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애플, 잡스 17년 철학 깨고 현금 50조원을…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04면

‘디자이너·엔지니어 무리 속의 경영자’.

 팀 쿡(52) 미국 애플 최고경영자(CEO)에 대한 월가의 평이다. 고(故) 스티브 잡스 등 애플 핵심 인사들 가운데 경영을 아는 사람이 그밖엔 없다는 얘기다. 이런 쿡이 19일(현지시간) 현금 곳간을 열기로 했다. 주주들에게 배당을 하기 위해서다. 연간 배당액이 약 100억 달러(약 11조2000억원)에 이를 전망이다.

스티브 잡스(左), 팀 쿡(右)

 배당은 17년 만이다. 애플은 1995년까지 많지는 않지만 주주들에게 이익을 배분하곤 했다. 쿡은 “자사주도 사들이겠다”고도 했다. 이를 위해 투입할 현찰도 족히 100억 달러는 될 듯하다.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FT)는 “쿡이 앞으로 3년 동안 주주들에게 풀 돈이 450억 달러(약 50조4000억원) 정도 될 듯하다”고 보도했다. 애플의 전체 현금 자산 976억 달러(약 105조9500억원)의 절반에 가까운 거액이다.

 그렇다고 애플 금고가 금방 바닥을 드러내 보일 것 같지는 않다. 놀라운 속도로 현금이 쌓이고 있어서다. 애플은 지난해 4분기(10~12월)에만 현금 160억 달러를 거둬들였다. 새로운 아이패드 인기도 만만찮다. 올해에도 현금 유입이 꾸준할 가능성이 커 보인다. 블룸버그 통신은 월가 애널리스트들의 말을 빌려 “배당을 한 뒤에도 애플의 현금 자산은 크게 줄지 않을 수 있다”고 이날 전했다.

 주주 배당과 자사주 매입은 정보기술(IT) 엔지니어 출신 경영자들에겐 익숙한 일이 아니다. 그들 가운데는 미 IT마케팅 전문가인 레지스 매키너가 말한 ‘재무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아서다. 매키너는 “현재 경영자 지위에 있는 IT 엔지니어들은 창업 이후 한번쯤은 파산 위기에 몰려봤다”고 말했다. 이어 “그 충격 때문에 회사가 순이익을 달성하면 무조건 비축하려는 성향을 보인다”고 설명했다. 엔지니어 출신들은 돈이 생기면 신기술 개발이나 직원 보상 등에 먼저 쓰는 패턴을 보인다. 그 다음이 인수합병(M&A)이다. 배당과 자사주 매입은 후순위다.

 잡스도 생전에 재무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그는 내분으로 쫓겨났다가 97년 애플에 복귀했다. 당시 애플은 부도 직전이었다. 운영자금은 고작 석 달치뿐이었다. 큰 거래처 한 곳이 물건 값을 주지 않으면 회사가 흔들릴 판이었다. 마이크로소프트(MS)가 내놓은 윈도95 열풍에 애플 컴퓨터가 외면당한 탓이 컸다.

 잡스는 자존심을 꺾어야 했다. MS 쪽에 손을 벌렸다. 1억5000만 달러를 투자받았다. 의결권이 없는 애플 주식을 넘겨줬다는 점이 그나마 잡스에겐 위안거리였다. 이후 잡스는 현금에 집착했다. 현찰이 들어오는 대로 비축했다. 세금마저 아까워 현금 자산 가운데 절반 이상을 해외 은행 등에 묻어뒀다.

 쿡이 주주들에게 풀 돈은 잡스의 유산이나 마찬가지다. 쿡은 올 3분기(7~9월)에 주당 2.65달러씩 배당하기로 했다. 선임자의 성과물로 생색내는 것일까. FT는 “쿡이 애플의 잡스 흔적을 없애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쿡이 자신만의 경영 스타일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의미로 읽히기도 한다. ‘주주들의 요구에 반응하는 경영’이다. 전임자인 잡스는 주요 주주인 뮤추얼펀드들이 현금 자산을 배당하거나 배당이나 자사주 매입에 쓰라고 요구했지만 콧방귀만 뀌었다. 잡스는 생전에 “주주들에게 최고의 보상은 최고 제품과 높은 주가”라고 입이 닳도록 말했다.

 주주들은 그토록 원했던 배당과 자사주 매입을 환영했을까. 쿡이 배당을 발표한 19일 애플 주가는 2.6% 정도 올랐다. 사상 처음으로 600달러 선을 넘어섰다. 얼핏 보면 주주들이 환영한 듯하다.

 그러나 월스트리트 저널(WSJ)은 “시장 반응이 새로운 아이폰이나 아이패드를 내놓을 때만큼 뜨겁지 않다”고 전했다. 시장이 뜨뜻미지근하게 반응한 이유는 뭘까. 미국 IT 기업들은 배당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혁신 본능을 잃은 경우가 많았다. 과거 IBM이 그랬고 시스코시스템스가 그랬다.

 그 바람에 배당 결정은 애플이 고수익을 좇아 투자할 만한 곳이 줄어들고 있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졌다. 이날 기자회견 자리에서도 논란이 됐다. 쿡은 정색을 하고 부인했다. 그는 “혁신은 애플의 가장 중요한 동력”이라며 “오늘 결정으로 어떤 문도 닫히지 않을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팀 쿡은 스티브 잡스가 1997년 애플에 복귀해 숙청을 단행한 뒤 일상 경영을 맡기기 위해 이듬해인 98년 영입한 인물. 쿡은 60년에 태어나 미국 어번대학에서 산업공학을 공부한 뒤 듀크대 MBA 과정을 마쳤다. 그는 잡스의 영감과 엔지니어들의 신제품 개발을 경영적으로 실현한 인물로 꼽힌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과거 애플이 세계 곳곳에 만들어놓은 생산시설 철폐다. 그는 애플이 디자인·개발을 하고 글로벌 협력업체들이 생산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그 덕분에 아이폰이나 아이패드 판매가격 절반이 애플 수익이 되는 비즈니스 구조가 정착됐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