 는 관찰을 놓고 그의 삐딱한(?) 시각은 성토할 수 있어도, 현실로 나타난 사태의 추이와 결과 자체를 거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때때로 그가 '소수 의견' 을 전달하는 것은 사실이나, 그 내용이 국가보안법에 저촉될 만큼 불온하지 않은 것 또한 사실이다.

"IMF의 정책이 원래의 질병보다 더 좋지 않은 상황을 만들어내 아시아 민족주의와…반미주의가 확산될 우려가 있다" (1백8쪽) 는 키신저의 언급이나,

"세계화는 대응 여하에 따라 제3세계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식민주의가 될 가능성이 있다" (97쪽) 는 마하티르의 경고를 통해서 무엇보다도 그는 우리 사회의 상식을 수정하려고 노력한다. 뭐 색깔? 허허, 그분은 목사라고!

한국과 말레이시아가 걷는 종속과 독자노선의 비교 설명은 분통이 터지고 당최 조마조마해서 내리 읽기가 힘들었다.

"달러 경제권의 공식 식민지가 되려는 것이 아닌지 의심이 드는" (1백59쪽)

김대중 모델은 "역사적으로 매판정권이라는 평가를 받을 가능성이 큰" (1백87쪽) 반면,

마하티르 모델은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서방 진영의 영향력을 최대한 배제하면서 자율적 역량을 극대화하는 방식" (1백33쪽) 이라니 말이다.

나아가 "김대중이 지난 세월 음으로 양으로 미국의 지원을 받으면서 반독재 민주화 투쟁과정에서 성장해왔다면, 마하티르는 반영(反英) 반제국주의의 민족 해방 투쟁의 역사와 관련된 개인사적 차이가 있다" (1백33쪽) 고 족보까지 들춘다.

"김대중 모델이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서방 자본주의 체제의 적극적인 지지와 홍보의 대상이 되는" 현실과 달리 "마하티르 모델이 때때로 매우 적대적인 반서방주의적 발언을 터뜨림에도 불구하고 '고립주의적 선택' 을 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1백34쪽) 는 사실을 눈여겨보란다.

다 같이 외환 위기 3년여를 보내는 2001년 초반 현재 "말레이시아는 점차 안정을 되찾은 반면 한국은 새로운 위기에 진입하고" 있으니 "과연 누구의 선택이 현실에서 바른 것이었는가" (1백30쪽) 라는 저자의 반문이 내게는 비수처럼 다가왔다.

미국에 사는 만큼 많이 보고 듣고 읽겠지만, 그 화려한 인용과 주석에 솔직히 주눅이 든다. 저자는 개방, 세계화, 금융자본, 신자유주의, 세계무역기구 등등 현대 세계의 '패스워드' 를 상식 밖으로(!) 내밀히 검토한다.

일례로 "세계화는 제국주의 확대 전략의 다른 이름" 이며, "냉전과 세계화는 미국 제국주의 관철 과정의 다른 단계" (2백77쪽) 라는 인식은 정보가 많다고 쓰는 글이 아니다. 그리고 미국의 그가 우리보다 한층 더 자유로운 것도 사실일 터이다.

그러나 그 자유를 기화로 정말 막가는 작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내가 '차탄하는' 까닭은 실로 미국의 그가 이 땅의 나보다 조국을 더 걱정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DJ노믹스의 '예정된 실패' 를 지적하면서도 그는 그 극복방안을 탐색하고, 세계 자본주의의 모순과 미국 경제의 위기 속에서 남북 공동의 '국제 전략' 을 열거한다.

*** 조국이 여러분을 부를 때

한.미 관계사의 핵심은 "남한 사회의 재식민화 과정" (279쪽) 이며, 자주노선이야말로 민족의 생명선이라고 이 책은 결론짓는다.

한쪽에서는 차마 못한 말을 대신해준 저자의 용기에 박수를 보낼 터이고, 반대쪽에서는 잡아넣을 구실과 법조문이 마땅찮아 속으로 열불이 터질지 모르겠다. 나는 방학을 맞은 학생들에게 특별히 일독을 권한다.

시대의 유행 고시와 토익 열풍에 휩쓸렸든 아니든, 뒷날 조국이 여러분을 부를 때를 위해서 말이다. 노예는 반란하고 식민지는 청산돼야 한다면, 아무래도 당신과 소주 한잔의 파계가 필요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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