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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시처럼 혹은 소설처럼

중앙일보

입력

그들은 그믐을 택했다. 고대하던 밤은 생각보다 빨리 그들을 방문했다. 그믐밤. 세상은 칠흑이다.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캄캄한 어둠이 사열병처럼 거리를 점령했다. 어둠을 밝히는 것은 이제 이우는 달빛 뿐이다. 그러므로 어둠은 더욱 기세등등 자신을 과신할 것이다. 동구 밖 부엉이가 나무 위에서 어둠을 밝힐 듯 가끔 기척했다. 그때마다 개가 짖었다.

혜원 신윤복의 '월하정인(月下情人)'. 달밤의 밀회.
그가 먼저 나타났다. 약속시간을 초조하게 기다리던 그가 조바심이 났던 것이다. 시간을 짐짓 모른척 서둘렀다. 초롱을 들고 어둠을 조금씩 밀어내며 가쁜 숨을 몰아 쉬고 마침내 밀회장소에 도착했다. 황급히 쓴 갓은 그러나 머리카락 한 올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를 만나는 것 이외에 그의 관심을 끄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녀가 곧 나타날 것이다. 그는 그렇게 위안했다.

약간의 격차를 두고 그녀가 도착했다. 그녀는 초롱을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둠과 다투며 조심 조심 발걸음을 옮겼다. 더구나 그보다 늦게 도착해야 한다는 일말의 자존심이 출발하기 전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시야에 들어왔다. 순간 그녀는 숨이 가빠지고 볼이 뜨거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의 호롱이 흔들렸다. 그가 그녀를 발견한 것이다. 그는 숨을 깊이 마시며 태연을 가장했다. 그녀는 쓰개치마 속으로 밉지 않게 얼굴을 슬쩍 감추었다. 오른손으로 쓰개치마를 단단히 말아 쥐는 순간, 묶어 올린 치마가 위로 더욱 당겨졌고 흰 속곳이 부끄럽게 드러났다. 부끄러움과 연정, 그리고 앞으로 발생할 일에 대한 호기심이 야릇하게 교차했다. 그러면서도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포착하기 위해 그녀는 바짝 긴장하고 있다.

이에 비해 선비는 욕망을 내포한 시선으로 그녀를 은근히 응시한다. 그는 초범이 아닌 듯 이제 여유까지 부린다. 그의 자연스런 행동이 이를 증명한다. 그는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가며 그녀를 보는 동시에 그녀의 반대편으로 방향을 잡았다. 순식간이다. 추측컨대 그는 그녀에게 어떤 정표를 건네려고 하거나, 혹은 바지춤을 여미며 빨리 가자고 무언으로 재촉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왼쪽 어깨 위로 흩날리는 갓끈을 보라. 또한 그의 왼쪽 발은 이미 반대 방향을 향해 내딛는 중이다. 어둠을 밝히는 붉은 조명보다 더욱 뜨겁게 달아 오른 그의 심장의 열기가 느껴질 정도다.

그녀는 짐짓 모른척 외면하나 그녀 역시 그를 향한 마음을 거둘 수 없다. 그녀의 몸은 정면을 향하나 발은 이미 선비가 향하는 방향을 향해 적극적으로 내디딜 태세다. 그래설까 화제는, "달도 이미 기운 삼경에 만난 두 사람 속은 두 사람만 알리라(月沈沈 夜三更 兩人心事兩人知)"고 비유적으로 그들의 정분을 드러냈다.

옷차림과 행동거지로 미루어 두 사람은 양반집 자제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어쩌랴. 남녀의 자유로운 만남은 금기시되었으니. 금기는 위반을 낳고, 급기야 야심한 밤을 틈타 은밀한 밀회를 나눌 수밖에 없다. 밀회는 아름다운 고통이다. 혜원은 당시의 가식적이고 허위적인 사회관습과 규범을 부정하고 두 남녀의 자유로운 사랑을 이렇게 긍정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주제를 부각하기 위해 그는 그림의 공간을 크게 두 부분으로 분할했다. 왼쪽은 집과 담으로 비유되는 공식화된 세계를, 오른쪽은 담장을 과감하게 생략함으로써 두 남녀의 일체된 사랑을 승화시키는 공간으로 설정했다. 혜원은 풀을 비추는 은은한 달밤의 정취를 암시적으로 묘사하고, 화면 오른쪽을 과감하게 생략하는 상징과 비약을 통해 달빛에 녹아드는 남녀의 사랑을 이렇게 함축적인 아름다움으로 묘사했던 것이다.

이처럼 생략과 암시를 통한 시적인 사랑은, 두 남녀의 애정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것보다 사랑의 농도와 밀도를 더욱 강렬하게 드러내는 것 같다. 유사한 배경으로 남녀의 만남을 재현한 그림을 보면 이를 확인하게 된다. 편의상 혜원의 '월하밀회'라고 칭하기로 하자.

'월하밀회'는 야심한 밤, 두 남녀의 열정적인 만남을 사실적이고 직접적으로 나타냈다. 동일한 화가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드러내는 방식은 이렇게 차이가 난다. 두 남녀의 신분은 추측컨대 군인과 기생인 듯 하다. 남자는 전립을 쓰고 전복에 지휘봉 같은 막대를 들었다. 분명 지휘관급 장교일 것이다. 저쪽 모퉁이에서 두 사람의 격정적인 만남을 은밀하게 엿보는 여자는 이 밀회를 성사시킨 장본인이거나, 혹은 두 사람의 관계를 질시하는 여성일 것이다. 그녀 역시 여염집 아녀자 같지 않다.

당시 하급무관은 화류계를 장악하며 기생들의 기둥서방 노릇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 역시 그런 관계로 만난 것이리라. 특별히 오늘은 잠깐 시간을 낼 수밖에 없어 서로 허둥대며 짧은 시간을 원망하는 중이다. 양미간에 힘을 주고 오른팔로 그녀의 허리를 감아 안으며 격정적으로 포옹하는 장교의 얼굴, 그리고 뒤로 물러설 듯 주춤하며 포옹하는 여성의 몸짓이 안타깝다. 이처럼 포옹하는 남녀, 이를 엿보는 사람, 그리고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배경 묘사는 서사의 한 장면 같다.

두 사람을 환하게 비추는 보름달은 감출 것 없는 이들의 사랑을 당당하게 드러내는 것 같지만, 담장이 이들을 짐승처럼 가두는 것 같아 애절하다. 이글에서 봉건적 제도와 규범의 비유로 담을 읽지 않았던가. 그러나 화가는 사회적 제도와 관습을 초월한 적극적인 사랑을 구체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성을 자유로운 인간의 심성이라고 주장한다. 특히 화가는 지휘봉을 사선으로 처리하여, 안고 있는 여성의 성기와 이를 엿보는 여성의 성기 쪽으로 모두 향하게 함으로써 성적 교접을 대담하게 비유하기까지 한다.

허위와 가식을 부정하고 성적인 본능을 아름답게 혹은 대담하게 표현한 것은 근대적 의식의 소산이다. 혜원는 성을 통해 근대적 인간관을 개성적이고 창의적으로 제시했다. 신분을 막론하고 금기된 사랑에 저항하는 남녀의 만남으로 사회적 제도의 가식과 허위를 조롱한다. 사랑을 방해하고 규제하는 사회만큼 부정적인 사회는 없다. 그는 이것을 시처럼 함축적으로, 혹은 소설처럼 구체적이고 대담하게 선포하는 것은 아닐까.

조용훈 yhcho@sugok.chongju-e.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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