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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톤 영웅, 내 할아버지 손기정 영화 만들어 기억했으면 좋겠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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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어 일제 강압정치에 숨죽이던 한국인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준 마라토너 손기정(아래 사진). 하지만 8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 먹고살 만해진 지금 우리가 그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있는지. 그의 가족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는지 관심을 가져본 적은 있는지…. 영웅은 영웅을 맞을 준비가 돼 있는 사람들 앞에만 나타날 수 있는 건 아닌지. LA에서 살고 있는 고(故) 손기정옹의 손녀 손은주(36·사진)씨를 만나봤다.

손은주씨는 손기정 선수의 아들 손정인(59)씨의 장녀다. 명품 브랜드 프라다의 LA 매장에서 판매 담당으로 일하고 있다.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녀는 1989년 손기정 선수와 함께 LA 땅을 밟았다.

 “여름방학을 어떻게 보냈는지 쓰는 숙제가 있었는데 할아버지가 미국에 상을 받으러 가신다는 애기를 듣고 같이 가자고 졸랐어요. 그때는 영어 한마디도 못할 때였는데 또래 아이들과 디즈니랜드도 가고 쇼핑도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어요. 그때 생각했던 것 같아요. 꼭 다시 돌아올 거라고.”

●언제 다시 미국에 갔나요.

 “그리고 2년 후 열여섯 살 때 혼자 유학을 갔어요. 텍사스 댈러스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뒤 뉴욕 패션전문학교(FIT)에서 의상 디자인을 전공했지요.”

 졸업 후 패션 세일즈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그녀는 스물다섯 살 때 프라다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2009년, 평소 서핑(파도타기)을 즐기던 그녀는 16년의 뉴욕 생활을 청산하고 LA로 이사했다.

●할아버지도 패션 감각이 있으셨나요.

 “지금도 할아버지께 베스트 드레서 타이틀을 주고 싶어요. 정말 색감을 잘 맞춰 옷을 입을 줄 아셨죠. 그래서 할아버지랑 손 잡고 밖에 나가는 걸 좋아했어요. 저와 제 동생에게 할아버지는 유명인이 아니라 그냥 멋쟁이 할아버지였죠.”

●기억나는 장면이 있다면.

 “만화영화를 보기 위해 스모(일본 씨름)를 보고 싶어한 할아버지와 리모컨 쟁탈전도 많이 벌였어요. 그리고 어떨 땐 국민영웅이었던 할아버지를 동생과 함께 집 밖으로 쫓아내는 작전을 꾸미기도 했죠.”

 주위에선 할아버지가 대단한 분이라고 칭송을 했지만 함께 생활했던 그녀는 실감하지 못했다. 오히려 유명한 할아버지를 뒀다는 사실이 부담스럽기도 했다.

 “어릴 때 사람들이 ‘너희 할아버지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고 귀에 못이 박이게 얘기했던 기억이 나요. 하지만 어릴 땐 그렇게 주목받는 게 싫었어요. 그래서 어쨌다는 건지…. 스무 살이 넘어서야 할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다시 생각해보게 됐던 거 같아요.”

●할아버지를 다시 보게 된 계기가 있나요.

 “할아버지의 전기를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읽었어요. 그제야 단순히 내 할아버지가 아닌 손기정이란 위대한 마라톤 선수가 다가왔죠. 할아버지가 그 어려운 상황을 어떻게 극복해 왔는지 알 수 있었던 거죠. 왜 진작에 읽어보지 않았나 후회를 많이 했어요. 할아버지가 살아계셨더라면 많은 것을 물어봤을 텐데….”(그녀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손기정은 금메달을 따기까지 험난한 인생을 살았다. 일본 나가노에서 거주할 당시 생계를 위해 국수 집에서 그릇 닦는 일을 했는데, 오전 7시부터 일이 시작되기 때문에 훈련을 위해서는 새벽 3시에 일어나야 했다. 알람 시계가 없었던 때라 발목에 줄을 묶어 창문 밖으로 대문에 연결해 놓고 잠을 잤다. 신문 배달원이 줄을 잡아당기면 ‘아, 3시구나’ 하고 일어나 훈련을 했다.

●손기정 옹이 아버님도 육상 선수로 키우고 싶어하셨다면서요.

 “할아버지는 아버지에게 유난히 혹독하셨어요. 언제나 1등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셨죠. 아버지를 당신과 같은 육상 선수로 키우려고 하셨는데 나중에는 포기하시고 다른 선수들을 기르셨어요. 할아버지는 황영조 선수가 올림픽에서 한국 국적으로 첫 금메달을 땄을 때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하셨어요.”

●할아버지 어릴 적 얘기도 들어보셨나요.

 “할아버지는 어릴 적부터 뛰는 걸 유난히 좋아했는데 증조할머니가 그걸 이해하지 못하셨죠. 땀에 젖은 아들 옷을 자주 빨아야 하기 때문에 아들이 뛰는 걸 싫어하셨대요. 한번은 여자 신발을 사줘 뛰는 것을 포기하게 하려 했는데 소용이 없었죠. 할아버지는 계속해서 뛰었고 나중에는 대회에 나가서 일등을 해 상으로 쌀을 타오셨대요. 그 후부터는 증조할머니의 마음도 조금 수그러졌다고 해요.”

 그녀는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한국인이란 사실을 잊지 않았다. 할아버지처럼 이름도 손은주란 한국이름을 사용했고 미국에서도 그대로 쓰고 있다.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은 꼭 김치를 먹어야 해요. 한국 음식 없이는 못 사는 한국 사람입니다.”

●한국에 대한 바람이 있다면.

 “기록은 4년마다 깨지죠. 내일이면 새로운 운동화가 나오고 모든 게 변하지만 할아버지가 세운 기록은 단순한 기록이 아닌 역사인 걸요. 할아버지에 대한 영화가 만들어졌으면 좋겠어요. 인기가 많은 한류 스타가 영화 주인공을 맡는다면 일본인들도 많이 보고 싶어할 거예요. 앞으로도 많은 사람이 할아버지를 기억했으면 좋겠어요.”

LA 중앙일보 이수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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