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수치심과 살인 사이 징검돌, 분노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61호 36면

모든 것이 그 지긋지긋한 가난 때문이다. 라스콜니코프가 대학을 중퇴한 것도, 혹은 5층 집 꼭대기에 있는 조그마한 다락방을 빌려 살게 된 것도, 그리고 방세가 밀려 집주인과 마주치는 것조차 두려운 것도. 돈이 모든 가치의 중심이 되는 순간, 가난한 자는 인간으로서 자신의 자존감을 유지하기 힘들다. 도스토옙스키의 명작 『죄와 벌』은 가난으로 인해 자존심의 상처를 받은 젊은 영혼 라스콜니코프(애칭은 ‘로쟈’)의 서글픈 이야기를 러시아 문학 특유의 격정적인 문체로 묘사하고 있다.

강신주의 감정 수업 <7> 감정의 승화

도스토옙스키의 작품 대부분에는 냉혹한 자본주의에 대한 울분이 전제돼 있다. 『죄와 벌』에서도 마찬가지다. 주인공 라스콜니코프도 돈이 필요한 이웃을 등쳐먹고 그들의 자긍심을 파괴하는 전당포 노파 알료나 이바노브나에 대해 깊은 분노로 그녀를 살해하는 죄를 저지른다. 이미 전당잡이 집을 처음 찾았을 때부터 라스콜니코프는 그 수전노 때문에 수치감으로 몸을 떨었던 적이 있다.

그는 전당잡힐 만한 물건을 두 개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오래된 아버지의 은시계였고, 다른 하나는 여동생이 헤어지면서 기념으로 선물한 붉은 보석이 세 개 박힌 작은 금반지였다. 그는 금반지를 가져가기로 결정했다. 노파의 집을 찾아냈을 때, 그는 그녀에 대해 별로 아는 바가 없음에도 처음 본 순간부터 참을 수 없는 혐오감을 느꼈다.”
물론 그것은 돈이 없어서 소중한 물건을 팔 수밖에 없는 라스콜니코프의 자격지심이나 수치심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에게 이런 감정을 불어넣은 것은 전당포에서 급전을 얻으려는 인간을 업신여기는 노파의 태도 때문이었다. 하지만 수치심이 무자비한 살인행위로 이어지기까지는 아직 한 단계 절차가 더 필요하다. 그것은 바로 ‘분노’다.
“분노(Indignatio)는 타인에게 해악을 끼친 어떤 사람에 대한 미움이다.” -『에티카(Ethica)』

다른 대목에서 스피노자는 분노에 대해 더 명료하게 말했던 적이 있다. “우리와 유사한 대상에게 불행을 준 사람에 대해 분노한다”고 말이다. 자신과 유사한 대상, 라스콜니코프의 경우에 그것은 바로 돈 없는 평범한 이웃들이다. 돈이 없어 자신의 딸 소냐를 창녀로 보낼 수밖에 없었던 퇴역 관리, 자신에게 돈을 보내느라 가정교사로 있던 집에서 봉변을 당해도 그만두지 못하는 여동생 두냐, 전당잡이 노파가 노예처럼 부려먹는 이복 여동생 등.

마침내 라스콜니코프는 자신의 수치심을 정의롭지 못한 자본주의에 대한 분노로 승화시킨다. 자신에게 가해진 수치심이 단지 자신만이 아니라 대부분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을 괴롭히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수치심의 대상은 정의롭지 않은 대상으로, 그래서 반드시 제거해야 할 악으로 드러나게 된다. 개인적인 악이 공적인 악으로 승화된다고나 할까.

우연일까? 당구장에서 라스콜니코프가 들은 어떤 사람들의 대화는 전당잡이 노파를 죽이려는 라스콜니코프의 결심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수전노 노파의 돈으로 훗날 전 인류와 공공사업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겠다는 결심을 가지고 노파를 죽이고 돈을 빼앗는다면…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그 작은 범죄 하나가 수천 가지의 선한 일로 보상될 수 있는 것 아닐까? 한 사람의 생명 덕분에 수천 명의 삶이 파멸과 분열로부터 구원을 얻게 된다면 한 사람의 죽음과 수백 명의 생명이 교환되는 셈인데, 이 얼마나 간단한 계산이 아니겠는가! (…) 그 노파의 삶은 바퀴벌레와 이의 삶보다 더 나을 것이 없고, 어쩌면 그보다 더 못하다고도 할 수 있어. 왜냐하면 그 노파는 해로운 존재니까. 그 노파는 다른 사람의 인생을 갉아먹고 있잖아.”

『죄와 벌』은 자신이 저지른 살인죄를 죄라고 인정하지 않는 어느 청년의 분노를 다루고 있는 소설이다. 하지만 소냐라고 불리는 창녀를 만나면서 불행한 청년 라스콜니코프는 자신이 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분노는 타당한 것이었지만 자신에게는 한 인간을 단죄할 수 있는 권능이 없다는 것을 자각한 것이다. 자신도 혹은 전당잡이 노파도 모두 자본주의라는 냉혹한 사회구조의 희생양에 지나지 않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너무 때늦은 반성, 혹은 너무 무기력한 반성 아닌가. 어쩌면 바로 이 점이 도스토옙스키 문학의 가능성이자 한계일지도 모른다. 체제에 돌려야 할 분노를 인간에게 돌리고는 전전긍긍하는 개인, 그래서 한없이 자본주의의 냉혹함에 무기력해지는 인간. 어쩌면 19세기 문학이 가진 한계를 이처럼 비극적이고도 분명하게 보여주는 소설도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21세기에 살고 있는 우리는 19세기를 넘어서는 데 성공한 것일까? 모를 일이다.


대중철학자.『철학이 필요한 시간』『철학적 시읽기의 괴로움』『상처받지 않을 권리』등 대중에게 다가가는 철학서를 썼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