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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아름다운 젖가슴이여, 사랑이여"

중앙일보

입력

여자는 성서의 〈아가〉서에 나오는, 피부 빛이 검으나 아름다운 처녀 같아 보였다. 여자는 가슴이 깊게 패인 헌 옷 차림에 목에는 흔한 돌을 알락달락하게 꿴 목걸이를 두르고 있었다.

헌 옷과 수더분한 목걸이에 어울리지 않게, 상아같이 흰 목 위로 솟은 얼굴의 표정은 당당했고, 눈은 헤스본의 연못같이 파랬으며, 코는 레바논의 탑처럼 오똑했다.

머리카락은 보라색에 가까웠다. 여자의 머릿단은 흑염소떼 같았고, 이빨은 갓 목욕하고 가지런히 무리 지어 올라오는 양떼 같았다. 나는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었다.

"아름다워라 그대 나의 고운 짝이여, 그대 눈동자 비둘기처럼 아른거리고, 머리채는 길르앗 비탈을 내리닫는 염소떼, 이는 털을 깎으려고 목욕시킨 양떼 같아라. 입술은 새빨간 실오리, 볼은 석류같으며 목은 다윗의 망대 같아 용사들의 방패 천 개나 걸어놓은 것 같구나……."

나는 놀라움과 기쁨을 주체할 수 없어, 아름답기가 달 같고, 빛나기가 태양 같으며, 위용이 당당하기가 기치 창검을 번쩍이는 군대같은 모습으로 새벽처럼 내 앞에 선 여자가 누구이겠느냐고 나 자신에게 물어 보았다.

여자는 내게로 다가서면서 그때까지 가슴에 안고 있던 가만 보퉁이를 구석으로 던졌다. 그리고는 손을 내밀어 내 얼굴을 쓰다듬으면서 조금 전에 하던 말을 되풀이했다. 도망쳐야 할 지, 가까이 다가서야 할 지 몰라 망설이고 있는 내 귀에 예리고 성벽을 허물어 뜨리는 여호수아의 나팔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여자는, 마음은 원하지만 차마 손을 내밀지 못하는 나에게 미소를 뿌리고는, 암염소같이 주름잡힌 소리를 내면서 가슴 위에 둘러져 있던 치마끈을 풀었다. 치마가 휘장처럼 걷히면서 에덴동산에서 아담 앞에 선 하와 같은 모습으로 여자가 내 앞에 우뚝 섰다.

"아름다워라 젖가슴이여. 부풀어올랐으되 지나치지 아니하고, 자제하였으되 위축되지 않았도다."

여자의 가슴이 흡사 백합 꽃밭에서 뛰는 두 마리 새끼 사슴 같았기 때문이었다. 배꼽은 영원히 비지 않을 술잔, 배는 백합 꽃밭에 놓인 밀가루 자루 같았다.

"오, 처녀들의 청정한 별이여, 오 닫힌 문이여, 뜰의 샘이여, 향기로운 연골로 봉인된 샘이여, 향긋한 골방이여."

나는 이렇게 속삭이고 말았다. 나는 어느 틈에 여자와 살을 맞대고 있었다. 처음 맡는 냄새가 진동했다. '격정의 순간이 오면 남자는 힘을 잃는다'는 말이 생각났다. 나는 그제서야, 악마의 올가미 때문인지 하늘의 은혜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움직이는 격정과 대항할 힘이 없어졌음을 깨달았다.

"아, 숨이 막히는구나. 숨이 막히는 까닭을 알아도 정신을 차릴 수가 없구나."

내 입에서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여자의 입술에서 묻어나오는 냄새는 그렇게 향기로울 수 없는 장미꽃 냄새였고 곧게 뻗은 다리와 가죽 신 속에 들어 있던 발은 그렇게 튼튼하고 그렇게 고울 수가 없었다. 처녀의 몸은 더할 나위 없이 음흉한 장인이 다듬어 낸 보석을 감추고 있었다.

"오 사랑이여, 쾌락의 딸이여, 왕이 그대 머릿단 속에서 포로가 되었구나……."

나는 여자의 품 안에 있었다. 우리는 어느 새 한 덩어리가 되어 주방의 바닥에 무너져 내렸던 것이다. 내 몸에는 수련사의 법의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의 몸은 서로를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좋아서, 여기에 쓰기 부끄러워도 '이 역시 좋았다'였던 것을 어쩌랴.

여자의 입술이 다가왔다. 그녀의 사랑은 포도주보다 달았고, 점액질 타액은 향기로웠다. 목은 진주처럼 맑았고 뺨은 귀고리 아래로 붉었다. 나는 정신 없이 지껄였다.

……사랑이여, 아름다워라, 아름다워라. 그대의 눈은 비둘기 눈 같구나. 모습을 보여다오, 목소리를 들려다오, 그대 목소리는 가락이 아름답고 그대 모습은 내 넋을 빼앗을 것이므로. 오, 내 누이여, 그대는 내 영혼을 겁간하였다. 그대의 눈으로, 그대 목걸이의 사슬 하나로 내 영혼을 겁간하였다. 그대 입술은 벌집으로 떨어지니 그대 혀 밑에서 꿀과 젖이 고이는구나.

그대 숨결은 능금 향기, 그대 가슴은 포도 송이, 그대 입천장에서는 독한 포도주가 흘러 내 사랑을 취하게 하고 내 입술을 흐르는구나……. 감송향(甘松香)과 샤프란, 창포와 육계와 베누스 신목(神木)과 침향 향기가 고루 흐르는 새암이여, 나는 내 꿀로 벌집을 먹었고 내 젖으로 포도주를 마셨구나!

대체 그대는 누구던가? 새벽처럼 일어났으되 달처럼 아름다운가 하면 태양처럼 명징하고도 기치 창검을 시위하는 군대처럼 위풍당당한 그대는 대체 누구던가?

영혼이 길을 잃으면, 보이는 것을 사랑하는 일만을 미덕으로 삼고, 보이는 것을 소유하는 일만을 지복으로 치는 법이던가. 지복의 삶이 그 근본에 취하게 되면 보이는 것이 모두 영원한 천사들에게 둘러싸인 채로 누리는 천국의 삶 같은 법…….

여자가 더할 나위 없이 감미로운 사랑을 풀어감에 따라 나는 마침내 예언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라는 이상한 착각에 빠져들었다.

내 몸은 앞뒤가 두루 보이는 기이한 눈이 된 것 같았다. 문득, 몸을 돌리지 않고도 사방을 고루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문득, 이런 데서 합일과 감미로움과 선과 입맞춤과 포옹이 생겨나는 것이고, 이것을 모두 합하여 사랑이라고 이르는 것인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사랑의 정점에서는 백주에 악마를 만나고 있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영혼을 꾀고 육체를 유린하는 악마에게, 나는, 너의 정체가 대체 무엇이냐고 묻는 악마는 그제서야 제 본 모습을 드러내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에 나는, 양심의 가책이라는 것 자체가 악마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함께 했다. 순간순간 감미로움이 더해 가는 그 쾌락, 내가 경험하고 있던 그 쾌락 이상으로 정당하고 선하고 거룩한 것은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포도주 통에다 물방울을 떨어뜨리면 그 물방울이 곧 포도주에 스며들어 포도주 빛깔이 되고 포도주 맛이 되듯이, 쇠붙이를 센 불길에다 던져넣어 오래 달구고 녹이면 마침내 그 본래의 형태를 잃어버리고 불길이 되고 말 듯이, 햇빛을 받는 밝고 투명한 대기가 빛을 받는다기보다는 빛 자체가 되어 버리듯이 나 역시 쾌감 안에서 쾌감으로 용해되어 버리는 것 같았다.

내게는, '보라 내 가슴은 새 잔을 채울 새 포도주 통 같다'는 시구를 흥얼거릴 힘밖에는 남아 있지 않았다. 바로 그때였다. 찬연한 빛줄기가 내 눈에 보였다.

그 빛줄기 안에는, 감미롭고도 찬란한 불길로 타오르는 노란 형체가 하나 있었다. 빛줄기는 찬란한 불길 속으로 번져갔고 이 불길은 노란 형체 속으로 스며들다가 이윽고 빛줄기와 불길은 하나로 어우러졌다.

**〈장미의 이름〉(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윤기 역, 열린책들, 390~396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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