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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사고 싶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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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정진홍
논설위원

# 꿈을 사? 꿈을 팔고? 100여 년 전인 1910년 박해명은 길몽(吉夢)을 꿨다. 그는 이 꿈을 경주 옥산의 이언적 13세손인 이병유에게 팔았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엔 그 꿈을 팔고 쓴 매매계약서가 남아있다. 거기 이렇게 적혀 있다. “절박하게 돈을 쓸 데가 있어 음력 2월 23일 밤에 용과 호랑이를 본 좋은 꿈을 앞에 말한 사람에게 돈 1000냥을 받고 영영 매도한다. 뒤에 만약 잡음이 있으면 이 문서를 가지고 증거로 삼을 일이다.”

 # 『삼국유사』에도 꿈을 사고판 얘기가 있다. 삼국통일의 영웅 김유신에게는 보희와 문희라는 두 여동생이 있었다. 어느 날 보희는 ‘서악에 올라 소변을 보니 온 서라벌이 오줌으로 덮이는 꿈’을 꿨다. 기이한 꿈이기에 동생 문희에게 조심스레 얘기했다. 문희는 꿈 얘기를 듣자마자 얼른 그 꿈을 팔라고 언니를 졸랐다. 언니는 마지못해 치마 한 감에 자신이 꾼 꿈을 동생에게 팔았다. 그 뒤 축국놀이를 하던 김춘추(훗날 태종무열왕)의 옷깃이 떨어지자 김유신은 자기 집에 들러 꿰매고 가라며 그를 집으로 이끌었다. 먼저 보희에게 옷깃을 꿰매라고 일렀으나 듣지 않자 결국 문희에게 꿰매게 했다. 이것이 인연이 돼 동생 문희는 김춘추의 아이를 갖게 되었으니 그가 훗날 삼국통일을 완성한 문무왕이다. 남산예술센터에서 최근에 본 연극 ‘꿈속의 꿈’이 바로 그 내용이었다.

 # 꿈을 산다는 것은 단순히 호기심이나 장난기의 발동이 아니다. 그것은 절절한 것이다. 지난 수요일 점심에 김우중 전 대우회장을 만났다. 인터뷰를 하기 위해 만난 것이 아니었다. 순수하게 인간적으로 만났다. 감히 말하건대 나는 그의 꿈을 사고 싶다. 1936년생이니 그의 나이 75세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꿈꾸고 있다. 우리 현대사 100년에는 적어도 세 사람의 큰 꿈을 꾼 기업인이 있었다. 이병철, 정주영, 김우중이 그들이다. 고(故) 이병철 삼성 선대회장은 지난해가 탄신 100주년이었으며 고(故)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은 2015년이 탄신 100주년이다. 하지만 김우중은 아직 살아있다. 그의 꿈도 죽지 않았다. 그에 대한 공과(功過)의 논란을 떠나 그의 끝없이 도전하는 힘의 근원인 그 꿈을 사고 싶다. 세계를 향해 맹렬하게 돌진했던 그의 꿈의 유전자를 웅크리고 있는 대한민국에, 특히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다시 퍼뜨리기 위해 그의 꿈을 사고 싶은 거다.

 # 언젠가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구겐하임 미술관 별관 벽에서 봤던 글귀가 다시 떠오른다. “장소를 바꾸고, 시간을 바꾸고, 생각을 바꾸면 미래가 바뀐다(Changing Place, Changing Time, Changing Thought, Changing Future).” 나는 여기에 한마디 덧붙이고 싶다. “꿈을 바꾸면 모든 것이 바뀐다”고. 언제부턴가 대한민국은 꿈이 죽은 사회다. 젊은이들에게 꿈이 뭐냐고 물으면 바보 된다. 취직도 못해 안달인데 꿈은 무슨 놈의 꿈! 애 어른 할 것 없이, 배우고 못 배우고 가릴 것 없이, 돈 있고 없고를 떠나 모두 꿈을 잃고 산다. 그저 편하면 안주하고 힘들면 주저앉는다. 끝까지 악착같이 해보겠다는 독기는 사라진 지 오래다. 배가 불러서가 아니다. 목숨 걸고 도전해볼 꿈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 꿈꾸지 않는 순간 삶은 퍼석해진다. 꿈을 상실한 틈새마다 후회의 곰팡이만 피어오른다. 그게 늙는 거다. 아니 죽은 거다. 꿈은 미래로 나아가는 동력이다. 삶이 팍팍하고 절박할수록 꿈이 있어야 한다. 삶의 그 어떤 처지에서든 꿈이 있으면 뚫어낸다. 진심(眞心)이면 통하고 정심(正心)이면 뚫듯이 절실하게 꿈꾸면 반드시 이뤄진다. 기왕이면 큰 꿈이어야 한다. 제 아무리 높은 벽도 꿈이 크면 넘기 마련이다. 그러니 다시 꿈을 꾸자. 꿈의 유전자마저 바닥나 꿈꾸기 힘들거든 남의 꿈을 사서 꿈의 체세포 복제라도 해야 한다. 그래서 꿈을 사고 싶다. 좋은 꿈을, 멋진 꿈을, 위대한 꿈을!

정진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