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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스님, 평안하신지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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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가 선택한 맑은 가난은 부(富)보다 훨씬 값지고 고귀한 것이다.’(법정 산문집 『산에는 꽃이 피네』에서)

법정 스님이 18년 동안 머물렀던 전남 순천 조계산 불일암 앞에 있는 대나무 숲길. 법정 스님과 상좌들이 직접 나무를 잘라 만든 길이다.

 지난해 봄꽃이 피기 시작할 즈음이었지요. 법정 스님은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그때 스님이 우리 곁에 내려놓고 가신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무소유. 물질적 가치만 좇고 사는 요즘 우리에게 스님의 말씀은 맑고 향기로운 봄바람과 같았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여전히 어지럽고 혼탁합니다. 마늘밭에 숨겨놓은 110억원 사건도 그렇고, 저축은행이 문을 닫기 전날 밤 몰래 돈을 빼갔다는 사회 지도층의 비열한 행태도 그렇습니다. 이런 뉴스를 볼 때마다 무릎에서 힘이 빠지고 가슴에 휑한 바람이 불었다 갑니다.

 심란한 마음으로 불일암에 올랐습니다. 아니 조계산에 들었습니다. 세상사가 팍팍하다 보니, 문득 선암사 봄 풍경이 그리웠습니다. 선암사가 머리에 그려지니 굴목재 보리밥도 떠올랐고, 불임암에 스님이 놓고 가신 의자에도 생각이 미쳤습니다.

 예부터 ‘춘송광 추해인(春松廣 秋海印)’이라 했다지요. 봄에는 송광사가 좋고 가을엔 경남 합천의 해인사가 좋다는 얘기인데, 절 자체에 대한 얘기라기보다는 송광사를 품은 조계산 신록이 예쁘고 해인사를 안은 가야산 단풍이 곱다는 뜻으로 알고 있습니다. 오는 10일이 부처님 오신 날이지요.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두고 조계산 산행을 결심한 건, 이렇듯이 여러 가지 복잡한 심사가 작동한 결과입니다.

법정스님이 송광사에서 불일암으로 다녔던 무소유길 안내판. 스님의 명언이 적혀 있다.

 불일암에 올랐습니다. 스님이 1975년부터 92년까지 18년 세월을 거처했던 곳이라지요. 마침 봄비가 내렸고 바람이 불었습니다. ‘속세의 욕심을 모두 버리고 오라는, 아니면 마음가짐이라도 정갈히 하라’는 스님의 뜻으로 알아들었습니다. 불일암은 그대로였습니다. 스님이 앉았던 나무의자와 해우소, 그리고 스님이 직접 심었다는 후박나무 모두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안심이었습니다.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데, 스님의 흔적이 남은 산중 암자는 변한 게 없었기 때문입니다. 불일암을 찾아오길 잘했구나, 다시 한번 생각했습니다.

 오솔길 따라 불일암에서 내려오다 보니 스님이 남긴 어록이 팻말에 적혀 있었습니다. ‘행복은 많고 큰 데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작은 것을 가지고도 고마워하고 만족할 줄 안다면 그는 행복한 사람이다.’ 이 구절 하나 가슴에 안고 불일암을 내려왔습니다.

글=이석희 기자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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