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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청춘은 맨발이다 ⑤ 북으로 간 신상옥 감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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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1960년대 충무로 영화판을 평정하다시피 했던 ‘신필름’ 시절의 신상옥(오른쪽)·최은희 부부. 신 감독은 78년 최은희 납북사건으로 인생 최대의 위기에 몰렸다. [중앙포토]


오늘의 나를 있게 한 단 한 사람을 꼽으라면 당연 신상옥(1926~2006) 감독이다. 난 1959년 신필름(신상옥 감독의 영화사)의 신인 공채로 배우 생활을 시작했다. 별명이 ‘영화에 미친 야생마’였던 신 감독의 열정에 큰 영향을 받았다.

 60년대 충무로의 전성기를 주도했던 신 감독은 아내 최은희 납북 사건(78년 1월 14일)에 이어 자신마저 납북(78년 7월 19일)되면서 인생 최대의 굴곡을 겪었다. 지금도 “신 감독이 납북됐다” “스스로 갔다” 는 등의 논란이 있지만 그가 아무런 입장을 내놓지 않아 아직 확실한 건 없다. 다만 당시 신 감독이 한국에서 살기 힘겨웠던 것은 분명하다.

 신 감독은 평소 표현의 자유를 중시했다. 75년 영화 ‘장미와 들개’를 만들며 박정희 정권과 갈등을 빚게 됐다. 신 감독의 애인 오수미가 주연하고, 홍콩과 합작한 이 영화는 당국의 검열을 통과되지 못한 장면을 예고편에 삽입해 물의를 일으켰다. 여배우가 상반신을 노출한 3초간 장면이었는데, 단체관람 학생들이 그 예고편을 보고 탄성을 질러댔다. 이 사건은 다음 날 언론에서 화제가 됐고, 검열을 맡은 문공부 측은 격분했다. 검열의 서슬이 시퍼렇던 시대였다.

 괘씸죄에 걸린 신필름은 영화사 등록을 취소당했다. 당시 영화 제작은 허가제였다. 20여 년 역사의 신필름은 하루아침에 영화를 만들 수 없는 처지가 됐다. 감독의 목숨을 빼앗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발끈한 신 감독은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재판 마지막 날, 즉 선고공판이 있던 날 그는 ‘남산’으로 끌려갔고 결국 행정소송을 취하했다.

 신 감독은 소송 취하 조건으로 1년 후 영화사 재등록을 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리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으로부터 제작비를 지원받아 ‘골리아스’란 영화를 찍었다. 현대조선소에서 25만t급 유조선을 만드는 과정을 그린 작품인데, 내가 용접공 감독 역을 맡았다.

 신 감독 개인의 위기도 있었다. 76년 여름 그는 최은희와 23년간의 결혼생활을 끝냈다. 애인 오수미에게서 둘째 아이가 태어나면서 가정생활이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던 것이다. 또 그가 설립한 안양영화예술학교는 재정난으로 문을 닫을 판이었다. 최은희가 당시 그 학교의 교장이었다.

 신 감독은 내게 ‘구명운동’을 부탁해 왔다. 나는 남산의 한 레스토랑에서 신 감독과 박준홍 총리실 기획관리실장의 만남을 주선했다. 박 실장은 JP의 처남이면서 박 대통령의 조카로서 실세 중 실세였다. 신 감독은 눈물을 글썽이다시피 하며 도움을 청했다. 박 실장은 공감하면서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다. 그로부터 이틀 후 손을 쓸 수 없다는 전화가 왔다. 김성진 문공부 장관이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란 설명이었다. 신 감독이 해외에 다니면서 정권을 비판한 것이 꼬투리가 됐다. 나는 “조금만 기다려 보시라”고 했지만 신 감독은 크게 낙담했다.

 그리고 78년 1월 14일 안양영화예술학교 운영자금을 구하러 홍콩에 간 최은희가 납북된 사건이 터졌다. 언론에선 왜 신 감독이 최은희의 구명운동을 하지 않느냐는 비판 기사가 나왔다. 게다가 ‘골리아스’ 상영마저 무산되면서 신 감독은 정 회장 측으로부터 사기꾼 소리를 듣게 됐다. 사면초가에 몰렸던 그가 한국 땅을 디딜 기력이 더 이상 없진 않았을까. 그게 내가 아는 사실이다.

신성일
정리=장상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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