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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로 번역한 나의 시 50편 … 새로운 맛이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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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중견시인 최정례(56·사진)씨가 시력(詩歷) 32년을 정리하는 시선집을 냈다. 2006년 시집 『레바논 감정』 등 지금까지 펴낸 네 권의 시집에서 고른 50여 편의 시를 묶었다.

 헌데 출판사가 ‘팔러 프레스(Parlor Press)’라는 미국 출판사다. 실린 시도 모두 영어로 번역한 것이다. 책을 펼치면 왼쪽에 영어 시, 오른쪽에 번역 원문이 된 한글 시가 배치돼 있어 한글 시가 어떻게 번역됐는지, 번역을 거치며 시의 맛은 어떻게 달라지는지 등을 손쉽게 비교할 수 있다.

 선집의 제목은 ‘순간’이라고 해석하면 마땅할 듯한 『Instances』. 미국의 계관시인을 지낸 로버트 하스의 아내이자 역시 시인인 브렌다 힐만(세인트 메리 대 교수), 하버드 대에서 한국시로 박사 학위를 받은 웨인 드 프레메리가 공동 번역을 했다. 최씨 자신도 공역자로 이름을 올렸다. 한국 시인이 직접 자신의 시 번역 작업에 참가해 완성도를 높인 것이다. 흔치 않은 경우다.

 최씨는 “2006년 미국 아이오와대 국제창작프로그램에 참가한 게 계기였다”고 말했다. “세계 각국에서 온 시인들에게 내 시를 소개하기 위해 영어 번역을 하다가 번역 작업 자체에 흥미를 느꼈다”는 것이다.

 최씨는 본격적으로 영어 번역에 매달렸다. 2009년 1년간 버클리대에 체류했을 때는 영어 실력을 늘리기 위해 방학 때도 여행을 가거나 하지 않고 동네의 소설 강독 프로그램에 참가했다. 물론 늦게 시작한 영어 공부가 충분치는 않았다. 웨인이 초벌 번역을 하면 힐만과 최씨가 이를 가다듬었다. 50여 편을 번역했을 뿐이지만 5년이 걸렸다. 최씨는 “일생 일대의 일이라고 생각해 최선을 다했다. 굉장한 에너지를 쏟아 부었다”고 했다.

 최씨는 “번역을 하다 보니 내 시를 보다 논리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게 됐다”고 했다. 허점이 발견돼 논리적이지 않은 한글 시 원문을 바꾼 경우도 있다. 또 “생각이 정교해지고 감정도 세분화되는 것 같다”고 했다. “한가지 외국어를 잘하면 시를 더 잘 쓰게 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고도 했다.

 최씨의 시는 층층이 쌓인 시간의 켜가 느껴지는 독특한 상상력을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는다. 힐만 역시 시집 머리말에서 “최씨의 시에는 상상력의 품격이 있다”고 평했다.

 시의 핵심이 손상되지 않고 전달된 것이다. 최씨는 “나 말고도 한국에 모던한 시인이 많다는 사실이 미국에 좀 더 알려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Instances』는 이번 주말쯤 서울 교보문고 외국서적 코너에 비치될 예정이다.

글=신준봉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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