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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드피디아 [1] 일본이 한달 만에 세계 조롱거리가 된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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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중앙일보가 ‘용어(Word)’로 세상만사를 헤쳐보려 합니다. 하나의 단어에 사례와 팩트(fact)를 접목해 새로운 지식충전소의 역할을 하겠습니다. 때로는 세태를 꼬집고, 때로는 긁어보며 시원하게 진단해보겠습니다.

[자료사진:중앙일보 DB]

#올해 2월 광명역의 KTX 산천 탈선 사고는 컨트롤러(열차의 선로 방향을 바꾸는 기능)의 너트 한 개를 제대로 채우지 않아 발생했다. 선로전환기의 낡은 케이블을 교체하면서 컨트롤러의 7㎜짜리 너트 한 개를 빼먹은 것이다. 이를 발견한 직원은 한 명도 없었다. 이와 관련된 보수 매뉴얼도 없었다. 정비부실을 불러온 허술한 감독, 감추기 급급한 조직문화. 결국 초유의 KTX 탈선사고가 났다.

#최근 동일본 대지진 때 어촌 마을 후다이(普代)의 한 촌장이 쓰나미로부터 마을 주민 3000여 명을 구했다. 이 곳 해안가엔 14m 규모의 쓰나미가 덮쳤지만 높이 15.5m가 넘는 방조제와 수문이 막았다. 방조제는 1967년, 수문은 84년 완공됐다. 총 35억5800만엔(약 470억원)의 예산이 투입됐다. 촌장은 “예산 낭비”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메이지(明治) 시대 15m 높이의 쓰나미가 마을을 덮쳤다는 사실을 알면서 공사를 접을 수는 없었다. 최대의 참사 속에 한 사람의 희생도 발생하지 않았던 이유다.

두 사례의 공통점은 대형 사고를 예방할 기회가 있었다는 것. 차이점은 아주 사소한 잘못을 방치하느냐, 교훈으로 삼느냐이다. 사회범죄학자인 제임스 윌슨과 조지 켈링이 1982년 내놓은 ‘깨진 유리창(Broken Windows)’ 이론의 현실판이다. '어느 가게의 유리창 하나가 깨졌다. 이를 그대로 놔뒀더니 가게 앞은 각종 범죄가 들끓는 곳으로 변해갔다.'

1984년 미국 뉴욕시 교통국에 부임한 데이비드 건 국장. 그는 ‘지하철 낙서’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누구든지 낙서하다 걸리면 벌금을 부과할 것이라고 공표했다. 거리가 깨끗해진 것은 물론이고, 지하철 범죄도 줄었다. 몇 년 후 그는 뉴욕시 경찰청장이 됐다. 만취자를 체포하고 노상방뇨자를 감옥에 집어넣었다. 경범죄에 대한 대대적인 단속을 한 것이다. 주위에선 “한가하다”라는 조롱을 퍼부었다. 그러나 뉴욕시의 살인사건은 이 때를 정점으로 줄어들었다.

◇초장에 잡았다면=‘깨진 유리창’ 방치 현상은 우리 사회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최근의 사례 하나. 올해 2월 주민센터에서 공공근로자에게 모욕적인 언행을 해 물의를 빚은 경기도 성남시의회 이숙정 의원에 대한 징계가 야당 의원들의 반대로 계속 무산되고 있다. 그러던 차에 이달 5일 서울시의회 김연선 의원이 주민센터 동장에게 1시간 동안 폭언하며 고함을 치는 사건이 발생했다. 봉사자인 의원이 주인을 호통치는 희한한 장면이다. 만약 이 의원의 일이 제때 제대로 해결됐다면…. 김 의원이 이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주민을 위협하는 행동은 없었을지 모른다. 현재 이 의원에겐 정상적으로 의정비가 지급되고 있다. '잘못해도 시간만 끌면 의원직을 유지하고 월급도 그대로 받을 수 있다'는 관행이 뿌리내릴까 겁난다. 깨진 유리창 같은 그들을 방치하면 그 지역이 깨진다는 것을 정치인들이 알고는 있을까.

청문회 계절이 오면 증여세 탈루, 위장전입, 논문 중복 게재, 병역 문제, 이중 국적, 부동산 투기 등 다양한 이유로 사회지도층은 공공의 적이 된다. 국민은 내성이 생겼다. “또야?” 이런 이슈가 반복되니 이젠 “관행이다” “이 정도 쯤이야” “하루 이틀도 아니고”라는 자조 섞인 말들이 나온다. 사회지도층은 “죄송합니다, 사죄드립니다”로 은근슬쩍 넘어간다. 망신은 잠깐, 권력은 길기 때문일까. 공직자의 깨진 관행을 방치하다보니 한국사회가 갈수록 피폐해지고 법질서가 무뎌지는 것은 아닐까.

매해 되풀이되는 ‘폭력 국회’는 정말 유리창이 깨진 사례다. 18대 국회를 보자. 미디어 관련법안을 표결 처리하는 과정에서 야당은 국회 본회의장 유리창을 깨고 난입했다. 이들은 어떻게 됐나. 처벌을 받았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1974년 12월 14일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신민당의 정일형 의원이 “박정희 대통령은 하야를 준비할 용의가 없는지”라고 말하자 유정회의 송호림 의원이 발언대로 달려나갔다. 이것이 도화선이 돼 여야의원 수십 명이 서로 치고받는 격투를 벌였다. 이 때 폭력을 휘두른 의원이 모두 교체됐다면…. ‘무관용의 원칙’을 정립해야 했지만 솜방망이식 처벌이 이어졌고 국회 폭력은 현재까지도 근절되지 않고 있다.

◇깨진 유리창 찾기 나선다면=‘깨진 유리창’ 이론을 경영학에 접목한 마이클 레빈은 기업의 작고 사소한 실수가 큰 손실과 경영실패를 부른다고 지적했다. 더러운 주방, 불친절한 직원, 칠이 벗겨진 매장 벽, 덜 닦인 수저 등을 방치하면 거대 기업을 몰락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의심스럽다면 실험을 해보시길. 회사 인근의 깨끗한 화단 한켠에 종이컵 하나를 놔둬보자. 금세 그 일대는 담배피는 사람으로 북적이고, 쓰레기장을 방불케하는 지대로 변한다. 사소한 것 하나가 혁신을 이끌기도 하고, 몰락을 자초하기도 한다.

일본 원전사태도 사태 발생 초기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쉬쉬하는 바람에 원전 자체가 완전히 깨진 경우다. 처음 위험성이 감지됐을 때 원칙대로 국제사회에 알리고 함께 머리를 맞댔다면 이 지경까지 왔을까. 가미카제식으로 자살행위만 거듭했다. 한 번 깨지면(사태수습에 실패하면) 계속 깨지는 원리가 적용된 셈이다. 깨지고 깨지다 결국 건물이 붕괴할 지경이 되자 '백기를 들고 울며 매달리는(스포츠호치)' 치욕스런 국가가 됐다. 전세계에서 당당하던 일본이 전세계의 조롱거리가 되는데는 딱 한 달 밖에 걸리지 않았다.

주변에 깨진 유리창이 없나 점검해보자. 사소한 것이라도 상식에 충실하는 게 기본이다. 상식이 통하면 법이나 규범은 사실 크게 필요가 없다. 상식이 안통하니 법의 잣대를 들이대도 유야무야되고 만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내 자동차의 범퍼가드가 생각났다. 가로·세로 5cm의 구멍이 난 채로 1년째 방치돼 있다. 아마 그 때부터였던 것 같다. 크고 작은 흠집이 생긴 것이.

이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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