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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여인들 전통요법서 아이디어 … 그들과 공동 개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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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순을 바라보는 그는 원래 시인을 꿈꿨다고 했다. 옆집 아저씨 같은 푸근한 인상, 맘씨 좋아 보이는 그는 자연이 만든 또는 자연에서 영감을 얻어 만든 제품 디자인을 ‘눈으로 읽을 수 있는 시’라고도 했다. 제품 생산에는 인류애에 기반한 ‘연대’가 필요하다는 말도 했다. 사회운동을 하는 사람이 할 법한 언급이다. 정작 그의 본업은 여성들의 욕망을 부추기는 일이다. 화장품 브랜드 창립자다.

올리비에 보송(59). 1976년 고향 프랑스 프로방스에서 ‘록시땅’이란 브랜드를 만들었다. 천연 성분, 자연주의 화장품…. 이런 컨셉트를 내세웠다. 대표 상품이 ‘시어버터 핸드크림’이다. 이 화장품의 그릇은 볼품없다. 납작한 치약통· 구두약통 같기도 하다. 은박 포장에 든 것도 있다. 전 세계에서 5초에 1개씩 팔린다. 우리나라에선 하루에 2000개씩 판매되고 있단다. 올 한 해 동안 100만 개 넘게 팔릴 것이라는 게 록시땅 코리아쪽 예상이다. 시어버터란 보습 성분이 들어간 이 핸드크림은 1982년 프랑스에서 첫선을 보인 후 올해로 서른 살 된 스테디셀러다. 보송에게 ‘시어버터 핸드크림’ 이야기, 시어버터에 담긴 아프리카 공정 무역의 이야기를 들었다.

“1980년대 초, 비누를 만드는 사회단체를 도우려고 아프리카 대륙 서부에 갔어요. 프랑스로 돌아오는 길, 환승을 위해 세네갈 수도 다카르 공항에 잠시 들렀을 때입니다. 우연히 한 여기자를 만나 얘기를 나누게 됐죠. 그는 아프리카 여성의 사회활동 참여를 취재하고 있다고 했어요. 부르키나파소 공화국 여성 얘기를 들려주더군요. 거기선 여자들이 ‘시어버터’를 시장에 내다 팔아 용돈을 번다고요. 재밌는 건 그렇게 번 돈은 남편이나 가족들에게 돌아가는 게 아니라 오직 여성 자신만을 위해 쓸 수 있게 돼 있다고 했습니다.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관행이라는 겁니다. 말하자면 여성들이 자신들만의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시어버터였던 셈이죠. 그래서 시어버터가 ‘여성들의 황금’이라 불린다는 얘기도 들었죠. 우연한 계기로 관심을 갖게 된 게 시어버터 핸드크림의 시작입니다.”

라벤더 등 식물에서 ‘에센셜 오일’을 뽑아내는 증류기. 향이나는 식물의 꽃ㆍ잎ㆍ줄기ㆍ뿌리 등을 끓이면 증기가 생기는데 이 증기를 가는 관속 찬물에 통과시키면 원액의 기름 성분이 추출된다.

프랑스어로 ‘셰이’라고 발음하는 시어버터는 아프리카 중서부 지역에 자생하는 시어나무 열매에서 추출한다. 부르키나파소 현지 언어인 디울라 말로 ‘카리테’, 생명 나무란 뜻으로 불린다. 음식 재료, 전통 치료제의 소재 등으로 쓰임새가 다양해서다. 록시땅 창립자인 보송이 화장품 원료로 이용하기 전까진 영국·스위스 등지에 초콜릿 원료로 수출되던 작물이다. 82년, 보송이 시어버터를 넣은 핸드크림을 만든 뒤 화장품 원료로 전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여기자가 들려준 얘기에만 만족하지 못해 작정을 하고 부르키나파소로 갔어요. 60대쯤 돼 보이는 여성들이 각질이 많이 일어날 법한 팔꿈치를 비롯해 손과 발에 뭔가를 바르고 있는 게 눈에 띄었습니다. 가만 보니 손이나 팔이 20대 여성처럼 촉촉하고 부드럽더군요. 그 여성들이 바르던 게 시어버터였고요. 아시아 지역에서 산과 들의 약초로 여러 가지 약과 화장품을 만들던 것이랑 비슷한 거죠. 원래 주민들이 사용하는 천연 보습제였더군요.”

프로방스의 자연을 응용해 화장품을 만들던 그에게 아프리카인의 전통요법은 새로운 상품 아이디어가 됐다. 하지만 그는 단순하게 “그 여인들로부터 시어버터만 사고 싶진 않았다”고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이상주의자이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무슨 말일까.

“시어버터의 잠재력과 효능을 본격적으로 연구해 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죠. 그와 동시에 원료를 수입하는 것에 그치는 건 원치 않았어요. 인간적인 연대를 통해 프로방스의 작은 기업과 부르키나파소 여인들이 공동 개발하는 뭔가를 추진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부르키나파소 여성 11명으로 이뤄진 조합과 거래를 시작했죠.”

“제 값을 주고 물건을 사겠다”고 공언한 그를 믿은 현지 여성 조합은 30년 만에 1만4000명이 속한 8개 협동조합으로 성장했다. 보송의 뒤를 따라 최근엔 다른 화장품 브랜드도 록시땅과 비슷한 공정무역 개념을 받아들여 시어버터를 구입하는 추세다. 수년 전부터는 유엔여성개발기금(UNIFEM)도 이 지역에서 시어버터 생산을 주축으로 가난한 지역의 여성 자립을 돕고 있다.

록시땅 시어버터 핸드크림. 1989년에 생산된 용기다. 원료인 ‘시어버터’가 생산되는 아프리카 부르키나 파소 공화국에서 다 쓴 구두약통에 시어버터를 담아 쓰는 것에 착안해 올리비에 보송이 디자인했다.

“회사를 세운 후 지금껏 가장 잘한 일이 시어버터 핸드크림이라고 생각해요. 그 지역 고유의 전통을 이해하고 이것이 현지에서 지속될 수 있도록 한 것, 동시에 그 전통을 (핸드크림을 통해)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눌 수 있게 된 게 제 프로젝트의 완결이거든요. 시어버터 얘기는 제 아이들에게도 가장 자랑스럽게 들려주는 이야기이고 제가 세상을 떠난 다음에도 남겨질 자산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업의 본질인 ‘최대 이윤 추구’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대답이다. 결국은 자신이 이윤만 좇는 기업인이 아니라 상생을 추구하는 이상주의자란 얘기였다. 너무 ‘선량한’ 대답. 짓궂은 질문을 하나 던지고 싶었다. “한국엔 록시땅 핸드크림보다 저렴한 제품이 훨씬 더 많다. 록시땅 것은 150mL 제품이 3만 5000원이다. 비싸다. ‘과시성의 럭셔리 핸드크림’이랄 수도 있는데 이게 당신의 이상과 맞는 건가.”

잠깐 생각을 하는 듯하던 그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록시땅 제품을 통해 메시지가 전해지는 것은 긍정적이에요. 이 핸드크림은 단순한 제품이기 이전에 하나의 이야기입니다. ‘여인들의 황금’이라든가 하는 것들이죠. 이 핸드크림을 쓰면서 여기에 담긴 이야기와 철학을 이해하고 받아들인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선문답 같지만 그는 시종 진지했다.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지역에서 나서 자란, 대학에서 시와 문학을 전공한 그의 배경으로 볼 때 그의 대답은 어쩌면 자연스러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연을 벗삼는 시인이 되고 싶었다는 그가 화장품에 눈을 돌리게 된 이유가 궁금했다.

“대학에 다니던 70년대에 오일쇼크가 있었습니다. 전 세계를 강타한 오일쇼크에 프랑스 사람들도 위기를 느끼기 시작했죠. 특히 청년들은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였죠. 그러곤 대체 에너지며, 자연보호 등에 큰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어요. 제가 대학을 졸업할 무렵이었는데, 동네 농부가 오래 쓰다 버리는 ‘에센셜 오일’ 증류기를 헐값에 샀어요. 원래 프로방스에서 나는 라벤더 같은 천연 식물에서 농축액을 뽑아내는 증류기였습니다. 자연에서 얻은 걸, 자연주의 공법으로 생산해 보자는 생각에서요. 다음엔 화장품에까지 생각이 미쳤어요. 에센셜 오일을 쉽고 간편하게 쓸 수 있는 화장품으로 만들어야겠다 싶었거든요. 그 전까지 증류기에서 나온 농축액은 워낙 약효가 세서 의사·약사의 처방에 따라 조심스럽게 사용해야만 했거든요.”

그렇게 시작한 보송의 ‘자연주의 화장품’은 이제 전 세계 화장품 산업에서 중요한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그는 “브랜드는 겸손해야 한다”며 “자연을 존중하고 감사하던 어른들의 전통, 잊혀져 가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삶의 지혜를 찾아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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