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대기업들, 한국의 IT·나노·조선 기술에 큰 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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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호 전 러시아 대사가 2010년 2월부터 2011년 11월까지의 모스크바 근무를 마치고 귀국했다. 지식경제부 장관 출신의 이 대사는 러시아 경제계와 우호적인 협력 체계를 구축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러시아 시장의 거대한 잠재성을 간과하면 안된다고 강조했다. 12일 이 대사를 만나 러시아 경험을 들어봤다.

-2년 재임 동안 주목되는 변화를 꼽는다면.
“러시아 정부가 경제시스템 현대화에 매우 노력하고, 부정부패 척결을 위한 단호한 의지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경제 외형이 빠르게 변하고 있다. 칙칙했던 건물이 컬러풀해지고 멋진 쇼핑몰도 많이 들어섰다. 경제가 나아진 걸 피부로 느낀다.”

-경제장관 출신이라는 게 대사 업무에 도움이 됐을 것 같다.
“사람 만나기가 비교적 수월했다. 외교부의 카운터파트는 아태담당 차관이었는데 필요하면 늘 만났다. 그 나라 유수 기업인·경영인들, 경제인사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로스나노, 로스테크놀로지, 가스프롬의 최고경영자들과 친분을 쌓고 자주 협의했다. 이들의 사업 분야는 에너지·광산 분야 등인데 규모가 크다. 현대제철의 제철용 석탄 수입, 포스코가 근로자 주택건설사업에 진출하게 된 것, 대우해양조선의 조선소 진출, 현대중공업의 전기차단기 공장 진출 등은 내가 경제장관 출신이었다는 게 도움이 됐을 것이다.”

-그들의 한국에 대한 관심은 어떤가.
“관심이 많고 호의적이다. 모두 ‘좋은 파트너와 좋은 사업이 있다면 같이 일하고 싶다’고 한다. 같이 할 아이디어를 달라고도 한다. 나노기술, LED, 조선, 정보기술(IT) 같은 분야에 관심이 많다.”

-그렇지만 옛날의 러시아와 지금의 러시아는 다르다는 말이 나온다.
“1990년대와는 분명 다르다. 당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받아들이려고 구조조정을 시작한 러시아는 경제적으로 어려웠고 서방에 기대가 컸다. 한국도 차관을 제공했지만 우리나 서방 다 기대를 충족시킬 수 없었다. 우리는 ‘차관을 돌려받을 수 있을까’ 걱정을 했는데 그런 게 러시아를 서운하게 했을 수 있다. 우린 러시아에 천연자원이나 대북 관계에서 일정한 기대를 했다. 상호 과잉기대였다. 그러나 지금은 현실을 인식하고 정상화 단계에 접어들고 있다.”

-최근의 모스크바 대규모 시위를 어떻게 봐야 하나. 철옹성 푸틴성도 무너지는 건가.
“내가 귀국한 직후의 일인데 현 정부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전보다 높아지고 가시화된 것 같다. 그러나 해석이 조심스럽다. 기본적으로 러시아도 민주주의나 시장경제라는 큰 방향으로 간다. 그러나 어느 사회든 불만은 있게 마련이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미디어의 발달이 이를 촉발시키는 것 같다. 러시아가 정권 나눠 먹기를 한다고 말하는 것은 국외자의 생각이고 러시아 국민의 생각은 다를 수 있다. 많은 러시아인들은 안정된 체제를 선호한다. 거리에 나온 사람들은 소수다. 무시할 수는 없지만 지나친 비중을 둬선 곤란하다. 러시아는 상당히 안정된 국가다.”

-부정부패 같은 문제는 심각하지 않나.
“정부도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행정절차를 간소화하고, 기업하기 좋게 만들고, 외국 투자 유치에 노력한다. 그래도 외국인들은 고물가를 자주 비판한다. 그런데 이는 수요-공급 측면에서 봐야 한다. 수요는 많고 공급은 달린다. 산업 구조 면에서 제조업 특히 소비재가 취약하다. 많이 수입해야 하는데 수송 거리도 길고 날씨도 열악하다. 비용이 많이 들고 비싼 구조다. 러시아가 어떻게 제조업을 발전시키느냐가 국민 삶에 영향을 줄 것이다. 지도층도 에너지 의존형 경제를 바꾸기 위해 ‘경제 현대화 5개년 계획’을 추진
중이다.”

-그래도 여전히 진입장벽이 있다. 엄청나게 비싼 호텔 숙박비도 그중 하나다.
“역시 수요-공급 문제다. 공급을 늘리고 있지만 빠르게 늘지 않는다. 모스크바를 예로 들면 역사적 유산 보호를 위해 건축 규제가 엄격하다. ‘마피아가 장난한다’는 말은 루머일 뿐이다.”

-러시아에 대한 장밋빛 전망이 20년 동안 계속됐지만 실속이 없다.
“이 나라는 우리에겐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대형 미개척 시장이다. 인구도 많고 국토도 넓다. 잠재력이 굉장히 크다. 국민소득도 1만 달러가 넘는다. 계획대로라면 앞으로 우리보다 빠르게 성장한다. 독일·프랑스·이탈리아·터키 기업들이 러시아 시장을 즐기고 있다. 우리도 현대자동차, 롯데호텔, 한국야쿠르트 같은 기업들이 성공했다. 불편한 게 많지만 들어가면 마진이 좋은 시장이다. 소비시장 생산기지로도 활용할 수 있다. 노동력도 우수하고 아직 임금도 비싸지 않다.”

-그럼에도 진출 기업이 다양하지 않다.
“언어, 관료주의, 고물가 같은 문제가 여전하고 러시아 이미지도 무겁기 때문이다. 한국 기업들도 러시아에서 고생하기보다 더 편한 데서 돈을 벌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적극적이지 않다. 그런데 러시아 시장을 선점하면 나중에 더 큰 결과를 얻는다. 하이리스크-하이리턴이 적용되는 시장이다. 러시아에 한국은 좋은 파트너다. 외교적 갈등도 없고, 한국 덩치가 커서 무서워할 상대도 아니고. 역사적 원한도 없다. 본격적으로 러시아 진출을 검토할 시점에 와 있다고 본다.”

-러시아ㆍ한국 모두 시베리아를 중시하는데 성과가 없다.
“시베리아 하면 자원 개발이 떠오르는데 외국 기업엔 사실 어렵다. 인구가 적어 소비시장으론 한계가 있고 유전·가스전 분야의 큼직한 사업은 아직 정부 통제 아래 있다. 예를 들어 유전을 개발하려면 시장과 운송을 생각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송유관을 소유한 러시아 정부와 합의해야 하는 복잡함이 있다. 돈도 몇 십억, 몇 백억 달러가 필요한데 우리 기업들이 동원하기 쉽지 않다. 러시아가 내놔도 받을 능력이 안 된다.”

-한·러 수교 20년이 됐는데 아직도 러시아가 멀게 느껴지는 이유는 뭐라고 보나.
“언어, 문화가 다르고 생김새도 다르다. 역사가 단절돼 있던 생소한 나라다. 그럼에도 수교 20년이란 걸 고려하면 한-러 관계는 매우 발전한 것이다. 교역량도 빠르게 늘고 있다.”

-천안함 사태 때는 기대에 어긋났다.
“부임하자마자 사태가 터졌다. 러시아도 나름 외교적 포지션이 있다. 우리 희망대로 움직이진 않는다. 러시아 외교에는 한국과 북한이 같이 있다. 러시아와 북한과의 수교가 60년 넘었으니 어느 한쪽에 일방적으로 경사된 정책이 쉽지 않을 것이다. 러시아는 한ㆍ미ㆍ일이 반(反)러시아 동맹을 결성하는 것을 우려한다는 말을 여러 번 들었다.”

-북한 경유 가스관 건설은 잘 될까.
“노선, 가스 가격 같은 과제가 있지만 남ㆍ북ㆍ러 모두에 도움이 되니 잘 되리라 보고 또 잘 돼야 한다. 이란 사태를 보면 에너지의 안정적 공급을 위한 에너지원 다양화 필요성이 보인다. 북한의 가스관 차단을 우려하지만 러시아가 대체공급을 보장하는 안전 장치를 만들면 된다.”

-어떻게 러시아와 더 가까울 수 있을까.
“레버리지는 경제협력이다. 중소기업, 제조업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한ㆍ러 자유무역협정(FTA)도 가능하다. 한국과 러시아의 경제가 가장 보완성이 크다는 연구도 있다. 내가 있을 때도 한ㆍ러 FTA를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후 논의하자고 했으니 이제는 논의할 수 있다. 우린 러시아를 너무 모른다. 러시아 사람과 술 한잔 먹고 잘 통하면 우리와 똑같다. 비슷한 정서다. 러시아어 하는 사람을 기업들이 확보해야 한다. 본격적으로 러시아를 볼 때가 됐다. 러시아는 경제대국, 문화강국이면서 외교ㆍ군사적으로 국제 강국이라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더 공고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

안성규 외교한·안보 에디터 askme@joongang.co.k

정리=이가혁 기자 gaw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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