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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신은 나의 운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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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5대째 가업을 잇고 있는 중요무형문화재 제 116호 화혜장(靴鞋匠) 황해봉씨가 꽃신의 ‘신울’(발등을 감싸는 부분)을 만들고 있다. 꽃신 제작에는 밥풀이 접착제로 사용되는데, 밥풀이 딱딱하게 굳으면 신울이 잘 휘어지지 않아 부드럽게 하기 위해 입으로 살짝 물기도 한다. 둘째 아들 덕진(32)씨도 꽃신 장인의 길을 걷고 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할아버지 황한갑 선생이 만든 갖신.

그가 쇠가죽 바닥에 둥근 은빛 못을 박고 화려한 비단에 풀칠하여 붙이고 신발에 알맞은 빛깔의 장식을 하는 것에 나는 정신이 빠졌다. 그는 언젠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네가 커서 장가들 때는 너하고 너의 신부, 중매쟁이를 위해 제일 예쁜 꽃신을 만들어 줄께”

 재미소설가 고(故) 김용익씨의 단편소설 ‘꽃신’의 주인공은 옆집 갖바치 아저씨의 꽃신 만드는 모습을 홀린 듯 들여다본다. 어린 시절의 황해봉(60)씨도 그랬다. 안경을 코끝까지 내리고 멧돼지털을 끼운 바늘을 가죽에 한땀한땀 박아 넣는 할아버지 황한갑씨(1889~1982·중요무형문화재 제 37호)의 모습은 그를 숨죽이게 했다. 그리고 그 손끝에서 태어나는 꽃신의 예쁜 자태라니.

 할아버지는 돈 되는 일이 아니라며 권하지 않았지만, 손자는 “내가 배우지 않으면 꽃신은 사라질 지 모른다” 걱정스러웠다. 1978년 아버지가, 82년에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는 어깨너머 배운 기술을 혼자 연마했다.

99년 마흔일곱의 늦은 나이에 전승공예대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고, 2004년 중요무형문화재 제 116호로 지정돼 국내 유일의 화혜장(靴鞋匠)이 됐다.

 화혜장이란 목이 있는 신발인 화(靴)와 목이 없는 신발 혜(鞋)를 만드는 장인을 뜻한다. 한국의 전통신을 ‘고무신’으로 알고 있는 이들이 많지만, 삼국시대부터 내려온 한국의 전통신은 ‘갖신(가죽신)’이었다.

 15일 서울 송파구 마천동 작업실에서 만난 황씨는 “1920년대에 일본을 통해 들어온 고무신이 실용적이고 저렴해 널리 퍼졌지만, 뭐니뭐니 해도 우리 고유의 미감(美感)이 담긴 신발은 갖신”이라고 강조했다. ‘꽃신’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된 것은 김용익씨의 소설이 히트하면서부터다.

 그의 집은 일찍이 한양에서 소문난 갖바치 집안이었다. 특히 3대 갖바치였던 할아버지 황한갑씨의 실력은 조선 최고로 꼽혔다.

고종황제가 즉위식 때 신은 적석(赤?·왕이 정복을 입을 때 신던 가죽신)도 할아버지의 작품이었다. “고종황제 즉위식 이야기를 자랑스레 들려주시곤 했어요. 나중에 명성황후 국상 때는 조문객들이 신을 백혜(白鞋)를 만드느라 울면서 밤을 새셨답니다. 피하고 싶었지만 최고의 장인이라 피할 수 없었던 거죠.”

 갑오개혁 이후 고무신·구두가 널리 퍼지면서 꽃신은 갈 곳을 잃었다. 할아버지도 많아야 한 달에 몇 개, 돌잔치용 아이신발을 만드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86년 아시안 게임과 88년 서울올림픽이 ‘전통붐’을 일으키면서, 그도 바빠지기 시작했다. 옛 문헌과 복식학자의 도움을 얻어 사라진 전통신을 되살려냈다. 최근에는 결혼식 등 특별한 날을 기념하기 위해 꽃신을 주문하는 사람도 조금씩 늘고 있다. 지난달 한복 디자이너 이영희씨의 외손주와 결혼한 배우 전지현씨도, 황해봉 장인이 만든 꽃신을 주문해 신었다.

 밑창 마름질부터 손바느질, 신골 박기까지, 꽃신은 72가지의 복잡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다. 한 켤레를 만드는 데 하루 6시간씩, 짧게는 사흘에서 길게는 일주일이 걸린다. 가격도 수십 만원에서 수백 만원까지 나간다.

그러나 고된 작업을 통해 만들어진 꽃신의 아름다움은 그 어떤 명품 구두에 비교해도 꿀리지 않는다. “꽃신의 매력은 부드러운 옆선과 날렵한 신발코에 있죠. 신기 불편해 보이지만 조금 신다 보면 발 모양을 따라 자연스럽게 형태가 변합니다. 신이 사람의 발 모양에 맞춰지는 거죠.”

 황해봉 장인은 17~31일 서울 삼성동 중요무형문화재 전수회관에서 열리는 ‘2012 중요무형문화재 초대전: 5인의 유작전’에 참가한다. 할아버지와 자신의 대표작을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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