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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작품을 말한다]'세자매'연출 임영웅 씨

중앙일보

입력

'세자매' 는 한국 현대 연극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이해랑 선생님의 타계 11주기를 맞아 역대 이해랑 연극상 수상자인 극단 산울림(2회), 박정자(6회), 손숙(7회), 윤석화(8회), 서희승(9회) 등이 중심이 돼 마련한 추모공연이다.

생전의 이해랑 선생님은 안톤 체호프를 좋아했다. 1967년에는 국립극단에서 체호프를 직접 연출해 공연한 적도 있다.

"인생의 심오한 진리가 담겨있는 체호프의 작품이야말로 연극의 진수" 라고 자주 말씀하시면서 "기회가 있으면 한 번 연출해 보라" 고 권하기도 했다.

박정자.손숙.윤석화 세 사람은 저널리즘의 표현대로 우리 연극계의 여배우 '빅3' 다.

나는 그들과 비교적 작업을 많이 한 연출가다. 근년에 이들과 공연한 작품만 해도 '위기의 여자', '목소리', '담배 피우는 여자',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 '딸에게 보내는 편지', '엄마, 안녕!' 등을 꼽을 수 있다.

세 사람은 평소에도 자매처럼 서로 친한데 함께 같은 무대에 출연한 경우는 없었다. 그래서 언젠가는 나에게 여성판 '고도를 기다리며' 를 기획하면 셋이 함께 설 수 있지 않겠느냐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해 웃은 적도 있었다.

개성적이고 역량 있는 이 세 여배우가 한 무대에 등장한다는 것은 연출가에게는 환상적인 배역이고, 특히 관객에게는 큰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 '배우의 예술' 인 연극을 보는 재미는 뭐니 뭐니 해도 자기가 좋아하는 배우를 지켜보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추모공연 레퍼토리를 정하는 데 결정적으로 작용한 요인은 체호프 작품의 현대성이다. 국내에선 체호프가 러시아 작가라는 특수성 때문인지 사회주의 리얼리즘적인 편향된 시각으로 해석돼온 경향이 짙다.

그러나 체호프의 드라마는 그런 이데올로기에 매달리는 작품이 아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모습을, 그래서 인생이란 과연 무엇인가 하는 물음을 던지는 인간 드라마 자체다.

인간의 본질을 꿰뚫는 통찰력이 섬뜩할 정도로 예리하고 뛰어나 '세자매' 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바로 오늘의 우리 무대에서도 큰 공감을 안겨준다.

명작은 시대와 지역을 초월한다. 자기 자신의 문제에만 몰두해 타인의 삶이나 행복에는 무관심한 나머지 오히려 소외되고 고립되어 불행한 존재가 현대인이라면 이런 무관심이 빚는 비극이 1백년 전에 쓰인 체호프의 '세자매' 속에 생생하게 살아있다.

지난 31년 동안 '고도를 기다리며' 를 연출하면서 접했던 글 중에서 현대극의 시원(始原)을 체호프로 보는 주장이 있었고, 부조리 연극의 처음 또한 체호프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세자매' 를 연출하면서 그런 생각에 많이 동감하면서 근대극 '세자매' 가 아닌 현대극 '세자매' 를 무대에 형상화하는데 노력했다.

갈 수 없는 줄 알면서도 행복의 상징인 모스크바에 가기를 갈망하는 올가(박정자), 마샤(손숙), 이리나(윤석화) 세 자매나, 오지 않는 고도를 줄기차게 기다리는 '고도를 기다리는 사람들'….

모처럼 극장을 찾아가 이해랑 선생님을 추모하는 연극 '세자매' 를 통해 명배우의 연기감상의 즐거움과 함께 사람이 산다는 것에 대해, 혹은 한국 연극에 대해 잠시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도 주말을 멋있게 보내는 방법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30일까지 문예회관 대극장. 02-334-5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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