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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취재 일기

아직도 살아 있는 대우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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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한은화
경제부문 기자

생경한 장면이었다. 22일 서울 부암동 AW컨벤션센터에서 열린 대우 창립 45주년 기념식. 행사가 무르익었다. 식사도 채 마치지 않았을 때다. 갑자기 사회자가 선언했다. “사가를 제창하겠습니다.” 곧바로 400여 명의 옛 대우맨들이 일어났다.

 “대우주 해와 달이 번갈아 뜨는, 육대주 오대양은 우리들의 일터다. 우리는 대우가족 한집안 식구, 온누리 내 집 삼아 세계로 뻗자.”

 대우그룹은 1999년 해체됐다. 해가 지지 않는 일터였던 대우호(號)는 ‘국내 기업 중 최대 파산’이라는 기록을 남긴 채 침몰했다. 그리고 13년이 지났다. 존재하지 않는 기업의 사가를 부르는 대우맨들의 목소리는 여전히 우렁찼다. 다시 태어나도 대우맨이 되겠다는 그들이다.

 기자 옆자리엔 유충걸(67) 전 대우자동차 이란 KMC 법인장이 앉았다. 그는 이번 창립 45주년을 맞아 33명 임원들의 에피소드를 엮어낸 책 『대우는 왜?』의 저자 중 한 명이다.

유 전 법인장은 30년간의 직장생활 중 25년을 해외에서 보냈다. 오지에선 목숨이 위험했던 순간도 있었다. 가족의 걱정이 이만저만하지 않았을 터. 하지만 그는 “나보다 내 가족들이 대우를 더 믿고 사랑했다”고 말했다.

 대우맨들은 그룹 해체 13년이 흘렀지만 매년 빠짐없이 창립 기념식을 연다. 스스로는 ‘제대로 미쳤던 사람들의 모임’이라 부른다. 그들이 미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대우의 모태가 무역회사였기 때문이다. 꽉 짜여 빈틈없이 돌아가는 시스템보다 현장에서 개인의 역량 발휘가 더 중요한 것이 무역회사다.

박창욱 대우세계경영연구회 사무국장은 “대우는 실패하더라도 땀 흘려 일했다면 용서해줬다”고 기억했다. 이런 기업문화 속에서 대우맨은 ‘창조·도전·희생’ 정신을 배웠다고 믿고 있다.

 대우 해체를 놓고 논란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대우가 정말 회생 불가능한 부실을 안고 있었느냐, 아니면 DJ 정부의 잣대가 대우에 너무 엄했던 것 아니냐는 주장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룹 해체 논란과 별도로 대우맨들의 세계 경영 도전 정신만은 요즘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옛 대우그룹의 임직원 모임인 대우세계경영연구회는 최근 글로벌 청년사업가 양성을 목표로 40여 명을 선정해 베트남에서의 취업·창업을 지원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대우 세계 경영의 정신을 잇는 프로젝트다. 해외가 아닌 내수에 치중하거나 계열사에 일감 몰아주는 요즘 기업의 분위기와 사뭇 다른 모습이다. 어려운 일을 피하려는 요즘 기업과 직장인들이 보고 배울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