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청춘은 맨발이다 (117) 선우휘와 김지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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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희 감독, 신성일 주연의 영화 ‘들국화는 피었는데’(1974). 소설가 선우휘의 작품을 스크린에 옮겼다. 신성일(왼쪽)은 이 영화를 찍으면서 선우휘와 백기완을 직접 만나게 됐다.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이만희 감독의 ‘들국화는 피었는데’로 저명 문인 두 명을 알게 됐다. 선우휘(1922~86)와 김지하(1941~)다. 1973년 9월 말 강원도 인제에서 시작된 ‘들국화는 피었는데’ 촬영은 한 달 이상 계속됐다. 어느 날 선우휘가 백기완 백범사상연구소 소장과 함께 인제에 나타났다. 선우휘는 필화 사건으로 쫓기는 몸이었다. 소설 ‘불꽃’으로 유명한 그는 조선일보 편집국장이었으며, 종군기자로 6·25에 참전했었다. 반전과 휴머니즘이 깃든 작품으로 유명하다. ‘들국화는 피었는데’도 선우휘 원작이다.

 선우휘는 자신이 각색한 영화 촬영장도 구경하고, 피신할 겸해서 인제를 찾았다. ‘유붕자원방래(有朋自遠方來)하니 불역락호(不亦樂乎)아’라는 말이 있다. 선우휘 같은 문인이 오지로 찾아왔으니 얼마나 기뻤겠는가. 나 역시 선우휘의 반전사상에 공감했고, 이만희 감독도 원작에 충실한 영화를 만들려 했다. 선우휘는 쫓기는 입장이었지만 여유가 있어 보였다. 늘 잔잔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나는 다음 날 아침 인제의 식당에서 선우휘 일행에게 뱀탕을 대접했다. 백기완은 선우휘에게 “형님의 나라는 이런 것 아닙니까”라고 호기롭게 외쳤다. 그들이 야간 촬영 현장에서 벽돌 건물 폭파 장면을 구경하던 중, 벽돌 조각이 선우휘의 어깨를 때렸다. 진짜 TNT를 썼기 때문에 촬영 현장은 위험했다. 백기완은 “위험합니다. 우리 갑시다”라며 선우휘를 데리고 촬영장을 떠났다.

 백기완은 2005년 내가 의정부교도소에 수감됐을 때 영치금 3만원을 보내주었다. 영치금으로선 최저 액수였지만 마음 씀씀이가 깊었다. 권노갑 민주당 상임고문은 “백 소장이 수감생활 했을 때는 영치금 3만원이 일반적이었을 거야”라며 그 액수의 의미를 풀이해 주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빙그레 웃었다.

 김지하는 이 감독을 통해 간접적으로 접했다. 나와 함께 인제의 여관에서 ‘들국화는 피었는데’ 콘티를 보며 배 깔고 엎드려 낄낄거리던 이 감독이 “신짱, 김지하가 말이야…”하면서 숨겨 놓은 이야기를 꺼냈다.

 70년 ‘오적(五賊)’을 발표해 정권의 미움을 산 김지하가 이 감독의 영화 ‘쇠사슬을 끊어라’ 촬영장에서 체포된 것이다. 이 감독은 71년 무렵 흑산도 근처 작은 섬에서 촬영 중이었는데, 김지하가 그리로 숨어들었다. 이 감독과 김지하는 밤새 술을 마시며 정권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들의 대화를 들은 엿들은 한 스태프가 김지하를 체제비판자로 경찰에 신고했다. 밀고자는 그 사람이 김지하인 줄 전혀 몰랐다. 김지하는 섬에서 체포됐다가 여수경찰서로 압송됐다. 그 곳에서 김지하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여수경찰서는 뜻밖에 대어를 낚은 셈이었다.

 당시 서울미대 대학원에 재학 중인 내 여동생 강명희과 남자친구 임세택은 4·19를 소재로 한 교내 소묘전을 기획했다. 서울대 문리대 김지하가 주도하는 학생운동과 연계돼 있었다. 미대 학과장 정창섭 교수가 이 계획을 당국에 사전 신고했고, 김지하 등은 모두 달아났다. 강명희와 임세택은 잡혀서 남산으로 끌려갔다. 마침 우리와 친분이 있는 한무협 장군이 남산 중앙정보부 국장으로 있을 때였다. 내 어머니가 한 장군에게 선처를 부탁했고, 두 사람은 다행히 고문 없이 2주 만에 풀려났다. 내가 아는 우리 역사의 뒤안길이다.

정리=장상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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