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타무라 시게루 〈고래의 도약〉

중앙일보

입력

하루살이에게 생각할 수 있는 뇌가 있다면 인간의 관점으로는 태어나자마자 단 하루만 살다가 생을 마감하게 되는 존재로서 거의 아무런것도 느끼지 못하고 세상에서 사라져 버릴까? 아니면 나름대로 하루를 인간이 칠/팔십 평생동안 느끼는것과 비슷한 정도로 많은것들을 느낄수 있을것인가?

일본의 초등학교 교과서의 삽화가로서, 일러스트레이터 혹은 판타지 동화작가로서도 알려져있는 타무라 시게루의 〈고래의 도약 (20분) (부제: 유리의 바다)〉을 보고있노라면 우리가 기존에 알고있는 일본 아니메와는 다른 작품의 경향을 느낄수가 있다.
〈공각기동대〉로 대변되는 사이버펑크물이나, 〈세일러문〉이나 〈그남자 그여자〉의 사정과 같은 미소녀 미소년물도 아니다. 그렇다고 로봇물은 더더군다나 아닌, 마치 셍땍쥐베리의 〈어린왕자〉나 〈오즈의 마법사〉를 보는듯한 느낌이 든다. 자극적이지 않기에 보면볼수록 마음이 순화되고 질리지 않는다.

〈고래의 도약〉은 여러모로 그의 93년도 작품인 〈은하의 물고기 (22분)〉의 후속편이라고 볼수도 있다. 〈은하의 물고기〉가 동시에 존재하는 두개의 세계를 공간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면 〈고래의 도약〉은 동시에 존재하는 두개의 세계를 시간적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고 할수있다. 걸어다니는 건물이라던가, 〈오즈의 마법사〉에서 볼수있었던 깡통로봇, 거대한 물고기와 고래, 시계, 바다(은하)와 배, 노인과 아이등의 등장인물 및 설정들이 두가지 작품에서 모두 공유되어있다. 〈은하의 물고기〉에서는 할아버지와 함께 천문대에서 별을 관측하는 유리가 작은 곰자리의 꼬리에 사악하고 거대한 물고기가 별들을 잡아먹음으로써 밤하늘의 별들이 점차 줄어드는것을 발견하고 할아버지와 함께 이 물고기를 잡으로 가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고래의 도약〉에서의 거대한 여객선위의 아이는 넘실거리는 파도나 수면위를 날아다니는 날치, 도약하는 고래의 움직임을 우리와 마찬가지로 느끼는 존재이다. 우리나 아이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존재와 세상이 바다위에 그려진다. 당연히 고래의 눈에도 보이지진 않을것이다. 하지만 이 또다른 바다위의 세상은 여객선과 고래 그리고 우리들도 볼수가 있다. (아마 우리가 이 또다른 세상을 보기위해선 레인(LAIN)에서 등장하는 알약을 먹어야만 할것이다.)
날아다니는 날치도 이들의 눈엔 일순간 공중에서 정지한 듯 보이므로 낚시란것이 있을수없다. 그냥 손으로 잡아 바구니에 남으면 그만이다. 이들에게 바다란 우리가 느끼듯이 흐르는 액체가 아닌 유리로 느껴지며 우리가 느끼는 일상적인 움직임들은 아주 느린 운동으로 일어난다. 그렇기에 휘날리는 물보라의 작은 알갱이를 타고 하늘을 날수도 있으며 고래가 한번 도약하는 짧은(?) 시간동안 4~5장의 그림을 그릴수도 있다. 우리의 관점으로는 프레쉬맨처럼 너무나도 빠르게 움직이기에 시각적으로 보이지 않는 이러한 세상의 사람들이 사실 바다위에 살고있는것은 아닐까? 엄청난 속도에도 불고하고 이들이 타버리지 않는 이유는 바다위에 이들의 세상이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두자.

〈고래의 도약〉이나 〈은하의 물고기〉와 같은 비상업적인 작품들도 반다이사나 소니사에서 제작지원해주는 일본의 현실이 부럽기만 하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