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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그리고 김정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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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신용호
정치부문 차장

박근혜 전 대표가 당 비상대책위원장을 맡던 날,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다. 박 위원장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위기 수습을 위해 전면에 나선 그가 안보 불안을 해소하는 역할까지 떠안아야 할 형편이다. 그에겐 정치적 ‘더블 딥’이다.

 그는 북한에 대해 아픈 기억이 많다. 어머니 육영수 여사가 1974년 8월, 북한 지령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암살범의 총탄을 맞았다. 2006년 10월에는 북한이 핵실험을 강행해 위기가 고조되면서 당시 이명박 후보에게 지지율 역전을 당했다.

 그런데 박근혜가 김정일을 보는 시선은 좀 달랐다. 두 사람은 2002년 5월 평양에서 만난 적이 있다. 박근혜가 제왕적 정당 구조에 반발해 한나라당을 탈당한 후 한국미래연합 창당을 준비할 때였다. 북한이 유럽-코리아재단 이사였던 그를 초청해 방북이 이뤄졌다. 그의 자서전 200쪽에는 백화원 영빈관에서 단독 면담 중 두 사람이 환히 웃고 있는 사진이 나온다. 기억이 불쾌했다면 싣기 어려운 사진이다. 그는 만남 후에도 김정일을 “솔직하고 거침없는 사람”이라고 평했다. “남북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고도 했다. 실제 그가 정치적으로 김 위원장을 비판한 적은 거의 없다.

 그랬던 김정일의 사망이 한나라당을 구해야 하는 그에게 어떤 운명으로 작용할까. 진정한 지도자는 위기 상황에서 빛나기 마련이다. 한나라당은 국민의 신뢰를 많이 잃었다. 한반도에는 북한 변수로 불확실성이 엄습해 있다. 그는 두 가지를 다 컨트롤해야 할 처지다. 안보에 무게를 두다 당 쇄신의 시기를 놓칠 수 있고, 쇄신에 진력하다 안보를 그르칠 수 있다. 둘 중 하나가 삐걱거려도 그냥 실패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위기가 깊다 보니 차별화의 기회도 남다르다. 그와 대선 경쟁을 벌이고 있는 안철수 교수나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못해 볼 일을 그는 하고 있다. 집권 여당의 비대위원장으로 국민을 안심시키고 위기를 관리하는 건 대선 주자로선 특권이다. 그가 보여준 위기 관리가 국민에게 신뢰를 준다면 지지율에 영향을 미칠 게 틀림없다. 이런 생각도 해봤다. 이 시국에서 비대위원장 박근혜가 예상을 뛰어넘는 전향적 태도를 취해보는 건 어떨까 하고 말이다. 정부는 우회적으로 조의를 표하면서 정부 조문단 대신 이희호 여사 등 일부에게만 조문을 허용키로 했다. 이 방침은 박 위원장과도 조율했을 터다. 그랬다면 다소 아쉽다. 박근혜는 이명박 정부가 쌓아왔던 북한에 대한 벽을 대폭 허물어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예상을 뛰어넘을 만큼 말이다. 2002년 평양 방문을 통해 그가 가진 유연성을 보여주며 차세대 지도자 이미지를 각인시킨 적도 있다. 그런 그가 앞장서 남북 관계의 물꼬를 트는 역할을 했으면 한다. 기회는 있다. 그가 직접 김정일 조문에 대한 입장을 얘기해야 하지 않겠나. 무엇보다 한반도 평화가 내년 대선의 시대정신일 수 있다는 점을 기억했으면 한다.

신용호 정치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