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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봉투의 배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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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오병상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오병상
수석논설위원

“정치판에서 어느 누가 돈봉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돈봉투 사건에 대한 정치권 인사들의 반응은 한결같다. 누구도 예외가 없다고 보면 맞다. 그만큼 돈봉투는 만연해 있고 뿌리 깊다. 현재의 정치시스템은 돈봉투 없이 굴러갈 수 없기 때문이다. 돈은 현 정치시스템의 부정적 정수(精髓)다. 돈을 쫓아가면 후진 정치시스템의 생얼을 볼 수 있다.

 먼저 돈 들어가는 구멍을 따져보자. 고승덕 한나라당 의원이 받았다고 하는 300만원의 성격. 정치판에선 ‘실비(實費)’라고 말한다. 전당대회에 참석하는 유권자(대의원)를 동원하는 데 들어가는 최소한의 경비란 얘기다. 통상 지역구별로 동원하는 대의원은 30명이다. 버스 대절비와 두 끼 식사, 그리고 간단한 간식 비용까지 1인당 10만원으로 잡는다. 30명에 10만원씩이면 300만원.

 300만원 이상 들어가는 플러스 알파는 제각각이다. 이미 자기 편이라 판단되면 최소한의 알파, 일당 5만원 내외면 될 것이다. 대략 합계 500만원 정도. 돈을 질러야만 확보할 수 있는 회색지대라면 1인당 매수 비용이 더 들어갈 것이다. 어차피 우리 편이 아니라면 실비마저 줄 필요가 없다. 그렇다고 돈이 안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다른 후보가 낼 것이다.

 이처럼 수요 측면에서 본 돈봉투의 배후는 동원식 정치시스템이다. 전당대회의 경우 대의원들이 지지하는 후보를 찍기 위해 제 발로, 제 돈 들여 찾아오는 경우가 드물다. 우리나라 정당은 여야를 막론하고 대중에 뿌리내린 ‘대중 정당(Mass Party)’에도 못 미치는 ‘간부 정당(Cadre Party)’ 수준이기 때문이다. 제1야당 대표가 무소속 대표(박원순)에게 참패하고, 한나라당 유력주자(박근혜)가 정치무명(안철수)을 이기지 못하는 여론조사 결과가 그 증거들이다.

 다음 공급 측면, 돈이 나오는 쪽을 따져보자. 고 의원에 따르면 박희태 국회의장 이름의 봉투였다. 박 의장은 왜 돈을 뿌렸을까. 단순하게 생각하면, 당 대표 자리가 그만한 값어치가 있어서일 것이다. 당 대표는 당을 움직이는 자리다. 가장 핵심적인 권력은 공천권이다. 공천을 받고 싶어 하는 후보들로부터 물심양면의 충성지원을 받는다. 돈도 생기고, 파벌도 만들 수 있다. 파벌은 힘이 되고, 정치적 영향력은 다시 돈을 만들어낸다.

 그런 점에서 정작 박 의장의 경우는 예외다. 임기(2008~2010) 중 총선이 없기 때문에 공천권을 행사할 기회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박 의장 입장에선 돈을 뿌릴 동기가 약하다. 박 의장이 “나는 모르는 일”이라며 일관되게 부인하는 모습은 이런 상상을 가능케 한다. 대신 정권 초기라는 당시의 시점을 감안한다면, 당권 장악에 가장 강한 구매력을 느낄 쪽은 청와대다. 당권을 확실히 잡아 국회까지 장악함으로써 국정운영의 효율을 꾀하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래서 일부에선 청와대가 박 의장을 선택해 대표로 만들었다는 해석이 나온다. ‘당권’의 구매자가 청와대며, 박 의장은 대리인에 불과하단 얘기다. 그렇다면 돈은 청와대 인근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높다.

 어느 쪽에서 돈이 나왔든 공급자 측면에서 본 돈봉투의 배후는 ‘당 대표의 권력’이다. 정상적인 권력이 아니라 지나치게 비대한, 과도하게 집중된 권력의 치명적 매력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매력은 공천권이다. 공천권은 소속 의원들을 움직이는 가장 확실한 리모컨이기 때문이다.

 돈봉투만 쳐다봐선 해법이 없다. 문제는 배후다. 배후를 모두 없애면 문제는 해결된다. 수요 측면에선 동원할 필요가 없게 만들어야 한다. 공급 측면에선 당권이란 권력을 없애면 된다. 가장 확실한 해법은 중앙당을 없애는 것이다. 중앙당의 핵심 권력인 공천권은 유권자에게 돌려주는 것이 정답이다. 중앙당 대신 유권자들이 후보를 결정하는 시스템은 오픈 프라이머리(Open Primary)다. 중앙당이 없어진 정당모델은 미국식 원내정당이다. 정당은 의회에서 원내대표 중심으로 움직이면 된다. 의사당 밖에 중앙당이 따로 있을 필요가 없다.

 중앙당과 공천권이란 제도는 박정희 시대의 유산이다. 5·16으로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김종필은 공화당을 창당하면서 강력한 중앙당 중심의 동원체제를 만들었다. 당시엔 동원정당이 효율적일 수도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어쨌든 공화당은 근대화의 한 축으로 기능했다.

그러나 벌써 반세기가 지났다. 박정희식 정치시스템은 이미 수명을 다했다. 박근혜의 한나라당은 박정희식 정치시스템을 뛰어넘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