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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세상읽기

양적 완화보다 질적 강화가 필요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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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김종수 논설위원

요즘 세계 음악계는 ‘강남스타일’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반면, 세계 경제계에선 뭐니뭐니 해도 ‘양적 완화(量的緩和·Quantitative Easing)가 대세다. 양적 완화란 금리 인하를 통한 경기부양이 한계에 부닥치자 각국 중앙은행이 시장에 직접 돈을 푼다는 뜻이다. 대개는 채권이나 기타 자산을 사들이는 대가로 중앙은행이 돈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유럽중앙은행(ECB)이 위기에 빠진 나라의 국채를 무제한 매입하겠다고 나선 데 이어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은행이 무기한 주택채권담보증권(MBS)을 매입하겠다는 3차 양적 완화 조치를 발표했다. 시장의 불안을 덜고 경기를 살리기 위해 무한정 돈을 퍼붓겠다고 작정한 것이다. 그러자 일본은행(BOJ)도 자산 매입 규모를 10조 엔으로 늘려 환율 방어에 나섰다. 바야흐로 양적 완화 전성시대가 도래한 느낌이다.

전 세계적으로 돈이 봇물 터지듯 풀려나오자 주식시장에선 주가가 오르고, 상품시장에선 금값이 치솟는다. 얼핏 경제가 살아날 듯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실물경제 쪽에선 아직 경기회복의 미동도 보이지 않는다. 금융시장에서만 돈 홍수 속에 뭉칫돈이 새로운 투자처를 찾아 이리저리 헤매고 있을 뿐이다.

[일러스트=강일구]

 물론 각국이 양적 완화에 나선 데는 그럴 수밖에 없는 절박한 사정들이 있다. 유럽에서는 ECB가 재정위기에 빠진 나라들의 채권을 사주지 않으면 채권금리가 급등하고 종국에는 연쇄적인 국가부도의 도미노가 일어날 위험마저 있었다. 미국은 대선을 앞두고 실업률이 좀체 개선되지 않음에 따라 인위적으로 경기를 부양해서라도 고용을 늘려야 한다는 압력이 고조돼 왔다. 더구나 더 이상 재정지출을 할 수 없는 상황에 몰리자 경기부양의 짐은 온통 통화정책에 쏠릴 수밖에 없었고, 금리가 사실상 제로 수준인 상태에서 벤 버냉키 연준 의장이 선택할 수 있는 수단은 양적 완화 외에는 달리 없었다. 일본 역시 미국과 유럽의 유동성 살포로 엔화값이 오르자 엔화를 풀어 맞불을 놓기로 했다. 모두가 저마다의 사정으로 돈 풀기 경쟁에 나선 양상이다.

 그러나 전 세계적인 양적 완화 열풍은 당장 역풍을 부르고 있다. 선진국들의 양적 완화로 풀린 돈이 신흥국으로 몰려들면서 신흥국의 통화가치를 올리는 바람에 이들의 수출 경쟁력을 떨어뜨리고 있기 때문이다. 브라질과 중국 등 덩치 큰 신흥국들은 선진국들의 양적 완화 조치가 ‘무책임한 자국 이기주의의 발로’라고 경고하고, 양적 완화를 계속할 경우 자구책을 강구할 것임을 예고했다. 이들의 자구책이란 자신들도 돈을 풀어 통화가치 상승을 막겠다는 뜻이다. 그 결과는 세계적인 규모로 벌어지는 동시다발적인 환율 전쟁이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면 국제금융시장은 대혼돈에 빠지고, 개별 국가의 양적 완화 조치는 더 이상 효력을 갖지 못한다. 각국이 열심히 돈을 풀어댔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의도했던 효과는 거두지 못한 채 인플레이션 압력만 잔뜩 높여놓는 꼴이다. 원래 통화정책은 각국이 내부의 경기조절 목적으로 쓰기에는 유용하지만, 세계 각국이 동시에 쓰다 보면 약발이 확 떨어지게 돼 있다. 더욱이 지금 세계 각국이 직면하고 있는 경제 문제를 통화정책으로 해소하는 데는 처음부터 한계가 있었다. 유럽의 재정위기나 미국의 경기침체, 일본의 장기침체, 중국의 경착륙 위험 등은 돈을 풀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이다. 양적 완화 조치를 통해 일시적으로 시간을 벌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근본적으로 사태를 개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라마다 안고 있는 문제의 성격이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문제 해결의 출발점은 구조조정을 통한 경제체질 개선과 생산성 향상밖에 없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 없다. 경제구조를 질적으로 개선해 경쟁력을 갖추지 못하면 재정위기 탈출이나 안정적인 고용 확대를 보장할 수 없는 것이다. 즉 경제의 거품을 걷어내고 질적으로 강화해야 그동안 쌓인 빚을 갚고 새 출발을 할 수 있다는 얘기다.

 우리나라는 아직 양적 완화로 인한 환율전쟁의 포화에 직접 노출되지는 않았으나 잠재적인 피격 가능성은 농후하다. 단기적으로 양적 완화의 후폭풍에 대비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장기적으로 통화전쟁의 위험에서 벗어나 안정적인 성장의 기틀을 다지는 것도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우리도 경제의 질적 강화가 미국이나 유럽 못지않게 시급하다.

우선 눈앞에 닥친 저성장을 극복할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최근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2.5%로 낮춰 한국 경제가 저성장 국면에 진입했음을 공식화했다. 성장률의 급격한 둔화는 유럽 재정위기의 여파로 빚어진 세계적 경기침체의 탓이 크지만, 한국 경제가 수출의존적인 성장 모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이 배경에 깔려 있다. 즉 내수를 제대로 키우지 못한 채 수출에만 매달리는 경제구조로는 주기적인 경제위기와 세계경제의 급변 사태에 끝없이 휘둘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부의 경제정책은 당면한 경기부진을 해소하기 위한 일시적인 부양책보다는 장기적으로 자생력 있는 내수 기반을 갖추는 데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임기 말 정부로서는 금리의 추가 인하나 양적 완화까지 동원해서라도 성장률을 끌어올리고 싶은 유혹이 클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통화정책의 약발은 작금의 저성장을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보다는 부분적인 재정정책을 통해 경기가 바닥으로 추락하는 것을 막으면서 중장기적인 체질개선에 주력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