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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청춘은 맨발이다 (124) 사생결단(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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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1979년 3월 7일 신성일(가운데 오른손 붕대 감은 이)이 영화배우협회장 선거에서 승리한 후 주
위 사람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보내고 있다. [중앙포토]

1979년 3월 영화배우협회장 선거는 내게 불리하게 전개됐다. 현 배우협회장 장동휘의 자금줄을 차단해야 했다. 이른 아침 이태원 태흥영화사 사장의 사무실로 쳐들어간 나는 그 자리에서 곽정환 합동영화사 사장과 통화했다. 곽 사장이 여배우 고은아와 결혼하게 된 과정과 집안 내력까지 소상히 알고 있는 나였다.

 “승남이 아버지(곽정환 사장), 나 신성일입니다.”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곽 사장 목소리에는 당혹스러움이 섞여 있었다.

 “웬일이야?”

 “오늘 장동휘씨에게 200만원 보내기로 했죠? 돈 보내면 인연 끊습니다.”

 나는 그 말과 동시에 전화를 끊어버렸다. 장동휘 캠프에 선거자금 500만원을 보내려던 이 사장과 곽 사장은 그 직후 행적을 감추었다고 한다. 자금줄이 끊긴 장동휘가 큰 타격을 받았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장동휘는 79년 1월 15일 긴급이사회를 열어 협회비(월 2000원)를 내지 않은 배우 수십 명을 징계하고 선거권을 박탈했다. 김지미·김희라·남궁원·고은아·이영옥 등은 투표권이 없는 준회원으로 강등됐다.

일간스포츠 79년 1월 19일자는 이 사태에 대해 이렇게 보도했다. ‘이같은 조치는 지금 한창 열기를 뿜고 있는 장동휘·신성일의 선거 대결에서 현집행부를 지지하지 않는 대다수 회원을 정리, 신성일 측에 타격을 주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장동휘는 배우들이 미납 회비를 내려고 해도 ‘지난해 12월 20일로 회계연도 마감을 넘겼다’는 이유로 받아주지 않았다.

 79년 3월 7일로 예정된 배우협회장 선거가 임박했다. 절친한 선배이자 배우협회의 상위 기구인 영화인협회 이사장 신영균이 장동휘를 밀고 있다는 첩보가 입수됐다. 이성을 잃은 나는 우리 캠프에서 “신영균 배를 칼로 찔러버리겠다”고 울분을 토했다. 즉시 신영균에게 전화가 왔다. 그는 “뭐, 선배를 찔러 죽여?”라고 호통을 쳤다. 정신이 아득하고, 오금이 저렸다. 이때까지 내가 백 번 잘했어도, ‘선배를 죽인다’고 말한 것은 내 잘못이다. 영화인협회 이사장 신영균이 이 문제를 확대시키면 수 개월 간의 내 선거운동은 물거품이 될 판이었다. 당장 명보극장 뒤편에 자리한 신영균의 사무실로 달려들어간 나는 신영균 앞에 무릎 꿇고 외쳤다.

 “형님, 분이 풀릴 때까지 저를 때리십시오. 친형 같은 형님이 저를 도와주시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이성을 잃었습니다.”

 신영균은 “나가!”라고 고함쳤다. 그에게 용서받기 전까진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결국 신영균의 분이 풀릴 때까지 울면서 사죄했다.

 나는 평소 생활이 어려운 동료 배우들을 도왔다. 도봉동의 백송과 미아리의 임해림이 자녀 학비로 어렵다고 하길래 5만원씩 주었다. 두 사람은 내가 금품을 살포했다고 장동휘에게 신고했다. 그 건을 받아들인 신영균은 3월 6일 영협 긴급이사회를 열고 7일 열리는 총회를 무기한 연기하기로 결정했다. 내게 결정타를 주려는 조치였다. 난 녹슬어 울퉁불퉁한 철제 비상문을 때리면서 울부짖었다.

 “선배들, 커가는 후배를 이렇게 짓밟아도 되는 겁니까?”

 주먹의 살점이 뭉개지고,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나는 그 곳에서 오른 주먹에 붕대를 감고, 내 캠프로 갔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내 캠프 사람들은 전의를 불태웠다. 배우협회 재적 111명 중 68명이 7일 총회를 강행해 나를 배우협회장으로 선출했다. 극적인 역전승이었다.

정리=장상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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