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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100%=0 성장주의 함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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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채원(47) 한국투자밸류자산운용 부사장과 최웅필(39) KB자산운용 주식운용2팀장. 두 사람은 한국 가치주펀드 시장의 양대 산맥으로 통한다. 각자 굴리는 펀드 자산이 1조원씩을 헤아린다. 요즘 두 사람이 부쩍 조명을 받는다. 8월 이후 주식시장이 롤러코스터를 타는 와중에 가치주펀드들이 돋보이는 성과를 내고 있기 때문이다.

 돈을 벌지는 못했지만 상대적으로 덜 터지고 수익률 변동폭도 완만했다. 국내 주식형펀드의 최근 3개월 수익률(14일 현재)을 보면 이 팀장의 ‘KB밸류포커스펀드’(-5.4%)와 이 부사장의 ‘한국밸류10년펀드’(-9.2%)가 최상위권을 차지했다. 같은 기간 주식형펀드의 평균 수익률은 -16%였고, 코스피 지수는 14% 떨어졌다. 

 스마트한 투자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일까? 가치주펀드에 돈을 넣거나 신규 투자를 타진하는 이들이 부쩍 늘고 있다고 한다. 가치 투자를 표방하는 국내 펀드는 모두 61개. 펀드평가사 제로인에 따르면 이들 가치주펀드에 올 들어 1조2000억원의 자금이 새로 들어왔다. 특히 ‘KB밸류포커스’는 지난달 설정액 1조원을 돌파해 대형 펀드로 자리잡았다. 늘 ‘변방의 북소리’ 같던 가치 투자가 당당히 주류 자리를 꿰찬 것이다.

 두 사람은 “바야흐로 가치주 투자의 전성기가 다가오는 것 같다”고 말한다. 경제가 장기 저성장 국면으로 들어서면 가치주들이 꽃을 피우기 마련이란 설명이다. 국내외 증시의 역사가 이를 입증한다. 투자자들은 기업의 미래 성장성에 대한 믿음이 떨어지고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이 커질수록 이미 두둑하게 쌓아놓은 유보 자산과 눈앞의 수익 창출 능력에 높은 점수를 주는 속성을 보여왔다.

 하지만 이채원 부사장은 “아직은 좀 더 기다려야 할 때”라고 뜸을 들인다. 그는 “성장주 파티가 끝난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곧바로 자산주 파티가 시작될 것 같지도 않다”고 말했다. 최웅필 팀장도 “지금은 가치주펀드로 수익을 내려 할 게 아니라 피해를 최소화할 때”라고 했다. 무슨 얘긴가? 8월 이후 수익률이 증명하듯 가치주펀드는 하락장에서 방어력이 탁월하다. 하지만 위기가 터진 뒤 움직이기엔 늦은 감이 있다는 게 두 사람의 조언이다. 덜 깨진 펀드에 지금 들어가는 것은 상대적으로 값이 비싸진 물건을 사는 것과 다름없다. 다시 말해 시장이 변동성을 줄이고 안정을 되찾은 뒤에 투자해도 늦지 않다는 얘기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스승과 제자’ 격의 인연을 갖고 있다. 이 부사장은 국내 펀드시장에서 가치주 투자의 원조로 인정받는다. 2000년 동원증권 주식부 펀드매니저로 가치주 투자의 원리를 적용해 5년간 435%라는 경이적인 누적 수익을 올리기도 했다. 동원증권이 한국증권과 합병하면서 한국금융지주 계열의 한국밸류자산운용에 몸담게 된 그는 2006년 자신의 투자철학을 담은 ‘한국밸류10년’펀드를 야심 차게 내놓았다. 장기투자 철학의 실천을 위해 환매기간을 3년으로 못 박는 모험도 단행했다. 

 최 팀장은 1999년 동원증권에 입사, 이 부사장을 사수로 모시며 가치 투자의 원리를 배우고 시장에 적용했다. 이 부사장과 함께 한국밸류로 옮겨 3년간 한 팀에서 가치주를 발굴했다. 2년 전인 2009년 KB자산운용으로 자리를 옮겨 스승인 이 부사장과 선의의 경쟁을 벌이고 있다.

 -롤러코스터 장세에서 상대적으로 수익을 잘 지킨 비결은 무엇인가.

 (이채원) “사실 잘한 게 없다고 생각한다. 지난해 덜 벌어서 이번에 덜 깨진 거다(웃음). 차라리 주가지수가 30% 오르고 우리 펀드는 20%만 벌면 좋겠다. 상대 수익률은 꼴찌를 해도 괜찮다. 출렁거리지 않고 꾸준한 수익을 내는 게 우리의 목표다. 우리 펀드의 변동성은 독보적으로 낮다. 업계 최저라고 자부한다.”

 (최웅필) “펀드의 절대 수익률이 높아야 하는데, 단순히 시장만 이긴 것은 그리 즐겁지 못한 일이다. 펀드매니저는 투자자에게 돈을 벌어 드려야 하는 사람인데, 덜 못했다고 주목받는 건 부끄럽다.”

 -두 사람은 대박보다 손해 덜 보는 투자를 훨씬 중시한다. 왜 그런가.

 (이)“우리는 많이 버는 걸 원치 않는 펀드다. 최저 위험, 중간 수익을 추구한다. 수익의 복리효과를 높이는 게 가치 투자의 기본 전략이다. 주가가 50% 떨어지기는 한 순간일 수 있다. 그러나 이를 만회해 투자원금을 되찾기 위해선 주가가 100% 올라야 한다. 정말 힘든 일이다. 주식 투자에 있어 많이 버는 것보다 덜 까먹는 게 훨씬 중요한 이유다. 오르내림이 큰 게 성장주라면 그런 변동성이 작은 게 가치주의 속성이다. 조금씩 오랜 기간에 걸쳐 수익이 나는 답답함 때문에 많은 이들이 가치주를 외면하지만, 나는 그게 좋아 가치주를 찾는다.”

 (최)“그게 결국 이기는 투자이기 때문이다. 가치 투자 펀드의 첫해 수익률이 0%, 둘째 해엔 30%였다고 가정하자. 다른 일반 펀드는 첫해 -30%, 둘째 해 60%였다고 하자. 연평균 수익률은 두 펀드 똑같이 15%다. 그런데 이런 일이 장기적으로 반복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1000만원을 넣어 이런 일을 10년 반복하면 가치투자펀드는 3173만원, 보통펀드는 1762만원이 된다. 이게 장기 복리 효과다.”

-요즘 증시 투자 여건을 어떻게 보나.

 (이)“우리는 시장과 경기를 전망하지 않는 걸 원칙으로 한다. 기업의 내재가치만 본다. 다만 유럽 상황이 시스템 위기로 번질 것 같지는 않다. 그래도 글로벌 경기가 본격 회복하기까진 아직 긴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자산시장과 기업 모두 저성장이 화두다.” 김수연 기자

(최)"분명 어려운 때다. 다만 더블딥 같은 최악의 상황은 올 것 같지 않다. 경기가 아무리 나빠도 발상의 전환만 하면 얼마든지 좋은 투자 대상을 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경기 나쁘다고 안 먹고 안 입지는 않는다. 이런 기업을 두고 굳이 경기가 회복돼야 좋아지는 기업을 찾을 필요는 없다. 최근 주가 하락으로 PER 4~5배의 싸고 좋은 주식이 많아졌다. 길게 보고 묻어두기에 좋은 종목들이다.”

 -가치 투자가 새삼 주목 받고 있는데.

 (이)"재작년에 500대 상장기업 영업이익이 60% 늘었고 지난해엔 40% 늘었다. 이런 때는 성장성 높은 주식이 수익을 더 내는 게 맞다. 하지만 경기순환적 파티는 끝났다. 올 영업이익 증가율은 20%대, 내년엔 10%로 떨어질 것이다. 성장 둔화는 확실하다. 이제 막연한 미래 성장보다 손에 잡히는 확실한 가치를 추구해야 할 때다. 경기가 가라앉으면 자산주나 필수 소비재주를 사는 게 순리라면 순리다.”

 (최)"시장이 지지부진하면 가치주 펀드가 계속 상대적으로 돋보일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 펀드든 수익을 내려 할 때가 아니라 피해를 최소화할 때다. 가치주 펀드는 장기적 관점에서 투자하는 게 맞다. 지금 주가의 단기 반등을 겨냥한다면 액티브펀드가 오히려 낫다.”

 -‘한국밸류10년’과 ‘KB밸류포커스’ 두 펀드를 비교해 달라.

 (이)"가치투자론에서 주식 가치의 3요소는 성장·수익·안정이다. 각각 미래·현재·과거의 가치를 뜻한다. 셋을 더하면 내재가치다. 가치주펀드 간 차이는 이 중 어디에 비중을 더 두는냐에서 나온다. ‘한국밸류10년’은 현재 가치인 수익에 가장 많은 40%의 비중을 두고 기업을 찾는다. 그래서 변동성이 작은 것이다.”

 (최)"편입 종목이 겹치기도 하고, 아닌 것도 있다. 흔히 굴뚝주만 가치주라 생각하기 쉽지만 산업구조가 선진국형으로 바뀌면서 새로 커지는 산업이 탄생한다. 이런 산업 중에서도 저평가된 새로운 가치주가 나올 수밖에 없다. 최근엔 우리 콘텐트 산업의 경쟁력이 쑥쑥 커지는 데 주목했다. 사람들이 아직 잘 모르지만 분명 미래에 큰 수익을 낼 기업을 찾으면 공격적으로 투자하기도 한다. 에스엠이 대표적 사례다.”

 두 사람은 자기가 굴리는 펀드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이채원 부사장과 최웅필 팀장 모두 부동산을 제외한 금융자산의 전부를 자신의 펀드에 넣고 있다고 했다. 은퇴 후 생활자금이 필요할 때까지 계속 넣어두고 잊어버릴 생각이라고 한다. 그렇게 하면 은행 예금이나 채권보다 분명 나은 수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김수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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