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외환관리 마침내 풀다
결국 불발로 그치고 말았지만 외환위기 당시 대한생명이 메트로폴리탄측으로부터 10억달러를 유치할 뻔한 것은 몇십억 달러에 달했던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방미(訪美) 성과 가운데 금액면에서 가장 큰 건이었다.
당시 정부 관계자들은 대통령의 방미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며 상당히 고무돼 있었다.
대한생명 등이 끌어들인 외자가 재무구조 개선을 통해 금융권의 재편을 촉발할 것이라는 보도가 뒤따랐다.
金대통령 방미 만찬 때 메트로폴리탄의 자회사인 메트라이프의 회장을 헤드 테이블에 앉힌 것도 10억달러 투자를 전제로 한 포석이었다. 존 리드 시티뱅크 회장은 당시 출장 중이라 불참했다.
이에 앞서 1997년 12월 16일 뉴욕을 처음 방문했을 때 나는 과거 체이스의 서울지점장을 지낸 올리버 그리브즈 메트라이프 국제담당 부사장을 만났다. 당시 그는 대한생명 투자에 관심이 있다고 털어 놓았다.
金대통령의 방미를 1주일여 앞둔 이듬해 5월 하순 이규성 재정경제부장관이 대통령의 방미 준비를 위해 미 금융계 사람들을 미리 만나보고 결과를 알려달라고 해 나는 다시 뉴욕에 갔다.
그리브즈가 이번엔 대한생명에 7억달러를 투자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이규성 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그 얘기를 하니 반드시 성사되도록 힘써 달라고 당부했다.
이 건은 훗날 외화도피 혐의를 받고 있던 최순영(崔淳永) 전 신동아그룹 회장 조사에 영향을 미쳐 수사가 일시 중단되기도 했다.
당시 메트로폴리탄측은 정부의 공적 자금 지원 없이도 자체적으로 이익을 내 15년이면 결손을 메울 수 있다고 밝혔다.
정부에 부담을 지우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자체 실사팀을 보내 2백여만달러를 들여 실사도 마쳤다. 다만 다른 보험회사들에 정부가 지원을 하게 되면 동등한 대우를 해 달라고 요구했다.
돌아보면, 이 건은 충분히 성사될 수 있었고, 또 성사시켰어야 할 협상이었다.
97년 12월 첫 청와대 보고 때 나는 "외환관리로는 국제수지 방어가 안 된다" 고 말했다. 김포공항에서 여행자의 호주머니를 뒤지는 것은 아프리카 후진국 수준의 외환관리라고 주장했다.
동석한 김기환(金基桓) 전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이사장(현 미디어밸리 회장) 역시 "외환관리를 풀어야 한다" 고 말했다.
YS가 "외환자유화를 해야 한다는 정대사 말이 맞지 않느냐" 고 배석자들에게 물었다. 경제수석을 포함해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99년 4월 우리나라가 1단계 외환자유화 조치를 취하자 일본도 외환에 관한 규제를 완전히 풀었다.
우연의 일치였을까. 어려울 때 외환관리에 의존하지 않고 견뎌내야 외환자유화는 뿌리를 내릴 수 있다.
국제수지 적자든 외환 인플레든 외환문제는 외환관리 강화가 아니라 금융.재정정책으로 풀어야 한다.
뉴욕 첫 방문 때 우리가 미 금융계 인사들을 쉽게 만날 수 있었던 것은 포항제철의 미 고문 변호사인 버논 조단이 막후에서 접촉을 했기 때문이다.
김만제(金滿堤) 포철 회장(현 한나라당 의원)이 미국에 계속 머무를 수 없어 클린턴 대통령의 측근이기도 한 그에게 부탁을 했던 것이다.
나와 함께 뉴욕에 처음 갔고, 비상경제대책자문위원회 위원을 같이 맡고 있던 金회장은 얼마 후 비상경제대책위로부터 견제를 당했다.
그 무렵 비대위의 한 인사가 내게 DJP연대의 한 축이었던 박태준(朴泰俊) 자민련 총재와 金회장의 껄끄러운 관계를 환기시켰다.
金회장은 당시 내가 뉴욕에 주재하는 것이 좋겠다고 정부에 건의했다. 나는 셔틀처럼 왔다 갔다하겠다고 말했다.
외환위기 때 내 역할이란 외국 투자은행에 대해선 안심제.연락관이었다면 우리쪽에서 볼 땐 정부 실무팀을 데려가 서포트하는 일종의 바람잡이였다.
정인용 前경제부총리
정리=이필재 이코노미스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